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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천년을 잇는 그 사람들] (3)-
바다 건너 그곳의 '수광'을 찾아온 '도래인'
2017-09-30 17:15:41 cri

"수광(壽光)이라고 하면 눈앞에 대뜸 떠오르는 게 무엇이죠?"

시내에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첫 이야기이다. 목숨 수(壽)와 빛의 광(光) 조합, 칠색의 무지개는 나름대로 많은 그림을 만든다.

수광의 이 이야기는 천년의 세월을 엮고 있었다. 기원전의 동주(東周, B.D.770~B.D.256) 시기에 벌써 생긴 지명이라고 전한다. 제(齊)나라 때 여구(閭邱)라고 불리는 웬 촌로가 이야기에 등장하고 있다. 그는 국왕을 만나자 태양의 빛 같은 은혜를 갈구했다고 한다. 품성이 단정한 관리를 임용하여 좋은 법령을 제정하면 순박한 민풍을 만들어 사람들이 모두 장수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 수광이라는 지명은 바로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미구에 수광현이 유방(濰坊) 나아가 산동성(山東省)의 밖까지 이름을 날린 것은 결코 이 촌로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이 기술이 최고로 꼽혀요. 제일 큰 시장도 생겼습니다."

이재범은 그가 수광을 선택한 리유를 이렇게 밝힌다.

이재범은 바다 건너 대륙에 공장을 세운 한국인이다. 일명 '도래인(渡來人)'이다. 그가 특별히 수광에 눈길을 돌린 것은 지명 보다 '채소'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광의 채소재배기술은 중국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마침 이재범이 유방을 찾던 그 무렵인 2000년부터 '채소박람회' 즉 중국채소기술박람회가 해마다 수광에서 열리고 있었다.

기실 이재범이 대륙에 첫 발자국은 디딘 곳은 아직 수광과 약 200리나 떨어진 연해의 청도(靑島)였다. 중한 수교가 이뤄지기 전의 1991년경이었다.

"제가 청도에 도착한 그날이 4월 10일이었습니다. 그해 결혼을 하고 첫 자식을 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때 이재범은 지인이 청도에 공장을 만들면서 청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은 청도 어디나 한글 간판이 보이고 있지만, 이재범이 발을 들여놓던 그때는 온 청도에 한국회사가 3개뿐이었다고 한다.

와중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1992년 9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 국빈방문 일정에 청도의 한국공장 방문을 넣었다. 그래서 미리 전에 안전요원들이 청도의 한국공장에 주재했다고 한다.

"요원들은 우리 공장의 하수도 시설까지 낱낱이 검사를 하는 겁니다."

이재범은 그때 그 일을 어제처럼 눈앞에 선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안전문제로 대통령의 방문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그때 대통령의 전세기가 청도에 내리지 않았고, 직항기도 오랜 훗날까지 청도에 열리지 않았다. 이재범은 비행기 직항이 열린 그해가 1994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청도에 오려면 김포에서 상해, 다시 청도로 환승을 해야 했다. 번거롭고 시간이 걸렸다. 말이 비행기편이지 어떤 경우에는 1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인천에서 위해까지 페리로 십여 시간 걸렸는데요. 오히려 비행기보다 배가 더 편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이 '도래인'은 이름 그대로 하늘이 아니라 바다를 배로 건너고 있는 셈이었다.

청도를 비롯하여 산동 지역은 실은 옛날부터 조선반도의 선민들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었다. 산동지역은 조선반도에서 중국 대륙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의 주요한 선착지였다. 연해에서 시작된 육상 '실크로드'에는 다시 조선반도 선민들의 족적이 찍혔다. 일찍 당(唐)나라 때 하남도(河南道)를 망라한 등주(登州), 내주(箂州), 밀주(密州), 청주(靑州) 등과 하북도(河北道)의 체주(棣州), 덕주(德州), 박주(博州) 등 여러 곳에 신라의 교민들이 살고 있었다고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기록한다. 이 책은 일본의 고승 원인(園仁, 793~864)이 대륙에 구법을 다녀가면서 적은 여행기이다.

