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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적벽, 대문호 소식(苏轼)의 흔적이 담긴 곳
2015-05-05 16:23:33 cri

동파육은 요리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 요리이다. 최근 한국 유명 세프의 동파육 레시피가 공개되면서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간장, 설탕 등 갖은 양념에 푹 고아 낸 모로 된 동파육 한점을 입에 넣으면 육즙이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짭조롬하고 달콤한 향이 입안 깊숙이 배인다.

"우리 황강 황주에 오면 동파육은 꼭 맞보아야지요." 우리의 안내를 맡은 류장청(柳长青)은 일행에게 이렇게 동파육을 선전했다.

류장청은 황강(黄冈)시 선전부의 부부장이다. 사실 황강하면 중국 해방전쟁의 전쟁터로 많이 알려졌지만 이에앞서 중국 대문호 소식(苏轼)이 좌천되어 머문 곳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동파육은 바로 소식의 호 동파거사의 동파를 따서 명명한 요리라고 한다.

"황주에는 돼지고기가 싸고 많았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먹으려 하지 않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은 요리법을 몰랐지요. 이때 황주에 머물던 소동파가 고기를 모로 썰어서 푹 고아 동파육 요리를 만들어냈지요."

그때 사람들은 소식의 레시피대로 동파육을 만들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소식은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을 뿐만아니라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불후의 명작인 "적벽부(前赤壁赋)"와 "후적벽부(后赤壁赋)", "염노교, 적벽에서 옛일을 회상하다(念奴娇,赤壁怀古)"를 펼쳐냈다. 소식의 시풍은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고려 문학가 이규보는 "당시 고려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면 사람들은 올해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입을 모았다."고 했다.

소식은 북송 인종 때 매산(眉山)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 시험의 위원장이였던 문단의 맹주 구양수(欧阳修)의 극찬을 받았다. 소동파는 또 제과(制科, 특출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황제가 특명을 내려 친히 시행하는 특별시험)에 합격해 정치적 재능도 인정받았다. 유능한 사람 주변에는 항상 시기하고 발목잡는 무리들이 있는 법, 당시 왕안석을 중심으로 신법을 강행했던 신법파 인사들과 정치적 주장이 엇갈렸던 소식은 모함으로 북송 원풍3년(1080)에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황주로 좌천된다.

황주는 현재 황강시에 속해있는 한개 구(区)로 호북성 동부, 대별산 남쪽기슭에 위치해 있다. 황주의 옛성 한천문(汉川门)을 나서면 북쪽에 적색을 띤 바위절벽 "적벽"이 보인다. 진나라 때부터 이곳에는 서하루, 월파루 등 유명 건물을 지어져 있었다. 황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소동파는 이곳에서 "적벽부" 등 걸작을 남겼다. 후세 사람들은 소식을 기념하고저 동파적벽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동파적벽에는 소동파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동파적벽의 정문에 들어서니 소동파의 조각상인 동파상이 한눈에 안겨왔다. 뒷짐을 지고 흩날리는 바람을 맞받으면서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평안함과 느긋함이 어려있었다. 조각상을 지난 후 우리 일행은 소동파의 자취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파적벽의 주색은 단연 적색이였다. 성벽이며 계단이며 바위, 토양도 불균형하게 적색빛을 띠고 있는 것이 고색창연한 운치를 더해주었다.

