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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머리가 제일 맛있다고 하시던 어머니
2016-05-20 10:39:29 cri
5월 8일 '어머니의 날'을 맞으면서 어쩐지 마음이 짠~ 해났습니다.

인젠 저도 육십고개를 넘어섰건만 아직도 어머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다시 한번 어머니의 인생을 되새겨 봅니다.

어머니는 조선 함경북도 운흥군의 가난한 시골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돈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마을의 아이들 몇몇을 모아 놓고 천자문을 가르쳤으며 조선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조선글을 잘 쓰고 읽었으며 천자문을 익히고 붓글씨도 제법 잘 썼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여자아이는 글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여자아이일수록 글을 더 알아야 한다면서 어머니에게 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시절의 여자치고는 어느 정도 학문을 닦았습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손수 물색한 아버지와 결혼했습니다. 일년 후, 첫 딸이 태어나 행복에 겨웠지만 그 후로는 자식 여섯이나 모두 가슴속에 묻어야 했습니다. 무서운 전염병인 홍역에 걸린 자식들을 살려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눈물 많은 조선 땅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길림성 화룡현 덕화향 경흥촌에 정착했습니다.

맏딸이 열살 될 때 아들을 보았는데 외할머니는 아기가 이번에도 또 잘못될까봐 태어나자마자 "부디 잘 보살펴 주시옵소서"하고 부엌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하는 '조왕신'에게 가운이 흥성하길 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빠의 애명은 '조왕쇠'였습니다. 정말로 '조왕신'의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그 아래로 제가 태어나고 또 이어서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모두 탈없이 무사히 자랐습니다.

1951년 태어난지 몇 달밖에 안되는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전선에 보내고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고생스럽다는 말 한마디 입밖에 내지 않았고 조직에 손 한번 내밀지 않았습니다. 와중에 전선에서 날아온 편지를 받으면 비보일까 두려운 나머지 손이 떨려서 편지봉투도 제대로 뜯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 열 둘을 낳았지만 늘 '절반 농사' 밖에 못했다고 말합니다. 언니와 오빠가 병으로 40년 전에 돌아가다보니 자매 넷 밖에 남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자식을 앞세운 슬픔을 마음속 깊이 묻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타격 때문에 어머니는 몸이 아주 허약했으며 가사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내가 여덟살부터 자기절로 밥을 해먹으면서 학교를 다닌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출산했을 때였습니다. 그때가 음력 12월이었는데 칼바람이 기세를 부려 몹시 추웠습니다. 나는 어린나이에 샘물터에 나가 물동이에 물을 길었는데, 반 정도 차나마나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다가 큰 바람에 밀려 그만 미끄러 넘어졌습니다.

동이는 박산나고 옷은 물벼락을 맞아 금세 꽛꽛하게 얼어 붙었습니다. 손도 시리고 발도 시렸지만, 물동이를 깨버려서 야단맞을까봐 문 뒤에 몸을 숨긴 채 집에 들어갈 엄두를 못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어머니가 가슴이 아파서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머니는 소설을 즐겨 읽으셨고 이야기를 곧잘 하셨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 무릎을 베고 '심청전', '춘향전' 등 고전 이야기를 듣던 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엄마가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의 내용에 슬퍼하시면 등잔밑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듣던 우리도 함께 슬펐습니다. 어머니가 무서운 도깨비의 옛말을 하면 무서워서 이불을 꼭 머리까지 뒤집어썼던 그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그때를 회억할 때마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향기와 말씀이 다시 피부로 닿이는 듯 느껴집니다.

정말로 자식을 기르면서 자신은 챙길 줄 모르는 게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듯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편식이 심한 나는 육류는 아예 입에 대지 않았고 생선은 또 명태와 칼치만 골라 먹었습니다. 넉넉치 못한 생활에 혹간 생선을 사오면 어머니는 먼저 나에게 고기붙이가 많은 맨 중간을 토막내서 주었고 그 옆의 토막을 아버지와 동생의 앞에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의 앞에는 언제나 머리와 꽁지만 놓여졌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이렇게 이유를 달았습니다. "생선 머리는 기름이 많아서 고소하거든. 그리고 꽁지는 바삭바삭해서 얼마나 맛있는데..." 어린 나는 우둔하게도 정말 그런가보다 생각했지요.

어머니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된 건 결혼 후였습니다. 시집에서 처음으로 장을 보고 생선 요리를 하는 날, 식구들을 챙기고나니 남은 건 생선 머리와 꼬리뿐이였습니다. 그때 그것을 입에 넣으면서 불현듯 생선머리와 꽁지가 맛있어서 당신 혼자 자신다고 하던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막 쏟아지는 눈물을 식구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얼른 뒷방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시어머님이 영문을 몰라서 방으로 뒷따라 들어왔습니다. 인제야 엄마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되어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고 하니 시어머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세상 어머니들의 하나 같은 마음일세."

그날 나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철없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인제 우리 딸내미 다 컸네."

"늙어봐야 인생의 도리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가 되니 비로소 엄마 사랑의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부모로부터 터득한 그 사랑을 자식들에게 몰붓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장춘시 애청자클럽 관성구소조 최춘월 올림

2016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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