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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마을", 그림 속에 펼쳐진 향연
2014-08-03 18:54:01 cri

사진설명:화백마을의 거리

한낮이지만 마을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정말이지 이곳에 화백 등 예술인들이 운집하고 있다는 게 누군가 일부러 지어낸 거짓말 같다. 대로의 양쪽에 줄느런한 화랑이며 문방도구의 가게 등이 아니라면 "화백마을"을 잘못 찾아온 줄로 착각할 수 있다.

송장진(宋庄鎭)은 베이징 아니 세계적으로 소문난 "화백마을"이다.

마을에는 불과 10년 전까지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이 가로세로 뻗어있었다. 지금은 포장도로로 깨끗하게 장식되었지만 그래도 교통 상황은 별로 좋지 않다. 마을버스가 여러 군데를 들려서 오다보니 시발역인 베이징 동쪽의 통주(通州)에서 한 시간 정도 푼히 걸린다.

마을의 파다한 소문만큼이나 많지 않은 관객은 그런 영문이 있어서일까…

"아니요, 우리 이곳에는 예술 전문인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장조휘(張朝輝)는 "화백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이렇게 한마디로 끊어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화백마을"은 여느 명소처럼 관객이 잡다하지 않다. 화백들의 그림 작품을 주요 타깃으로 삼고 찾아오는 고품격의 전문인들이 주류라는 것.

장조휘는 베이징에서 나서 자란 토박이 화백이다. 그는 3개월전 진 소재지인 송장(宋庄) 마을에 작업실과 화랑을 마련하고 신입 "촌민"으로 등록했다고 한다.

"저와 같은 화백은 이 마을에 4,5천명 된다고 할 수 있지요. 작업실의 수자가 그만큼 되니까요."

현재 마을의 예술인들은 어림잡아도 1만 명을 넘는다고 하니 진짜 웬만한 사단(師團) 규모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해내외의 최대의 "화백마을"이라는 이름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사진설명:작업실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장조휘 화백

원명원에서 "화백마을"이 소각되다

기실 베이징 최초의 화백마을은 서쪽의 원명원(圓明園) 부근에 있었다. 원명원은 청나라가 150년에 걸쳐 건설한 황실원림이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 일부 화백들이 원명원 부근의 값싼 단층집에 입주하면서 차츰 화백들의 예술군락을 형성했던 것이다.

이 예술군락의 입주자였던 화백 양위(楊衛)는 당시 정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바로 원명원 화백들이 갖고 있는 모종의 인성해방의 색채는 전변기의 중국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정신적 샘플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인텔리들을 매혹했으며 또 일부 고위층 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에피소드라고 할까, 이 예술군락에는 조선족 화백도 2명 있었다고 전한다.

어쨌거나 "원명원 화백마을"은 짧디 짧은 몇 해 사이에 내외에 소문을 들썩하게 놓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와 때가 있는 법이다. 그때 중국은 아직도 지난날의 계획경제에서 완전히 해탈되지 못하고 있었다. 호적제도의 멍에를 벗어나 타지에서 베이징으로 유랑하고 거처를 잡은 사람들은 사회의 불안정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더구나 화백들의 전위성(前衛性)은 "화백마을"에 알게 모르게 남다른 색채감을 띠게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화백마을"의 영향력은 자의든 타의든 막론하고 미술계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화백들을 보는 눈길이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요?" 이름을 밝히는 것을 거부한 류씨 성의 화백은 이렇게 사회의 편향적인 시각을 꼬집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화백의 예술 자체보다 화백들의 생활방식에 주의를 돌린다는 것. 남보다 다른 머리모양, 남보다 다른 행동거지… 등등에 집착하다보니 화백들은 자연히 인간의 군상(群像)과는 다른 이상한 사람들로 비쳐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붙는 불에 키질 하는 격"이였다. "원명원 화백마을"의 일부 화백들은 생활방식의 "특이함"과 행위방식의 "특이함"을 집요하게 추구하였다. 1995년, 장씨 성의 화백이 원명원 부근에서 식당의 식객들을 상대하고 밥상우에 오줌발을 날린 일은 극단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솔직히 사회가 다양화된 현재로서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갈지 모르지만 20년전까지만 해도 절대 용인할수 없었다.

