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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국가당안국,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기록 선집' 제6집 공개
2015-08-24 17:38:08 cri
중국 국가기록보관소는 20일 자체 공식 사이트를 통해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기록 선집' 제6집 중국 사법기관이 심문 취조한 중국 침략 일본 전범의 형성을 기록한 문서를 발표했다.

그 제6집의 자료에는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 사법당국이 일본 전범을 조사 처리하면서 형성한 수백명에 달하는 일본 전범의 서면 자백서, 자백서와 조사취조의견서 등 조사 취조 문서가 포함돼 있다. 그 자료에는 일본군이 점령지에 '위안소'를 세우고 중국, 조선 그리고 현재의 인도네시아 여성을 '위안부'로 강요해 위안소에서 여성을 학대한 내용이 기록됐다.

자료에는 9부의 서면 자백서가 포함돼 있고 출처는 각기 중앙 기록보관소이다.

일본 전범 이나세끼는 1954년 11월 17일 서면 자백서를 통해 일본군 독림혼성 제3여단 통신대장을 맡은 적 있다고 말했다.

1943년 3월 5일, 산서성(山西省) 번치현(繁峙县)의 한 마을을 공격할 당시 "5명 부하를 지휘해 이 마을 동북오지에서 피난해 있던 부녀 10명을 체포해 중대본부에 넘겼다. …이 마을을 떠날 때 중대장은 중대 위안소를 설립하기 위해 체포한 부녀 중 17세부터 20세 사이의 여자 20명을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이 부녀들이 대오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전원을 밧줄로 2줄로 묶었다. …너무 늦게 걷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묶은 밧줄을 말에 매놓고 말을 뛰게 했다. 결과 모두 끌려서 넘어졌고 적지 않은 사람은 부상당했다."

일본 전범 오노 타케지는 1954년 7월~8월에 서면 자백서를 통해 일본군 가목사(佳木斯) 헌병대 부금(富錦) 분대 경무주임을 맡은 적 있다고 말했다.

1940년 4월~1942년 1월, 1943년 2월~12월, 1945년 1~7월 그는 부금현(富锦县) 등 지역에서 "중국침략 일본 위안소를 감독하고 감시하는 일을 했다. 30여 명 조선 여성(20세부터 30세 사이)을 노예로 간주하고 그들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강간하도록 협조했다. 매 주 그들의 음부를 검사하고 조사 결과를 침략군(일본군)에게 통지했다. 조선 여성들이 성병으로 인해 커다란 고통을 받게 했다."

전범 아즈마 이치헤이는 1954년 6월 26일 서면 자백서에서 일본군 동녕 헌병대장을 맡은 적 있다고 자백했다.

1941년 8월 무단장성 동녕현(东宁县)에서 "관동군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군위안소'를 설치했다", "중국인 민가를 '위안소'로 사용했고 조선인 김씨가 데리고 온 조선인 여성 30명을 강제로 영업하게 했다. 이곳을 점령한 일본부대 군인, 군무원 4000명의 강간, 구타, 폭행대상이 되게 했다."

일본 전범 다케우치유타가는 1954년 11월 서면 자백서를 통해 일본군 육군병원 중위군의를 맡은 적 있다고 토로했다.

1936년 12월, 헤이룽장성 탕원(汤原)에서 그의 제의에 따라 경비 사령부는 "현의 공관서에 시켜 중국 젊은 여성 30명을 강제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면서 "창부로 일분군 전용 위안소에 안치했다". "경비 사령부는 무장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중국인 민가 30채를 강제로 점하고 일본군 전문 기생관으로 사용했다."

1938년 1월, 흑룡강성 호림시(虎林市)에서 그의 제의에 따라 경비 사령부는 "현 공관서에 젊은 중국 여성 25명을 강제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면서 "일본군 전용 기생방으로 했다", "무장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위협함으로써 중국인 민가 25채를 강점해 일본군 전문 기생관으로 사용했다."

일본 전범 무라야마 하야토는 1954년 12월 31일 서면 자백서에 일본군 독립보병 14여단 소대장, 중대장 겸 산서성 능천현 (陵川县)경비대장을 맡은바 있다고 말했다.

