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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적을 만드는 사람-요녕성 조선족애심기금회 박성관 회장
2014-05-27 16:18:32 cri

 

(요녕성 조선족애심기금회 박성관 회장)

 

[NAR]:그리스 신화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사랑하여 헬리우스의 태양마차에서 불씨를 훔쳐 그들에게 나눠준 이야기가 나온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 나눔과 기부를 골자로 하는 "자선" 이라는 단어는 바로 고대 그리스어의 "인간"과 "사랑"에 기원을 두고 있다.

[브릿지1]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돈 버는 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사회에 힘 닿는데까지 봉사를 하면서 살아야만이 인생의 가치를 느끼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사랑을 나누면 우리 모두가 행복합니다.(행복하신가요?)행���합니다.]

[NAR]:박성관은 10년째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눔은 곧 행복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는 내노라 할 학력이나 그럴듯한 사회적 직무도 없는 사람이다. 더구나 암 투병 중으로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눔은 숙명이라고 믿으면서 행복 에너지를 전하는 인간 박성관, 그는 우리 주변에 사랑의 기적을 만들고 있다.

(중국국제방송국 강옥기자의 인터뷰를 받고 있는 박성관 회장)

 

"배포와 고집으로 달려왔던 길,그리고 닥친 고난"

[브릿지2]

[인생의 그라운드에서 넘어지고 뒤처지는 사람들을 망각한 채 꿈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초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뒤돌아 봤습니다. 문득 그들이 있기에 내 인생이 더욱 빛을 발할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NAR]: 박성관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자선행사, 내일은 저곳에서 조사연구를 하는 애심기금회 회장의 빡빡한 일상에서 기자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요녕성 조선족애심기금회 회장이라는 직무만 달랑 적혀있다. 유일한 명함이라고 했다. 사업에서 상당히 성공했고 또 업계에서 꽤나 이름 있는 기업가치곤 명함이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인터뷰1-박성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배짱이라 할가, 고집이라 할까, 한 가지 일을 하면 소같은 면이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그런 성질은 있어요."

[NAR]: 그랬다. 40대까지 박성관은 소처럼 우직한 성격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다.

박성관은 1957년 요녕성 무순시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때 그는 생산대의 청년대장, 단지부서기, 당지부서기 직무를 맡았던 마을의 중견이었고, 이어 학교 교단에서 동심을 피워주던 민영교원이었다.

그는 단 배짱 하나로 20대 초반 장사길에 들어섰다. 탁상보 장사로 장사에 미립을 틔우고 새끼 꼬는 기계, 가마니 틀 기계 등을 사서 팔며 원시적 자금을 축적하고 상공인의 꿈을 키웠다.

중국에서 호도거리 농사가 갓 시작되던 1985년에는 담통이 크게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남다른 배짱이 또 큰일을 해냈다. 그가 만든 탈곡기와 압력기계는 요녕성뿐만 아니라 이웃 길림성에까지 대량으로 팔렸다. 화학공업과 석유업에 대량으로 사용되는 압력기계는 전국 각 지역으로 판로를 넓혀갔다.

초창기 회사경영에서 성공하면서 배짱은 더구나 두둑해졌다. 1994년 박성관은 베이징에 진출하여 무역회사 외에도 대형사우나, 음식점 5개를 경영했다.

1997년 그는 또 조선과 협력해 가스발생로(煤气发生炉) 생산공장을 앉혔다. 나중에 이 공장은 국내에서는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행보를 했다.

박성관의 분신과도 같은 요녕성 은덕(恩德)공정건설유한회사는 2002년 벌써 300여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2-3억원의 자산을 가진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회사가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그 무렵, 박성관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간암판정을 받은 것이다.

[인터뷰2-박성관]

"간암수술한후에는 의지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치료를 하면서 교수님들도 괜찮다 해서 중국에 돌아와서 출근을 했습니다.그 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페에 악성종양이 두개 발견됐습니다. 그 순간부터는 사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것입니다. 3일간 잠을 못잤는데 (느낀 것이) 이제는 다구나. 이제는 내인생이 끝이구나."

[브릿지3]

[삶과 죽음, 진정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희망은 무엇이고 절망은 무엇인가?]