"원명원 화백마을"의 원로인 방력균(方力鈞, 현재 중국국가화원 당대예술연구센터 주임) 등은 이와는 또 다른 "이색적인 사람"이였다. 그들은 예술가는 생활의 행위방식이 아닌 작품을 통해서 진정한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을 화백들과의 생각의 차이 그리고 외계의 편협적인 시각은 그들에게 부득불 다른 길을 모색하게 했다.

이 무렵 "원명원 화백마을"에는 소문과 더불어 내외 기자와 그림 소장자, 예술 애호가들이 줄을 지어 찾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화백들에게 여러 가지 기회를 갖다 주었지만 또 화백들의 아늑한 창작 환경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화백마을'은 원명원에서 더는 존재할 가치를 상실한거지요." 류씨 성 화백의 말이다.

통주의 송장진에 있던 지인이 구세주처럼 마침 좋은 정보를 제공했다. 그때 송장진에는 농민들의 도시진출에 따라 빈집이 적지 않게 생겼다고 한다. 게다가 집값이 거짓말처럼 아주 저렴했다. 100㎡나 되는 농가의 가격이 단 1만원(RMB)도 되지 않았고 농가와 뜰을 포함한 1무(畝)의 1년 임대비가 1천원(RMB) 미만이었다.

미구에 방력균 등 주류 화백들이 자리를 뜨면서 "원명원 화백마을"의 해체는 급물살을 타게 되였다.

꽃의 향기가 스러지니 벌들이 하나 둘 날아갔다. 꽃의 화원은 벌들에게 아득한 꿈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1995년 여름 "원명원 화백마을"을 해산할데 대한 정부의 통지문이 내렸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일부 화백들도 전부 원명원을 떠났다. "화백마을"은 마침내 1백여 년 전 하늘에 재로 날려갔던 원명원처럼 그렇게 이름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진설명: 화랑 일각

향연이 펼쳐진 "화백마을"

"정말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남경 동남대학 미술학부에서 교수로 있는 구군(邱軍)은 그때 그 일을 회억하면서 웃음부터 흘렸다.

10여 년 전, 구군은 앞뒤를 재지 않고 송장진에 농가 한 채를 임대했다. 그저 화백들이 모여 있는 군락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리 밖 남경에서 송장진을 왕래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였다.

"그렇다고 화백들의 낙토(樂土)에 만든 이 작업실을 포기하긴 싫었지요."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어렵사리 찾아오니 뜰에는 어느새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고 있더란다. 그래서 구군이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손에 잡은 건 화필이 아니라 낫이었다고 한다.

지금 구군은 대학교와 상의, 강의시간을 학기당 1개월로 집중하고 남은 대부분의 시간을 "화백마을"에서 보내고 있었다.

"화백들끼리 언제든지 서로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좋구요. 또 회화 도구랑 사는데도 정말 편리합니다."  

송장진은 급기야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화백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화백마을"은 방불히 무덤에서 나온 보물처럼 금세 항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사실상 화백들이 입주하기 전까지 송장진은 주변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자그마한 시골 동네였다. 송장진은 일찍 원나라 때 송씨 성의 사람이 무덤을 지키면서 생긴 지명으로 그동안 별로 자랑할만한 인물도 나오지 않았고 또 특이한 일도 생기지 않았으니 그럴 법 한다.

사진설명:2층 작업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는 구군 화백

"제가 올 때는 중심지대의 마을에 빈집이 별로 없었지요." 화백 박광섭은 10여년전 그가 부근의 임장(任庄)마을에 입주하던 정경을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 화백들은 송장진의 소재지인 송장(宋庄) 그리고 부근의 소보촌(小堡村)을 채우고도 모자라서 주변의 마을에 자리를 펴고 있었다. 현재 송장진의 47개 행정마을에서 10여개가 화백의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송장촌과 소보촌 일대는 화랑과 전시실, 예술센터, 문방구 가게 등이 줄느런하게 늘어서있다. 명실공한 "화백마을"의 중심지로 된것이다.

