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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일보]에 편지를 띄우다'
2017-03-22 18:48:35 cri
김금철, 한창송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아름다운 추억-'[인민일보]에 편지를 띄우다'를 제목으로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함께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1953년 6월에 설립된 장춘시조선족문화관 (현재 장춘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전신)은 장춘시 조선족 집거지인 7거리 (七马路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장춘시 조선족 군중들의 활동 중심이였다.

당시 문화관에서는 장춘시 여러 단위들에 조선족 '연락원' 을 선정해놓고 전 시 조선족활동을 조직할 때면 각 단위의 연락원을 통하여 조직하군하였다. 그때 나는 장춘객차공장 종업원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장춘객차공장의 연락원 책임을 졌었다. 나는 또 문화관 여러가지 활동의 열성자로서 문화관을 자기집처럼 드나들면서 책도 읽고 덕담도 나누고 희포도 풀면서 무도장에도 자주 다녔다. 그때 우리 장춘시 조선족들의 문화생활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우리 조선족들이 상상치도 못하던 일이 발생했다. 문화관이 하루밤 사이에 장춘시 문화계통 '5.7' 전사들의 가족 숙사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였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된후인 1978년 여름, 나는 원래의 문화관에 한번 가보았다. 아래 윗층 복도에는 부뚜막에 불을 피워놓고 밥을 짓는다 채를 볶는다 하며 주민들로 북적이어서 어디 발을 들여놓을 자리조차 없었다. 어처구니 없고 한심했다. 우리 장춘시조선족들이 그렇게도 아끼고 정이 들었던 유일한 활동장소가 무자비하게 빼앗겨 이토록 짓밟히다니!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가슴이 아파 부들부들 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며칠 동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지 않았고 밤잠도 이루지 못했다. 곰곰히 궁리한 끝에 이런 문제는 그래도 당조직을 찾아서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우리 나라 당보인 '인민일보'에 내가 본 상황을 반영하고 문화관을 다시 돌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정작 편지를 써놓고 보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화대혁명'은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인성을 잃고 미치게 만들었다. 그때 나의 몇몇 친구들은 이런 위험한 일을 사서 할게 뭐냐고 하면서 편지를 부치지 말라고 권고했다. 특히 집사람이 죽어도 못 부치게 하며 단호히 반대해 나섰다. 그는 나에게 '당신은 지금 세월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해요?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잡아가는 세월인데 자기 밥 먹고 그런 머저리 노릇을 할게 뭐예요. 당신은 우리 삼춘 어머니 김창실이의 처지를 못 봤어요?그는 노력모범이 되여 베이징 가서 모주석까지 만나고 왔는데도 공연히 '조선간첩'으로 몰려 몇 달 동안이나 갇혀 죽을 고생을 하고 나온 일도 다 잊었어요?" 하면서 막무가내로 결사 반대하였다.

나는 1937년 11월16일 조선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여났다. 아마도 조상으로부터 평안도" 돼지바우"같은 성격을 물려 받아서인지 한번 결심한 일이라면 꼭 끝장을 보고야 마는 고집통이였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에라 모르겠다. 만약 잘못 되는 날이면 기껏해야 몇달 갇히 워 고생하면 되겠지 설마 죽기까지야 하겠나?" 이렇게 생각한 끝에 우리 당을 다시 한번 굳게 믿으면서 끝내 집사람 몰래 편지를 부쳤다.편지를 부쳐놓고 며칠 동안 마음이 안절부절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며칠후인 1981년 3월 17일 '인민일보' "독자래신" 란에 나의 편지 '우리 문화관을 돌려주세요' 가 실렸다.

이날은 나에게 평생 잊을수 없는 날로 되었다. 나는 신문을 읽으면서 너무나 감동되고 너무나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려 신문을 적셨다. 그때에야 비로서 우리 집사람도 나 못지 않게 기뻐하면서 저녁식사때는 심지어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나의 '승리'를 축복해 주기까지 했다.

당시 이는 광범위한 독자들 특히 장춘시 독자들속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관계부문의 중시를 받았다. 며칠후인 어느날 밤 문화관 오기철 부관장이 우리 학교로 나를 찾아와서 "김선생님, 우리 내일 베이징에 가겠는데, '인민일보'를 좀 빌려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때 당시는 복사기술이 없어 복사도 못하고 신문을 직접 주자니 아쉽기는 하였으나 빌려주는 수 밖에 없었다.

문화관의 림길산 관장과 오기철 부관장은 나의 글이 실린 '인민일보'를 들고 장춘시와 길림성, 중앙 민족사무위원회까지 찾아가 문화관 신축을 호소했다. 여러모로 되는 노력끝에 지난1986년에 조선족군중들이 학수고대하던1905평방미터의 4층 건물인 새 문화관청사가 일떠서게 되였다.

그후부터 문화관에서는 매번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를 초청하여 편지를 쓴 동기와 소감을 발표하게 하였고 나는 발언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2003년 장춘시조선족문화관 설립 50주년 경축대회에서도 나는 표창을 받았을 뿐만아니라 문화관에서 편집한 '문화관 50년, 눈부신 발자취' (1953ㅡ2003)기념책에도"문화관 신축사업에 기여한 공헌자 "25명중 다섯번째로"장춘객차공장 종업원학교 교원 김석찬"이란 이름이 올랐다.

시간은 유수와 같아 어언간 36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어제일처럼 눈앞에 낱낱이 떠오른다.

나는 그때 일을 통하여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에는 꼭 당을 찾아야 하고 영원히 당을 믿어야 한다는 진리를 마음속으로부터 절실히 깨닫게 되였다.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로원구분회 김석찬 올림

2017년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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