부뚜막신은 조왕신보살이다. 전한데 의하면 부뚜막신은 옥황황제가 여러 가정에 파견해 매 가정의 음식을 관리하게 한 신이다. 원시종교시기 고인들은 씨족주재지에 장명불을 지펴 온기를 받고 산짐승을 쫓고 음식을 구워먹었다.
불은 고인들의 생활에서 아주 중요했기에 점차 불에 대한 숭배가 생기게 되었고 많은 신화이야기가 산생되었다. 원시부락이 해체된후 장명불더미도 가정의 부뚜막으로 점차 분화되었고 이때부터 불신에 대한 숭배가 점차 부뚜막신에 대한 숭배로 바뀌었다. 부뚜막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도 후에는 더욱 풍부한 함의가 부여되었다. 즉 ‘한집의 향불을 받고 한집의 건강을 보호하며, 한집의 선악을 조사하고 한집의 공적과 과실을 상주한다'.
민간에서 부뚜막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해마다 음력으로 섣달 23일에 진행된다. 공물로는 맥아당인데 하나는 사탕으로 부뚜막신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단맛을 맛보게 함으로써 ‘하늘에서 좋은 일만 말하고 인간세계에 복을 마련해주게 하기 위해서이다.'
중국민간에서 제일 일찍 봉양한 부뚜막신은 여신이였다. <좡자· 달생>에서는 ‘부뚜막신은 쪽진 머리를 했다.'고 썼다. 사마표는 주석을 이렇게 달았다. ‘쪽진 머리를 한 것은 부뚜막신이며 빨간 옷을 입고 미녀상을 했는데' 빨간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같았다.
후에 도가서적에서는 부뚜막신을 곤륜산()에 있는 늙은 어머니라고 했고 ‘종화노모원군'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수하엔 5방 5제의 조군과 증조조조, 조자조손, 운화장군, 진화신모 등 36신이 있다고 했다. 한편 그는 인간의 주택을 전문관할하고 매 가정의 선악을 적어두며 밤이면 하느님에게 상주한다고 씌여있다.
한조이후에 남성 조왕신이 나타났다. 당시 조왕신은 상당히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 공물의 규격이 사직신과 같았다. 그리고 조왕신을 맡은 사람도 보통이 아니라 모두 대인물들이였다. 사람들은 극히 공경받는 황제와 염제, 불신 축영더러 조왕신을 맡게 했으며 조왕신의 신직은 사람들의 음식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민이식위천'이라고 사람들이 조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왕신의 공덕을 감격해하고 찬양하기 위해서였다.
민간에서는 조왕신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왕신도 신이 아니라 보통사람이라 한다. 그는 장규라고 불렀는데 집이 아주 가난하여 내외는 밥을 빌어먹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어느 하루, 장규가 낡은 절간에 알아누웠는데 병세가 갈수록 엄중해 당장 숨질것만 같았다. 부부감정이 아주 좋았던 장규는 아내에게 <난 오래 살 것 같지 못하오. 당신 혼자 살길을 찾소. 우리 두 사람 다 여기서 굶어죽을 수는 없잖소.> 아내는 마지못해 울면서 장규를 떠났다. 어느날 밤 비가 억수로 퍼붓고 갑자기 번개가 치면서 절간문을 두쪽으로 쪼개 놓았다. 장규는 놀라서 땀을 흠뻑 흘렸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놀란 후 그의 병세는 차츰 나아져 다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밥을 빌어먹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장규는 한 집을 찾아갔는데 집안에서 한 여인이 걸어나왔고 찬찬히 보니 글쎄 자기 안해인것이였다. 알고보니 그의 안해는 그를 떠난후 이곳까지 밥을 빌어먹으며 왔는데 이 집에 남자가 혼자 살고 있었고 그날 마침 비가 내렸기에 그의 안해가 여기서 밤을 묵게 되었고 그후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 결혼한 것이였다. 그는 자기 남편을 보자 그를 집안에 모셨다. 그의 새남편이 집에 없었기에 두사람은 이별후의 경력을 이야기하다 상심스러워 참지못해 끌어안고 울었다.
안해는 그가 아직 밥을 먹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떡을 구워주고 닭알을 볶아주면서 그가 배불리 먹을수 있게 했다. 그런데 장규는 경상적으로 배를 곯았기 때문에 위장이 나빠 한때를 먹었는데 글쎄 배가 터져 죽어버렸다. 그는 새 남편이 돌아와 볼가봐 장규의 시체를 뜨락의 장작더미속에 감추어 놓았다. 그는 장규가 평생 고생만 하고 한번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때를 배불리 먹은 것으로하여 배가 터져 죽을줄을 모른 것으려 하여 아주 속상했다.
그래서 밥먹기전이면 언제나 밥을 장적더미 앞에 가져가 몇마디씩 빌면서 장규가 죽은후에 다시는 배를 곯지 않기를 바랐고 자아위안을 했다. 시간이 오래되자 안해의 이상한 행위가 새남편에게 발각되었다. 새남편은 안해에게 왜서 이러는가고 물었다. 그는 처음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새남편이 재삼 묻자 사실대로 일일이 말하면서 <내가 먹을 것이 있기만 하면 그를 굶어죽은 귀신으로 되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남편은 들은후 아주 감동되어 그가 잘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리 아예 화가를 청해서 그의 모습대로 그려달라고 한 다음 부엌에 붙여두기오. 그러면 우리가 가마 뚜껑을 열기만 하면 그가 첫입을 맛볼수 있을게 아니오?> 안해는 새남편의 말에 찬성하면서 그의 말대로 화가를 찾아 장규의 초상을 그려 부엌에 봉양했다.
그후 안해가 죽었다. 그의 후남편은 그의 초상도 그려서 장규의 상과 함께 부뚜막에 붙여두고 봉양했다. 그후로부터 해마다 풍작을 거두었고 생활은 갈수록 좋아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풍작을 거두어 좋은 날들을 보낼수 있길 바라면서 모두 그를 따라배워 두사람의 초상을 그려 부뚜막에 붙여두고 봉양했다. 이것이 바로 조왕신의 유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