"중국 당대미술의 편년사에는 꼭 최대백(崔大伯)이라는 인물을 써넣어야 합니다." 박광섭은 인터뷰 내내 최대백이라는 이 이름을 여러 번 곱씹었다.

최대백은 소보촌의 촌장으로서 송장진 "화백마을"의 생성과 성장에서 버팀목으로 공인되고 있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마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길목을 지키고 바깥사람들의 내왕을 막았지요."

비록 바깥세계는 날을 따라 변하고 있었지만 송장진은 그때까지 거의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폐쇄된 울타리에 갇혀있던 촌민들은 기이한 복장과 행위의 사람들이 제멋대로 마을을 드나드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때 최대백은 그들을 설복하여 "지하" 상태의 당대 미술가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훗날 마을의 간부들은 당대미술을 발굴하여 수면 위에 부상시키고 또 정부의 지지를 쟁취했다. "송장진 예술축제" 등 행사는 송장진에 거듭난 "화백마을"의 인기를 동네방네 자랑했다. 2005년 송장진은 베이징시 정부로부터 "창작예술과 카툰산업 집거구"라는 칭호를 받기에 이른다.

꽃의 향기가 활짝 피어나니 벌들이 떼를 지어 날아들었다. 뒤미처 꿀을 탐하는 나비와 개미들도 줄을 이어 찾아왔다.

"화백마을"은 더는 화백들의 정토(淨土)가 아니었다.

저택마당에서 취재를 받고 있는 박광섬 화백

"화백마을"에 비낀 그림자

"화백마을"은 최초에 빈집을 그대로 임대하던 데로부터 화백들을 위해 작업실을 따로 신축하거나 개설하고 있다. 그동안 상업의식이 싹튼 촌민들은 작업실에 더는 예전의 "배추" 값을 매기지 않았다.

"말도 마세요, 가격이 몇 십 배나 올랐어요." 구군은 한심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구군이 새로 임대한 2층의 작업실은 약 200㎡, 1년 임대비가 5만원(RMB)이나 된다고 한다. 예전의 임대비는 저리로 울고 가라는 식이였다.

"앞으로도 임대비가 지속적으로 오를것 같습니다." 오랜 "촌민"인 박광섭은 "화백마을"의 앞날을 두고 이렇게 근심을 했다.

"부동산 업자들이 개입하고 있는데요, 임대비가 오르지 않을 수 없지요."

"화백마을"의 물가는 계속 상승세를 긋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화백들의 작업원가는 눈에 뜨이게 늘어났다. 많은 가난한 화백들과 젊은 화백들은 높은 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화백마을"을 떠났다.

"화백마을"에서 전성기에 6천명을 넘던 화백들은 결국 1천 여 명이나 줄어들었다. 그때 거의 100명에 이르던 조선족 화백들도 나중에는 단지 1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의 화백들 가운데서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잇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구군은 "화백마을"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지 말라고 하면서 "화백마을"의 현실은 아주 냉혹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화백은 경제형편 때문에 그림과는 별개의 회사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그림 그리기가 부업으로 되고 있다는 것. "기러기"처럼 날아와서 잠깐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 떠나가는 화백도 적지 않았다.

구군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전문인답게 "화백마을"의 화백 성공률을 단 1%라고 단언했다. 박광섭처럼 이곳에 일찌감치 가옥을 사서 명실공한 "촌민"으로 있고 또 작품을 전속 화랑에 전시, 판매하고 있는 화백은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조선족 "촌민"의 대부분이 1%의 희소 군체 명단에 들어있다는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화백마을"의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갈수록 많은 상업자본이 "화백마을"에 물밀듯 밀려들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뚝딱거리며 키 돋움을 하는 새 건물들은 한적하고 조용하던 시골의 분위기를 말끔히 밀어버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화백마을"은 예술품 경영자들과 산업 개발상들의 낙원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산야에 있던 화원은 번화가의 유흥지로 된 것이다. 더는 벌들의 낙원이 아니라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향연으로 탈바꿈한 것.

그렇다면 송장진 "화백마을" 역시 애초부터 파멸의 숙명을 타고 나지 않았을까?… 어쩐지 잿더미로 사라진 "원명원"의 백년의 저주가 들리는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이었다.

(글: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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