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가 진단청
일찍 중국 청화대학 미술대의 특별 초빙 교수로 있었던 진단청(陳丹靑)은 최근년래 중국의 주류매체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평범하지 않은 경력과 예술에 대한 끈질긴 추구, 대담히 직언하는 그의 개성과 갈라놓을수 없습니다.
진단청은 50을 금방 넘긴 학자형의 화가입니다. 진단청은 자신의 예술 내력을 "농촌에서 그림을 배웠고 미국에 가서 공부했으며 귀국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라고 3개 단계로 총화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중국 동부 도시 상해에서 보낸 진단청은 우연한 기회에 서양 그림을 접하게 되였는데 그때로부터 그림에 남다른 흥미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1970년 중국 문화대혁명기간 17살난 그는 강서성 농촌에 내려가 농민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하는 농사 일은 해질때까지 끝이 없었습니다. 일에서 고독을 느낀 그는 어떤 때는 일하다가도 밭에 멍하니 그대로 서있을때도 있었습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일이였습니다. 하여 그는 기회만 있으면 화필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것으로 자신의 고독을 달래군 했습니다. 그후 그는 농촌의 골회함 공장의 "직업" 화공으로 일하게 되였습니다. 자신의 경력에 대해 진단청은 이렇게 돌이킵니다.

화가 진단청의 작품
"저는 골회함에 그림을 그리는 직업 화공으로 되였습니다. 촌에서 꾸리는 기업이였는데 당시는 공기업으로 불리웠습니다. 저는 한 오랜 기능공과 함께 일했는데 그가 골회함을 만들면 저는 골회함 뚜껑에 송백장청(松柏長靑), 수비남산(壽比南山) 등 중국화를 그리군 하였습니다. 제가 그린 중국화 가지수만 해도 아마 6백여종은 잘 될것입니다."
그때의 경력은 진단청에게 많은 도움으로 작용했습니다. 그후 진단청은 그림 이야기 책, 삽화, 광고화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정규적인 교육이란 받아본적 없는 진단청은 이미 현지에서 익숙히 알려진 인물로 되였습니다.
1976년 9월 티베트에가 그림 그릴수 있는 기회가 차려졌는데 이때는 바로 새 중국의 지도자 모택동 주석이 서거한때라 전국 인민들은 비통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중대한 정치 사건을 둘러싸고 진단청은 대형유화 작품 "슬픔에 잠긴 풍년벌"을 창작하였습니다. 작품에는 풍년을 이룩한 금빛 찬란한 밀밭과, 비보를 접한 티베트족 농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있는 장면, 검은색 두루마기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슬픔에 잠긴 장면이 담겨져 있는데 극도의 비통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명한 색채의 대조는 인물의 복잡한 감정을 돌출히 했으며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는 예술적인 시각 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후 이 작품은 전국 미술전시회에 참가해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진단청이란 이름 역시 중국미술계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유화 창작에 종사하는 전국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은 분분히 찾아와 진단청을 스스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진단청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티베트 모음화중의 한작품
"이 작품은 저의 히트작입니다. 그 시기 제가 이런 작품을 창작해 뜻밖에 영예을 안아왔습니다. 저는 이 영예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예는 저에게 편리를 도모해 주기때문입니다. 1978년도로 기억 되는데 저는 대학원 시험에 등록 했습니다. 그해 9월에 입학통지서를 받았는데 저는 그때에야 정식 농촌을 떠나게 되였습니다.
중앙미술대학에서 진단청은 체계적으로 서양화 이론을 배웠으며 자신의 직업 화가 생애를 시작했습니다. 2년후 진단청은 창작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다시 티베트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진단청은 소박한 풍토인정에 매료되였습니다. 그는 하루종일 티베트족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관찰을 진행했으며 한폭, 또 한폭의 스케치 창작을 진행해 나중에 걸작 "티베트 모음화"를 형성하였습니다. 1980년 10월 "티베트 모음화"는 중앙미술대학 대학원 졸업작품 전시회에서 주목 받으면서 중국 당대미술사의 이정비로 부상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티베트 모음화"가 성공을 거두었다고 만족할 진단청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부족점이 많다고 인정하고 공부를 더 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82년 그는 미국에 있는 친척의 초청으로 미국에가 유학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가 미국 유학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점이라면 서방의 많은 유화 원작을 접해보는 것이였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진단청은 화랑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 한편 예술 창작을 진행했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18년간 진단청은 화필을 놓아본적이 없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창작했으며 창작 과정에 풍부한 경험을 누적하였습니다.
2000년에 귀국한 진단청은 청화대학 예술대의 특별초빙 교수로 임명되였습니다. 그의 귀국은 중국 예술계에 생기를 부여했으며 그의 예술 이념과 교학 방식은 당시 예술계에 신선함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는 상대에 따라 설법하고 개성을 살리며 각자의 특징을 발휘시켜 개인의 창작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학 방법을 실시했습니다. 진단청은 애증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불리한것에는 분개하고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많은 사람들 인상속의 진단청은 "말하는것을 즐기며 말을 잘 하고 가는곳마다 말한다"라는 것입니다. 공공사무에 관한 분야에서도 그는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예술 교육에 대해 진단청은 자신의 건의를 제출했는데 업계의 인정을 받았으며 중국교육부문의 중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년전 진단청은 청화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자유 화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진단청은 그림그리기를 제외하고 음악 또한 아주 좋아합니다. 2002년에 그는 자신의 수필집 "진단청 음악 필기"를 출판하였는데 이 수필집에는 10년전 그가 뉴욕에서 음악을 들은 감수를 적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책에서 그는 통속적인 언어로 음악애호가들이 관심하는 화제를 다루었습니다. 뛰여난 필력을 소유한 진단청의 문장은 굳어진 틀이 없고 내용이 참신하고 옛스러운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문집 "뉴욕쇄기", "쓸데없는 소재", "퇴보 집"을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저의 편집원의 말에 의하면 저의 책은 출판되면 번마다 매진될수 있고 순위에 오를수 있다고 합니다. 저를 욕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필력에서 모두 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그림은 이런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도 제가 아직 마음속으로부터 생각하고 있는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진단청의 문장은 구절마다 비판적인 정신이 내포되여 있습니다. 그의 "퇴보 집"에는 귀국 5년래의 부분적인 문장들이 수록돼 있는데 회화, 영상, 도시, 교육 등 여러분야의 화제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글에서는 뛰여난 관찰력이 돋보이고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생동합니다. 특히 근대 중국 인문예술 분야에 대한 깊이있는 사고와 재조명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번역, 편집:박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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