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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 화백들의 에덴동산
2014-07-29 13:42:31 cri

점심나절이었지만 식당치곤 실망할 정도였다. 손님은 국밥을 주문한 나 말고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웬 젊은 부부가 전부였다. 벽에 줄느런히 걸린 그림들은 더구나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숟가락을 들다 말고 다시 그림에 눈을 빼앗겼다. 그러자 서빙을 하던 종업원이 기다렸다는 듯 식탁에 한마디 떨어뜨린다.

"제일 비싼 그림이 5, 6천위안이지요. 혹시 마음에 드는 그림이라도 있으세요?"

그러고 보니 식당은 국밥과 요리를 팔고 있었고 또 커피와 과일음료를 팔고 있었으며 벽에 걸린 그림도 팔고 있었다. 말이 식당이지 카페와 화랑도 두루 겸하고 있었다.

"798"의 색다른 모습은 은연중 이 "배나무골" 식당에 그림처럼 비껴 있는 것이다. "798"은 화백들에게 전설의 "에덴동산"으로 불리고 있는 예술구의 숫자이름이다.

"798"은 워낙 베이징 시내 동쪽 외곽에 자리한 공장의 이름이었다. 지난 세기 50년대 중국은 "베이징화북무선전연합기재공장" 즉 718연합공장을 건설한다. 798공장은 바로 이 연합공장에 소속한 6개 공장의 하나였다. 2000년 이런 공장을 정합하면서 일부 건물이 방치되었으며 임대 매물로 나왔다. 2002년 초 미국인 로버트가 이곳의 회민식당을 임대하고 앞부분은 가게, 뒷부분은 회사로 건물을 개조했다. 로버트는 중국에서 예술사이트를 꾸리던 사람으로 그와 늘 내왕하던 사람들도 이곳의 넓은 공간과 저렴한 임대비에 주목하고 뒤미처 일부 공장건물을 임대하여 작업실이거나 전시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기계동음만 울리던 골목과 건물에는 그림과 조각이 꽃구름처럼 나타나 단색의 환경을 오색으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기실 초기의 "798" 입주자는 전부 걸출한 선봉예술가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와중에는 서점경영자, 예술 중개인이 있었으며 또 낭만적인 생활을 즐기는 해외 귀국자와 예술팬 그리고 기회를 만나지 못한 예술가 등등이 있었다. 이들은 "798"의 최초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었다.

 

- "에덴동산"에 자라는 생명나무 -  

"798"의 약간 후미진 골목에 있는 "견심(見心)회관"은 불과 20여평 정도의 단층 건물이다. 그러나 직원 임금이나 전기, 물 요금 등 운영비용을 제외한 1년 임대비만 해도 무려 20만위안이라고 한다. 견심회관은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고 전시가 끝난 후이면 작품을 일부 회사에 남겨 전시비용을 충당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전시공간을 제공한 비용으로 일별 5천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사장님은 장기적인 투자를 목적으로 회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씨 성의 직원이 해명하는 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회사의 경우 웬만한 재력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또 가난한 화백이라면 비용 때문에 문턱을 넘보지 못할 장소였다.

그럴지라도 "798"은 여전히 많은 화백들의 주목하는 무대로 되고 있다. 예술가들이 포진하고 있고 또 여러 계층의 고객이 찾아오는 "798"이기 때문이다.

장조휘는 다른 곳에 개인화랑을 갖고 있는 화백이었지만 특별히 이곳에 그의 "쌍방향 실험, 새로운 수묵화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회 기간 미술계의 전문가와 지인들은 자주 견심회관에 모여 장조휘가 새롭게 시도한 수묵화의 표현기법을 두고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는 대가들의 그림강의를 무료로 들을수 있는 기회였지요." 장씨 성의 직원은 나름대로 장조휘의 작품전시회를 이렇게 품평했다.

"798"은 여느 미술관이나 전시장과 달리 작가와 독자의 연동이 쉽게 이뤄지고 작품이 보다 더 쉽게 고객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 "798"이라는 자체가 연합공장이라는 원래의 이름처럼 예술의 대환경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취락을 이룬 "798"에는 그들의 "취미 공동체", "창조 집합체"가 영혼으로 되고 있다. 사실상 예술구는 자발적이든 피동적이든 거개 예술가들의 취락과 관계된다. 멀리 서안의 방직성(紡織城)이나 중경의 황각평(黃桷坪), 곤명의 창고(倉庫)는 물론 베이징 초기의 원명원 화백마을과 훗날의 송장(宋庄) 화백마을… 등등이 바로 그러하다.

예술가들에게는 2008년 무렵이 "798"의 전성기라고 전해지고 있다. 소장자들과 투자업자들이 예술품에 눈길을 돌리고 기금, 펀드 등 자본이 대거 예술품에 유입되면서 "798"은 한시기 "반딧불"같은 호황을 누렸던 것이다. 자그마한 가게에서 하루에 몇만위안이나 몇십만위안 지어 몇백만위안어치의 작품을 파는 실적을 올렸다는 기문이 행상처럼 종종 "798"의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이러니저러니 "798"의 예술군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주변 공장구역 지어 공장 바깥쪽 구역으로 자리를 넓혔다. "798"이라는 이름은 차츰 베이징 도시문화의 새로운 상징물로 등장했다. 베이징 시민은 물론 외지의 관광객 지어 외국의 일부 수반들도 "798"을 방문일정에 넣고 있는 현주소이다.

 

- "에덴동산"에 오르는 사람들-  

"저는 단순한 수익을 위해서 이곳에 온게 아닙니다."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영국인 빌리의 말이다.