[NAR]: 운명은 그를 두 번씩이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죽음 앞에서는 마냥 나약함을 보이는 게 인간이던가? 배짱이 크기로 소문났던 박성관도 이때만은 중심을 잃고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눈만 감으면 악마가 찾아오는 환각이 생겼다. 죽음의 사자가 바로 저쪽에서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박성관은 사흘 낮 사흘 밤을 뜬눈으로 지내면서 유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인터뷰3-박성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하필 나한테 두 번씩이나 들어닥치는가? 그때는 눈물도 안 났어요. 악밖에 안 남았어요.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지 않았을가요? 내가 노력을 해도 살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어요. 마지막으로 내게 남겨진 시간은 6개월, 길어야 일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사회에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할새가 없었습니다."

[NAR]: 한국에서 간암수술을 받은 후 박성관은 산속에 들어가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이면 수원의 광교산에 올라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숙소로 내려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와 무속에도 매달렸다. 그렇게 3년 세월이 흘렀다. 박성관은 우연히 봉사문화를 접하게 된다.

[인터뷰4-박성관]

"그때는 사람이 본능적으로 뭐라도 하나 잡고 싶은 심정이였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니까 따라 봉사를 가는것입니다. 봉사하고 나니까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갑의 돈을 꺼내 보태주고 그 사람들이 뭘 사면 나도 좀 같이 사가지고 가고, 그러다 보니까 사람이 변해가더라구요. 거기서부터 사람이 인생에 이런 쾌락이 있구나...그걸 느끼게 됐습니다."

[NAR]: 요즘도 박성관은 꿈에서 어릴 때의 궁색했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본다. 어릴 때 등교하면 그는 도무지 수업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교실의 난로 위에 놓인 친구들의 도시락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와 미치도록 코를 간질거렸기 때문이었다. 이때 가방에 숨긴 그의 도시락에는 옥수수 죽이 담겨있었고 반찬이라곤 마른 고추 뿐이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친구들의 눈을 피해 혼자 강가에서 시냇물을 국물로 삼아 옥수수죽 도시락을 먹었다. 훗날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밥과 반찬을 한 숟가락씩 갈라주었다. 그때 그렇게 고맙고 맛있던 기억들은 투병시간이 오랠수록 점점 또렷해졌다. 그의 눈에는 드디어 자신처럼 병든 사람,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 반평생을 재부를 쌓는데 바쳤다면 인제는 그 재부를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 박성관은 봉사와 나눔이라는 사랑의 그림에 퍼즐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2008년 중국에 돌아온 박성관은 인민폐 5만원을 들고 요녕성 조선족 경제교류협회를 찾았다. 이때 그는 요녕성 각 지역 조선족 중학교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7명을 선발해 학비를 후원했다. 처음으로 남다른 보람을 느끼고 삶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렇게 시작을 뗀 그의 후원학생 명단은 금방 16명으로 늘어났다.

(청소년 한국방문)

(독거노인 한국방문)

"지천명에 새롭게 태여난 사나이,그리고 도전"

[NAR]: 기원전 387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세운 세상에서 가장 이른 자선기금회 "플라톤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인류의 노력은 오래동안 이어졌다. 유대인들의 수 천년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는 "자선을 행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리 굉장한 부자일지라도 맛있는 요리가 즐비한 식탁에 소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적고 있다.

몇 해 동안 사재를 털어 개인적인 행동으로 자선사업을 해오던 박성관은 지인들과 함께 늘 기업인들의 사회적 책임감을 담론했다. 그 연장선에서 개인적인 한계를 벗어난 단체적인 행동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 더 큰 영향력을 갖추는 애심기금단체를 설립하려는 구상이 무르익었다.

그는 자기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투병자라는 것보다 "나눔이 곧 사명이다"라는 이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 5-박성관]

"민족을 동원시켜가지고 다 같이 이런 문화를 전파하게 된다면 힘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2-3년 동안 준비해서 2012년 8월 29일에 애심기금회를 발족시켰습니다. 각계층의 조선족들,기업인들이 선두에 섰습니다. 모금액이 230만원,물품 30만원 어치를 모았습니다. 총 1040명이 동원됐는데 그렇게 첫 시작을 뗐습니다."

[NAR]:요녕성 조선족애심기금회는 중국 조선족사회에 최초로 되는 민간기금 단체이다.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박성관이 앞장서 인민폐 60만원을 내놓았다. "사랑의 마음"을 뜻하는 "애심"으로 이름한 기금회는 독거노인과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 가정들에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2012년에는 엄선된 136명 학생과 99명 노인들에게 32만 900원을 기증했고 2013년에는 또 학생 134명과 노인 102명에게 34만원을 후원했다.