성벽의 계단을 따라 적벽에 입성해 최초로 찾은 곳은 이부당(二赋堂)이였다. 청나라 초기에 지어진 이부당은 동치 7년(1868)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부당에 들어서니 정면에 우뚝 선, 목조로 된 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목조벽은 총 8조각의 향장목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소동파의 명작 "적벽부"와 "후적벽부"가 앞뒤면에 적혀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정면은 청나라 정지정(程之桢)이, 뒷면은 근대 유명 서예가 이개선(李开先)이 다시 옮겨썼다고 한다. "적벽부"를 보노라니 어디선가 소동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대자연 앞에서 인생이 망망대해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에 불과할 만큼 보잘것없다고 슬퍼하는 벗"에게 소동파는 충고한다.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이나 사람이나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한다고 할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니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유해야 한다"고. 반대파의 모함에 들어 누명을 쓰고 요직에 물러난 소동파는 오히려 그 해탈한 마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현재 정처없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우리 삶에도 가끔 소동파의 해탈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색의 실마리를 안고 일행은 파선정(坡仙亭)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소동파의 친필서예서화가 새긴 비석이 14점 전시되어 있다. 파선정 내부 왼쪽면 하단에 걸려있는 비석에는 소동파의 명작 "염노교, 적벽에서 옛일을 회상하다"에서의 일부분이 적혀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맞은켠에 적혀있었다."장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적의 돛대와 노는 불에 타 재 되어 사라지고 말았겠지" 여기까지는 필체가 호방하면서도 나름 정연하지만 뒷부분으로 가면서 점차 크기, 높낮이가 달라 다소 정연하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는 소동파가 오랜만에 취기에 젖어 즉흥적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소식이 벗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술을 기울이던 수선정(睡仙亭)은 바로 이곳에서 서쪽으로 불과 10여 보 상거한다. 소식은 때론 취해 이 정자에서 잠들었는데 그 모습이 흡사 신선같다고 하여 졸음 수(睡)에 신선 선(仙)을 따서 수선정(睡仙亭)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수선정은 북송시기에 최초로 세워졌다. 세면이 벽으로 되고 앞면은 목조난간으로 가로 막았다. 정면 벽에는 울퉁불퉁한 넓은 턱이 붙어있었다. 동치7년에 재건한 이곳에서 앞을 내다보니 먼발치에는 낮다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앞에는 수초가 떠있는 푸른빛 강이 놓여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먼 옛날 현재 건물의 위치까지 모두 장강이 흘러 적벽에까지 오려면 배를 타고 와야 했다고 한다. 줄기차게 흐르는 넓디넓은 강물을 그려보니 마음이 확 트일 것 같았다.

수선정을 지나 이부당 동쪽에 자리잡은 비각(碑阁)에 이르렀다. 비각은 현재 중국에서 소식의 친필작품을 가장 많이 온전하게 보유하고 있고 모각이 가장 잘된 비림이다. 비각의 사면에는"경수원첩(景苏园帖)"석비 126조각이 붙어있다. 경수원첩(景苏园帖)"석비는 청나라 광서16년(1890) 황강지현 양수창(杨寿昌)이 유명한 감상가 양수경(杨守敬)에게 위탁해 소식의 정품을 선택해 집성한 것이다. 이 중 119조각은 소식의 친필작품이고 나머지 7조각은 역대 명인들이 옮겨적은 것이다. 비각 내부에 들어가자 바람으로 첫줄에 세로로 네 조각으로 이어진 소식 친필작 "적벽부"가 안겨왔다. 소식의 서예풍격은 대체로 글씨체가 크고 호방하며 필치가 거침없다. 그의 제자 황정견(黄庭坚)은 소식의 글씨체를 보고 우스개로 스승의 글씨는 넓고 납작해 돌이 하마를 눌러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황정견의 글씨체는 가늘고 길어 소식은 나무에 뱀이 걸린 것 같다고 응수하면서 서로 호탕하게 웃었다고 한다. 소식과 8살 제하인 황정견은 모두 중국 서예사상 대가이다. 사제간의 허물없는 대화에서 소식의 넓은 아량이 엿보였다.

이부당 뒷문에서 나와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동파적벽의 최고봉에 놓인 서하루(栖霞楼)가 보인다. 정면의 편액 "서하루"는 문학가 모순이 친필로 쓴 것이다. 산과 강을 사이두고 울창한 나무사이에 우뚝 선 서하루는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인 강물에 비낀 비경으로 유명하다. 그런 고로 송나라 황주 4대 명루 중 하나로 "강회절승"의 미명을 가지고 있다.

서하루는 붉은 기둥에 푸른 겹처마 지붕으로  3층으로 되었다. 처마 서까래 끝에는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려있었다. 중간층은 백석난간으로 둘러쌓였는데 이곳에는 소식이 친필로 쓴 행서체 서곤"황주한식시(黄州寒食诗)"가 걸려있다. 이곳은 소식이 가장 즐겨 머물던 곳으로 "군중절승"이라 극찬했다고 한다. 루각의 3층 최상단에서 굽어보니 적벽의 붉은 단면은 세월의 세례를 거쳐 풍화된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있었고 앞을 내다보니 확 트인 전경이 답답했던 가슴을 뻥 뚫어주는 것 같았다. 이런 비경을 보노라니 문뜩 소식의 시구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인생은 꿈과 같은 것, 한 잔의 술을 강물 속의 달에게 부어 주네"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에서 소식이 산과 강, 풀, 바위, 달과 어우러져 초탈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비경의 조화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동파적벽에는 마음의 빈 공간을 충족히 채울 수 있는 "동파육"이 있었던 것이다.

[사진: 김동광 / 글: 권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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