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焦波)는 중국 저명한 촬영사입니다. 지난 30년동안 그는 자기 부모를 위해 약 1만장의 사진을 찍었으며 세기적인 두 노인의 생활 단편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된 촬영작품을 내놓아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매체에 의해 "베이징을 감동시키고 중국을 감동"시켰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촬영사 초파와 그의 아버지, 어머니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올패 초파가 출판한 촬영집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20점의 사진을 선정하고 소박한 문자소개를 달아 그의 아버지, 어머니의 30년간에 걸친 생활단편들을 기록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을 긁어주며,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톱을 깍아주는 등 한쌍의 부부의 생활, 아들딸과 부모 사이의 진정한 감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 촬영집은 1998년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촬영전시회의 연속입니다. 이 전시회는 중국 10여개 성과 시, 1천여개 대학에서 순회전시를 했는데 관객이 연 백만명에 달했습니다. 많은 관중들은 눈물을 흘렸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초파는 사진전이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향 혼합)
"그들의 이런 생활은 그들과 같은 최저층 사람들의 생활을 대표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역시 관중들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속에서 제일 취약한 그 선을 울렸으며 내가 많은 아들딸들이 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평가는 내가 시초에 생각을 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시초에 나는 부모를 위해 뭔가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반향이 크고 상을 받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올해 쉰살에 가까운 초파는 중국 동부의 산동성 치박시 한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편벽하고 가난한 마을이였습니다. 부친을 어릴 때 공부를 4년밖에 하지 못했으며 집에서 목수일을 했습니다. 그는 자식들 가운데 문화가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바랐습니다. 초파는 집에서 막내아들입니다. 형님과 누나는 모두 부친의 념원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초파는 부친의 유일한 희망이였습니다. 초파는 15세때 교원 응시에 통과되어 다른 한 마을에 가서 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부친은 아주 여러해동안 모았던 목재를 팔아 3백원돈으로 초파에게 자전거와 손목시계, 외투를 사주었습니다. 그때 부친의 월 소득은 3원도 되나마나 했습니다.
초파는 부모의 사랑에 감회가 아주 깊었습니다. 1974년, 초파는 동사자의 한 오랜 사진기를 빌어 부모에게 그들의 첫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부모는 그때 어쩔바를 몰라했던 정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명절에만 입던 옷을 꺼내 입었는데, 궤에 넣어둔지 너무 오래 구겨져 있었습니다.
그후 초파는 기회만 있으면 부모에게 사진을 찍어드리군 했습니다. 그는 사진재간을 늘이기 위해 신문에 실린 사진을 모방했으며 전문 촬영사로 되기를 바랐습니다. 1983년, 초파는 치박교육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촬영협회를 조직했습니다. 졸업후 그는 소원대로 한 신문사에 가서 촬영기자로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 그는 부모에게 사진 촬영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사진기로 부모를 기억에 남기려 했습니다.
(음향 혼합)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사랑이 특별히 많았습니다. 그들을 잃을가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날인가는 가버릴께 아닙니까? 나이를 먹은후 저는 보다 더 노쇠해지는 부모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다투려고 했습니다. 나는 사진기로 그들의 희노애락을 남기고 그들의 모습을 남기려 했습니다."
그때 농촌에서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사진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초파는 늘 부모를 촬영했는데, 시간이 흐르게 되지 부모들도 어색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진기의 존재를 잊어버렸습니다. 또 사진기는 그들의 생활의 일부로 되었습니다.
초파의 촬영기술은 날따라 좋아졌습니다. 그는 베이징에 가서 근무하게 된후에도 여전히 달마다 집에 돌아가 부모를 촬영했습니다. 그는 부모가 세상을 뜨기 앞서 그들에게 선물을 올리고자 했습니다. 1998년 초파의 작품이 국제민속촬영경기 최고상인 "인류 기여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포상금으로 어미니의 86세 생일 때 중국예술의 최고전당인 중국 미술관에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이름한 촬영전시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중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업고 미술관에 갔습니다. 소박한 이 농민 부부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난생 처음으로 되는 이 영예를 향수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고향에서 수십년동안 사용했던 가위를 갖고 와서 초파의 촬영전시회에 테프를 끊었습니다.
2000년, 초파는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로 동시에 부모를 촬영했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뜨기전까지 그는 그들을 위해 1만 2천장의 사진과 6백여시간의 비디오테잎을 촬영했습니다. 그는 부모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농촌사회 생활의 변천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초파는 그가 현대 촬영기재로 남긴 부모의 모습을 차마 직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음향 혼합)
"저는 지금 아주 모순된 심정입니다. 30여년동안 극력 부모의 사진을 남겼는데, 남긴후 그들이 작고하자 오랜 기간 감히 사진을 볼수 없었습니다. 어떤 경우 특별히 보고 싶었지만 또 아주 모순되었습니다. 지금은 꿈에서도 젊었을 때의 그들 모습을 보군 합니다."
취재를 수락한 자리에서 초파는 여러번 울먹였습니다. 그는 원래 달마다 고향에 돌아갔댔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가슴 한구석이 텅텅 빈것 같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밤에 전화가 올가봐 휴대폰을 감히 끄지 못했는데 지금은 휴대폰을 끄고 잠을 잘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잠이 들지 못할군 합니다. 그는 근심은 일종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초파는 지금 계속 그의 촬영을 하고 있으면서 부모를 촬영한 영상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하의 부모를 위해 또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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