(15쌍 부부 금혼 기념식)

(건강,장수의 잔을 기울이는 금혼 부부)

박성관은 나눠주고 보태주는 것만이 애심사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해에는 후원자들의 따뜻한 마음에 받들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상 어려움으로 고향땅을 밟을 형편이 못되는 독거노인 65명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여행을 다녀왔다. 또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학비조차 내기 어려운 학생 34명을 5박 6일 일정으로 한국여행도 조직했다. 결혼 50주년을 맞는 노인 15쌍에게 금혼 기념식도 치러줬다. 후원하는 학생들마다 개인 정보 서류를 작성해 그들의 성장과정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취업추천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박성관을 보는 시선들이 곱지만은 않았다.

[인터뷰 6-박성관]

"이 사업을 하는데 뒤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사람은 이름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한다...귀에 들어오기도 하고 앞에서 한마디씩 뱉기도 합니다. 그런 말을 할때는 사상적으로 생각을 갖고 하는 말입니다. 너는 명예나 뭘 위해서 한다는 의도로 저 돈 가지고 뭘 하느냐...못할 말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말들을 다 분석하고 생각하면 사업을 못합니다."

(사랑의 마음 전달)

(나눔 의 사랑에  적극 동참하는 기업인들)

(사랑의 나눔)

[NAR]: 요녕성 조선족 애심기금회를 설립하기 전 박성관은 이미 성공한 기업가였다. 그가 30 여년간 운영해 온 요녕성 은덕공정건설유한회사는 지금도 업계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회사이다. 인제 그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편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다. 또 그런 그에게 기업가 협회 회장 직무를 맡을 것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돈 나오는 기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돈 들어가는 애심기금회 회장을 자진했다. 현재 박성관의 신분과 직무는 딱 하나, 바로 요녕성 조선족애심기금회 회장이다.

[인터뷰7-박성관]

"제가 건강이 좋았더라면 이걸 안했을겁니다. 솔직한 말입니다. 계속 돈만 보고 달렸겠지요, 지금이라도 아마 기업을 계속 키우는데 중시 돌렸겠는데 ...건강도 안좋아 지다보니까 마음이 바뀌는 것이 뭔가 하면 사람이 인생 사는 것인 돈뿐이 아니구나...돈이라는 것이 많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사회적으로 정책이 있었기에 재부를 형성하게 됐고 그 재부에서 일부는 사회에 반환해야 한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습니다."

[NAR]: 박성관은 사랑의 나눔은 사회 화합의 최대 에너지라고 믿는다. 요녕성 조선족 애심기금회 홈페이지에는 이 사회에 발전된 나눔의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다는 박성관 회장의 기금회 설립 초기의 꿈이 그대로 적혀있다.

박성관의 꿈의 도전은 드디어 하나의 기적을 낳고 있었다. 그의 사랑의 꿈은 기적처럼 서서히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 기부하러 오는 사람들... 요녕성 조선족애심기금회를 찾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해 10월 ,애심기금회 설립 1주년 기념대회 때 회원은 1만 6천명으로 약 16배나 성장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330만원의 현금이 모금되고 30만원의 물자가 모여졌다. 시초에는 관망하기만 하던 기업가들도 한 명 두 명 연이어 애심기금에 동참하고 있다.

2012년부터 요녕성의 35개 조선족 소학교와 중학교,고중에서 전부 "나누면 행복해 진다"를 주제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눔문화에 앞장선 이들을 기리는 애심비, 애심전시관을 세우고 덕육교육기지가 개관하는 등 나눔문화는 이곳저곳에 점차 정착되고 있었다.

(독거노인들에게 김치 전달)

(무순 양로원 위문)

(교정에서 꽃피는 사랑의 마음)

(교정에 정착되는 나눔 문화)

 

"'애심'호 항모의 출항,그리고 끝없는 도전"

[브릿지4]

[숨막힐듯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깊은 밤, 재깍재깍 돌아가는 시계 바늘은 오늘도 어김없이 12시를 가리킨다. 시계 바늘추를 조용히 지켜보는 박성관, 이 시각도 그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아니,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남았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순간만큼 인간의 정신은 그 어떤 약보다도 강했다.]