2000년, 이재범이 위방에 공장을 세울 때 벌써 3,4개의 한국기업이 현지에 나타나고 있었다. 연해에 상륙한 한국의 '도래인'들은 뒤미처 연해에서 내륙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범이 나중에 수광현에서 선택한 업종은 농업용 하우스 비닐박막이었다. 중국에서 약 10년간 고무제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비닐박막 제품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수광은 중국에서 최고급의 농업용 하우스비닐에서 품질이 제일 좋은 제품을 사용합니다. '범을 잡으려면 법의 굴에 들어가야 하지요.' 청도나 연태, 위해와 같은 곳이 아닌 수광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규모 투자와 생산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결국 사용자의 충분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재범은 먼저 주변 농민들에게 그의 산동자강(自康)비닐박막유한회사의 농업용 비닐박막을 널리 돌려 시범 사용하도록 하였다. 2년 동안 시장수요를 파악한 뒤 투자 규모를 크게 늘려 공장을 건설하고 본격적으로 비닐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자강회사는 중국 전국의 농촌에 널리 브랜드를 알린 회사가 되었다. 전국 어느 지역에서든지 '산동자강'하면 비싼 비닐박막을 만드는 회사, 그렇지만 좋은 비닐박막을 만드는 회사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 이재범의 자신만만한 이야기이다.

"EVA필림(비닐박막) 업체 중에서는 전국적으로 산동자강이라고 하면 70%-80%의 농민은 저희 회사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영원토록 장수하는 천국의 기업은 없다. 2008년 북경올림픽을 시점으로 중국에서 산업구조 조정이 실시되고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많은 기업이 도태의 국면에 직면했다. 중한 수교 초기 완구와 봉제,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상대적으로 집중했던 한국기업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때는 한국 기업들이 거의 다 직원을 몇 천 명씩 썼지요. 인건비가 많이 상승하면서 그런 기업들은 베트남 같은 인건비가 낮은 나라로 이전했습니다."

연태한인상공회의 회장 김종환도 이재범의 견해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재범처럼 중한 수교 이전부터 중국에 있으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발전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고 있었다. 그와 같은 '도래인'들은 무엇보다 변화하는 시대와 더불어 재빨리 적응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

"기업의 흐름이 그러다 보니까 우리 교민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맞춰서 2008년까지 계속 증가했으나… 그 이후로 점차 줄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줄지도 않고 유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종환은 현재 연태에 노동집약적인 산업보다는 대기업이나 고부가가치를 살릴수 있거나 기술경쟁력을 보유한 기업들이 많다고 밝힌다. 앞으로도 고부가가치를 창출할수 있는 기업들이 연태로 많이 들어 올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

실제 수광이 소속한 유방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유방은 1948년, 유현(濰縣)을 중심으로 남쪽의 탄광도시 방자(坊子)를 합친 지역의 이름. 이 신도시의 이름에 걸맞게 한국 보원케미컬도 새로운 산업 즉 신규에너지재료로 진출하고 있었다.

보원케미컬의 과장 김경동은 회사의 지속적인 발전 계획을 펼치고 있었다. "현재 협력업체의 공장건물을 잠시 임대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부근에 공장건물을 매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방 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83개로 가구와 완구 등 여러 업종을 망라하고 있다. 김경동은 개발구에서 시내에 나가면 늘 귀에 익은 한국말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 그들뿐만 아니다. 유방의 외자기업은 한국은 물론 기타 나라와 지역의 904개가 2016년말 현재 상무국에 등록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수광' 이야기를 엮는 사람들은 더는 옛 마을의 옛 사람뿐만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대열에는 또 바다를 건넌 그 '도래인'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조설매, 권향화, 김호림]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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