1944년 9월, 능천현(陵川县) 시내에서 부대는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하고 기존의 위안소에서 7채 민가 주인을 더 내쫓고 확장 개조했다."

1944년 10월 24일, "능천현(陵川县) 시내안의 일본군 위안소에 중국 여성 7명을 더 모집해 일본병의 위안부로 삼는 것을 허락했다" 위안소 개장일에 "한 15세 소녀의 거절을 마다하고 방에 끌고 들어가 강간했으며 그 뒤에도 두번 강간했다."

일본군 보병연대 부, 대대장을 맡은 적 있는 일본전범 다카지와 겐지는 1954년 7월 10일 서면 자백서에서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1939년 7,8월 간 호북성(湖北省) 숭양(崇阳) 남쪽 한 마을에서 "조선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 경비대 점령지 2곳을 위안소로 사용했다. "

1939년 가을 대략 한달 간, 충양 남쪽 작은 마을에서 "조선 부녀를 강간했고 그 곳을 위안소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며 내 아래의 다수 사람들이 모두 강간했다."

1939년~1940년 3월, 호북성 포기(蒲圻) 부근에서 "조선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 경비대는 점령지에 위안소를 안치하는 명목으로 민가를 내놓도록 자치회에 요구했다. 나와 부하들이 이들 여성을 모두 강간했다."

전범 후루가와 유이치는 1954년 7월 20일 서면 자백서에서 1939년 5월부터 1940년 5월까지 광동성 남해현 위 현정부 행정고문을 맡은적 있다고 자백했다.

1938년 12월, 일본 헌병대를 시켜 "포기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생활이 빈곤한 중국 여성 50여 명을 '일본군 병사 위안소'에 감금해 집단 성폭행하도록 했다. 포기시에 거주한 뒤에도 이 피해자들을 계속 볼 수 있었다"

전범 도베 마사오는 1954년 8월 11일 서면 자백서에서 1942년 5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본군 제59사단 경리부 군수하사관을 역임했다고 자백했다.

태안(泰安)의 스타클럽에 "16세부터 25세 가량의 중국인 여성 50 여명을 유인해 감금했다. 이곳은 지난 최고사령부의 고급 부관이 경영하고 관리했다. 제국주의 군대에서 공개적으로 강간하도록 설치한 것이며 감금당한 여성들은 물적으로, 심신적으로 모두 인간으로는 최고 고통을 받았다."

제남(济南) 군인회관은 "지난 최고사령부 고급부관이 관장을 맡았다. …16세부터 22세 의 중국인 여성을 15명 수용했다", "1944년 4월부터 1945년 4월까지 군수 조장을 맡았고 … 그때 당시 특히 군인회관 회계를 매달 검사하고 지출과 소득 결산서를 점검했다. 경영에 대해 의견을 내놓은 적 있고 중국인 여성을 학대하거나 감금하는 일에 참여했다."

전범 히로세 사부로는 1954년 8월 14일 서면 자백서에서 일본군 제59사단 고급부관을 맡은 적 있다고 했다.

1944년 4월, "지난 후방시설인 군인회관, 스타클럽, 판점 '사쿠라'해행사에서 반찬부 및 군대 술집의 감독 업무를 맡았다. 스타클럽은 일본군관병이 전용하는 중국인 기생관이고 지난 중국기생관 조합장에게 위탁해 경영을 책임지게 했다" "일본군관병이 작은 돈으로 유흥할 수 있게 하기 위해 30여 명 기생더러 매일 매 인당 병사 20명씩 접대하도록 했으며 많을 경우는 30명 병사를 접대하게 했다. 그녀들은 17세부터 20세의 젊은 여성들이고 침략자(일본군)의 성욕 대상으로 강요당했으며 과로때문에 병에 걸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44년 6월 쯤, "제12군의 요구에 따라 기생을 전선에 보냈다"면서 "30여명 조선 기생을 제일 위험한 제1선인 정주(郑州)로 파견했다."

번역:박해연 검열: 이인선  [CCTV.com한국어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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