빌리는 베이징 현지의 사업에서 수익을 보자 곧바로 "798"에 예술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빈다면 순수하게 그 자신의 예술취미와 자아의 표현을 위해서였다. 갤러리는 방 하나의 크기였지만 바닥에는 강물을 상징하는 흰색의 돌 조각들과 그 위에 놓인 작은 나무배 하나가 전부의 전시물이었다.

"개체의 자각상태는 여정과 유목의 도중에 있어요. 여정과 유목은 우리를 진화와 자아해방의 시각(時刻)에 놓고 있습니다."

빌리가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신세계"는 그의 예술공간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장은 언제인가부터 "798"의 안내판에 명시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소문을 놓고 있는 건 이런 갤러리만 아니다. 화단에서 내노라 하는 대가들의 작품도 "798"에 심심찮게 얼굴을 내민다.

그들에 비하면 화백 장조휘는 아직까지 "무명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비싼 임대비에도 불구하고 "798"에 작업실을 갖고 있다. 전시기획, 예술평론을 겸하여 하고 있는 그에게 "798"은 놓쳐버릴 수 없는 무대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전옥순은 이와 전혀 다른 코스이다. 그는 몇년전 지인의 부탁을 받고 "798"의 오랜 건물을 보수하면서 그때 비로소 "798"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여긴 오랜 공장들이 아닙니까. 건물이 하도 낡아서 비가 오면 천정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 바닥에 양재기를 놓고 있었지요."

훗날 이 건물에서 그림 작품을 경영하던 사장은 이런저런 원인으로 사업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전옥순은 아예 건물 소유주이자 전시장 경영자로 된 것이다. 현재 그는 3층짜리 단독건물에서 조선민예예술중심의 작품을 전문 전시, 판매하고 있다. 조선민예예술중심은 유화, 국화, 판화, 민속악기, 수공예품 등 전통예술을 망라, 조선 관방 배경을 가진 미술관이다.

"금방 만든 전시장이라서 우리는 아직까지 홍보를 위주로 하고 있어요."

전옥순은 손님이 많다고 해서 그림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고 곱씹어 말한다. 어떤 날에는 관광객들이 수백명이 다녀가도 그림은 한점도 팔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전시장이라면 전문인이 전시장을 찾게 하고 또 시민들에게 그림을 확실하게 알리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선의 유명한 만수대창작사는 이보다 훨씬 앞서 "798"에 진출하고 있다. 2010년 개장한 신관은 2층짜리 단독건물인데 80여점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으며 수공예품, 도자기, 우표 등도 전시, 판매하고 있다. "798" 북문 부근에 위치한 이 건물은 밖에 호랑이와 천리마 조각상을 세워 이국적인 색채를 자랑하고 있다.

"바람을 따라 구름이 간다." 현재 200여개의 문화예술과 관련한 기구가 "798"과 그 주변 지역에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798"에만 100여개의 기구가 있는데 와중에는 창작전시와 교류, 설계 유형이 주종이며 이밖에 예술창작 부문과 인연관계를 맺고 있는 발행, 서점 그리고 식당 유형의 작은 가게들이 있다.

2011년 강소성에소 조선 백호창작사 화백들과 함께 있는 권영씨(가운데 노란옷을 입은 여성)

- "에덴동산"은 어디로 - 

"798"에 상업자본이 개입하면서 예술가들의 생존공간은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도심과 가깝고 또 건물 임대료나 음식 값 등이 저렴하던 시초의 지역적인 우세는 흘러간 옛말로 되었다. "798" 중심지역의 건물 임대료는 일별 평방당 10위안대에 이른다. 이에 따라 "798"에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줄어들고 대신 카페나 식당, 상점이 늘어났으며 지어 옷가게도 생겨났다.

장조휘도 베이징 교구에 따로 화랑과 작업실을 마련하는 등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798"에서 전시장이나 가게 등을 운영하는 업주가 조석으로 바뀌는 현상은 더는 기문이 아니다. "배나무골"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그동안 벌써 주인이 여러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일부는 아예 사업을 접고 "798"에서 떠나갔으며 말 그대로 옛 그림속에 있던 사람으로 되고 있었다.

"인제 '798'에서는 전시장과 같은 예술공간보다 가게가 더 잘 된다고 보아야죠." 베이징에서 모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권영 사장의 말이다.

권영은 "798"이 아닌 베이징 도심의 동쪽 변두리에 미술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비록 예술시장에 입문한지 5,6년에 불과하지만 그의 이 갤러리의 흥행은 벌써 베이징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이 갤러리도 조선그림을 경영품목으로 삼고 있지만 타깃은 그림 경매시장이라고 한다.

"'798'에도 상업적인 활동이 많지만 실제 매매가 이뤄지기보다는 주로 홍보와 같은 창구적인 역할을 많이 한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권영은 전문인답게 이렇게 "798"을 단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했다.

기실 성공한 조선족화백으로 불리는 박광섭씨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798"을 제품을 파는 가게에 비유하고 있었다.

"지금은요, '798'은 상업화가 가열되어서 오히려 이상한 모양새로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세계 어느 곳이나 예술구의 흥기는 거개 시장의 혜택을 입지만 최종적으로는 또 이 시장으로 하여 파멸된다. 뉴욕의 소호, 런던의 테이드 모던 등은 모두 도시의 빈민구였지만 예술가들이 집단거주하면서 예술의 메카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러나 이런 메카는 나중에 모두 화랑과 바, 호텔, 클럽 등에 자리를 빼앗기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이라는 에덴동산의 이 금단의 "사과"에 맛을 들인 "798"은 구경 어디로 가게 될까…

(글: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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