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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과학가 황대년의 의연·필연·여전
2017-07-13 15:00:54 cri


(음향1, 노래 '사랑해요 중국')

귀전에 들려오는 '사랑해요, 중국' 이 노래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전략과학가 황대년(黃大年)이 생전에 가장 즐겨듣던 노래입니다. 국제항공지구물리영역의 최고과학가로서 그는 조국의 요구에 따라 외국의 높은 생활조건을 포기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는 귀국 후 길림대학에서 400여명의 과학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가지 '중국의 최고'를 창조하면서 중국의 '우주·육지·해상' 탐구를 위해 여러 가지 기술공백을 메웠습니다. 2017년 1월 8일, 피로가 쌓여 병이 된 황대년은 58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동료, 학생, 비서, 운전기사 등은 물론 중국의 최고 지도자와 수많은 독자, 청취자, 네티즌들도 그의 사적을 접한 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치하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생명으로 '사랑해요 중국'을 실천한 황대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황대년은 중국 동북의 유명 학부인 장춘지질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에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ARkex지구물리회사 연구개발부 주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국의 풍족한 생활조건을 포기하고 의연히 귀국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대년의 학생 주문월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음향2]

"전에 선생님에게 의연히 귀국한 원인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유학해 학문을 닦을 수 있었던 건 우연이고 고향에 돌아와 조국을 위해 생명을 불태울 수 있는 건 필연이지 내가 말한 의연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황대년과 30여년간 정을 쌓아온 한효봉(韓曉峰) 길림대학 원 부총장은 황대년의 선택에 이해가 간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음향3]

"그는 '유학 갈 때부터 귀국할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도 '유학은 꼭 가야 하고 유학한 후 꼭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이러한 깊은 마음은 고향과 국가에 대한 깊은 정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2009년에 귀국한 황대년은 귀국하자 마자 강도 높은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길림대학 '지질궁' 5층에 있는 황대년의 사무실 기록부에는 1년간의 업무배치가 깨알같이 적혀 있습니다. 장춘, 베이징, 남녕, 성도, 런던... 등 수많은 지명들은 황대년의 바쁜 하루하루를 기록해주었고 사무실의 등불은 새벽 2,3시가 되도록 꺼질 줄 몰랐습니다.

그의 비서 왕욱함(王郁涵)씨는 어느 날 사무실 등불이 꺼져있다면 그것은 황 교수가 출장갔기 때문이라며 그는 한해의 1/3시간은 출장을 다니며 공항가는 길에서도 전화로 업무지시를 할 정도로 시간과 다투며 일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밤낮으로 고생하며 일하는 황대년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과학연구 미치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별명에 대해 귀국 후 황대년의 첫 박사 과정 학생인 마국경(馬國慶)씨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음향4]

"저도 한때는 과학연구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그가 과학연구에 몰두하는 원인은 자신을 빛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거시적 과학연구 발전 방향을 파악해 국가의 발전을 추동하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외국에서 배워 온 최신 지식으로 황대년은 국가가 시급히 필요로 하는 '고정밀 항공 중력 측량기술'을 공략했습니다. 특히 '항공 중력 제도의', 일명 '투시안(透視眼)'이라고 불리는 설비인데, 가스와 광산자원의 탐사와 잠수정 정찰에 사용됩니다. 황대년의 과학연구 조수인 우평(于平) 길림대학 지구탐측과학기술학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음향6]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을 위해서는 물론 국방안전을 위해서도 이 기술은 중국이 시급히 필요로 하는 기술입니다. 현재 이 기술을 장악한 국가는 매우 적습니다. '12.5'계획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이 기술은 공백이였습니다. 황교수가 귀국한 후 국가의 여러 부처와 수백명의 과학연구 인원을 거느리고 이 프로젝트의 연구에 참여했는데, 5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기기 활용의 데이터 취득 능력과 정밀도 분야에서 세계와의 격차를 20년 줄였습니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이미 국제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장춘지질학원을 졸업할 때 황대년은 '중화의 진흥은 우리들의 책임이다'란 글을 남겼습니다.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에 보답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그는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음에도 불구하고 분초를 다투며 과학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운전기사였던 류국추(劉國秋)씨는 황대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음향7]

"한번은 그의 집앞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졸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제가 다가가 안자 그는 인츰 눈을 뜨면서 아마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출장 가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봐야 된다'고 하자 황교수는 '절대 안된다'면서 '내일 베이징에서 중요한 회의가 2개나 잡혀있어서 꼭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시간을 생명보다 더 아끼는' 황대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과학연구의 긴박감이 황대년으로 하여금 시간과의 싸움을 하게 했고, 과도한 피로로 그는 여러 차례 위경련과 졸도를 겪었다고 말합니다. '강제로 진행한' 신체검사에서 황대년은 담관암으로 진단을 받았고 병상에서도 그는 과학연구만을 생각했습니다. 수술을 하루 앞둔 날 오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사무실로 병문안을 가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직도 못다한 일이 많아 수술 전에 잘 정리를 해둬야 퇴원한 후 쉽게 지속할 수 있다'면서 저녁 늦게야 병원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황대년은 그 자신과 동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퇴원한 후 다시 사무실에 갈 수 없었습니다. 2017년 1월 8일, 그는 58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못다한 사업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와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은 그가 주도해온 '지구심층탐측기' 이론을 응용에로 추동하고 있습니다.

번역/편집: 한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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