[NAR]: 박성관은 면역력이 낮아 작은 기후변화에도 감기를 달고 산다. 병마 때문에 그는 늘 새벽 1-2시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할 때마다 여러가지 수치들은 정상치에 훨씬 못 미친다.

사실 그에게 빡빡한 일정으로 채워지는 애심기금회의 사업운영 자체를 상상 할수 없다. 의사들은 그를 사랑의 마음이 낳은 기적이라 한다.

박성관은 아직은 정신을 놓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우스개를 한다. 그의 사랑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요녕성 조선족애심기금회는 현재로 설립 19개월차를 맞았다. "애심"이라는 이 사랑의 항모를 더 믿음직하게 출항시키려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자선사업의 문제점들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박성관의 지론이다.

올해 3월 말 현재 중국 대륙에서 공식집계된 자선기금회만 3717개이며 올해 9월에는 무려 4000개에 달할 전망이다. 2013년의 중국 자선사업 투명지수는 43.11점으로 공익자선사업 정보공개상황에 대한 만족도는 아직도 큰 부족점을 보이고 있다. 일부 자선단체는 영리성을 추구하고 기부금을 제멋대로 쓰면서 신용위기까지 겪고 있는 현 주소이다.

[인터뷰8-박성관]

"한번 두번은 개인 안면도 좋지만 장기적으로 할때는 이 시스템을 믿어야 따라 주는것입니다. 일단 기부 들어온 금액에서는 일절적으로 다른 비용을 쓰지 못합니다. 이러기에 기부한 분들이 믿고 따라주는 것입니다. 돈을 진짜 칼날에 썼겠구나. 올해에도 인민폐 200만원을 모금할 계획을 하고 있는데 돌파할 확률이 높습니다."

[NAR]: 현재 애심기금회의 초대비용 등은 고스란히 박성관이 사재를 털고 있는 실정이다. 쉽지 않은 실천을 보여준 박성관 회장의 인격매력에서 비롯된 신뢰와 믿음으로 현재 4세부터 90세에 이르기까지 나눔을 실천하는 "애심"항모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자신의 노임에서 일정 부분을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노 교사, 회사수익금의 10%를 기부하는 기업인, 행사를 단독 후원해주는 사업가... 한때 애심기금회의 후원으로 학업을 마쳤던 학생이 사회에 나온 후 자신의 첫 월급을 갖고 애심기금회를 찾아와 사랑의 마음을 이어가기도 했다. 심양주재 한국 영사와 한국 정치인, 기업인들도 인민폐 40-50만원을 기부했다.

박성관은 암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언제까지 애심기금회를 이끌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는 "애심"호 항모가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달릴 수 있도록 튼실한 기반을 마련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는 애심기금회, 그 어떤 비바람이 불어쳐도 끄떡하지 않을 "애심"호가 그의 꿈이다.

[인터뷰9-박성관]

"건강이 허락되는 정황까지 계속 경영을 하면서 인민폐 천만원 정도를 종자돈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이 종자돈은 그 누구도 다치지 못합니다. 은행에 저금을 하면 일년 이자가 50만원 정도 나옵니다. 일년에 도와주는 비용(과 사업비용 등에) 들어가는 돈이 70만원 정도인데 여기에 조금만 보태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만원 정도 모았습니다. 해마다 100만원씩 늘리면서 지속적으로 추진할수 있는 조건을 창조하면 누가 후임 회장이 되던 잘 이끌어 갈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입니다."

(애심전시관 개관)

(애심비 제막)

 

[NAR]:암 투병생활에서 시작한 나눔의 실천, 그리고 애심기금회의 설립, 인제 사랑의 출항을 시작한 "애심"호...박성관은 이 시점에서 자신과 같은 경우의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인터뷰10-박성관]

"비록 건강이 안좋아 졌더라도 거기에서 포기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노력하면 꼭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습니다. 자선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돈버는 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사회에 있어서 힘 닿는데까지 봉사를 하면서 살아야만이 인생의 가치를 느끼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접수가 힘들지만 하면 할수록 주변 분들이 빠져 들어옵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선사업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

[NAR]: 어쩌면 박성관의 아픔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한사람의 희생이 우리 사회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사람의 실천이 사랑과 행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애심"호 항모를 이끌고 넓은 나눔의 바다로 질주하는 박성관, 그는 나눔의 사랑으로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하나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고 있다.

[글/구성:강옥    사진출처:요녕성 조선족 애심기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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