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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 파금: 나의 창작은 재능보다 정감 때문에 가능했다
2015-10-19 17:16:58 cri

그는 아무런 후회없이 한편 또 한편의 전세의 걸작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다. 그는 글자마다 줄마다 '진실'과 '선의'를 보여주었다. 그는 진리를 사랑했고 충실하게 생활했다. 창작을 즐겼던 그는 자신이 '창작할 수 있는 것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감이 있기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유명한 극작가 조우(曹禺) 선생은 일찍 '파금은 문학의 거장으로서 횃불을 높이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비춰주고 있다"고 하면서 파금은 "빛이고 열이고21세기 양심'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2015년 10월17일은 파금 선생이 타계한 10주기가 되는 날로서 선생의 업적을 기림은 물론 그의 문학작품과 사상, 애증과 인생경지, 청춘과 이상을 깊이 터득해보려고 한다.

[책에 관하여]

책과 관련해 파금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내가 문학창작을 할 수 있는 것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품을 통해 조국과 동포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한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실패와 성공을 운운할 것도 없이 다만 성실하게 평범한 일생을 살아왔을 뿐이다.'

창작의 길: 마음을 독자들에게 바치다

작가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자신의 마음을 독자들에게 바쳐야 한다. 파금이 바로 독자들과 마음을 나누는 작가이다. 파금은 일찍'매 한권의 책과 한편의 작품이 모두 답안지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있었다. 생활환경이나 사상신앙이 다르고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견해가 다를수 있지만 진정성 있는 작가들은 모두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바쳤다'라고 말했다.

1904년 11월, 파금(원명 이요당李堯棠)은 성도 북문의 한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때 그의 집안에는 20여명에 달하는 웃 어른과 30여명에 달하는 형제자매가 있었고 3-40여명의 하인을 두고 있었다. 1927년 1월, 23세의 파금은 멀리 프랑스 유학을 떠났으며 유학생활 과정에 여러 가지 사상이 그의 젊은 마음을 충격했다. 이국 타향에 있으면서 파금은 조국과 친인들이 몹시 그리웠으나 그리움을 토로할 곳이 없었다. 하여 글로 자신의 사랑과 미움, 슬픔과 기쁨, 고통과 동정, 희망과 몸부림을 토로했다. 1929년에 그는 처녀작 '멸망'을 펴냈다. 책은 북양군벌 통치하의 상해를 배경으로 일부 5.4 신사조의 영향으로 힘을 얻고 사회해방의 길을 찾으려는 지식인 젊은이들의 고민과 항쟁을 서술했다.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이로부터 그는 문학창작의 길에 입문하게 되었다.

20세기 30년대 상해로 돌아온 파금은 '애정삼부곡'- '무霧', '우雨', '전電'을 발표했다. 파금 본인도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랑 소설이 아니라고 인정했지만 그는 여전히 연애를 소설의 주제로 정했다. 그것은 그가 연애를 통해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파금은 또'격류삼부곡'-'가家', '춘春', '추秋'를 완성하했다. 그는 대가족의 몰락과 분열로부터 봉건종법 제도가 붕괴되고 혁명조류가 젊은 세대들속에서 일고 있으며 청년 지식인들이 각성하고 있음을 찬미했다. 지금도 이런 작품들은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책으로 시작된 사랑: "가(家)"가 집을 이루어주다

파금 선생의 일생에서 단 한번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유일한 상대는 그와 반평생을 함께 한 아내 소산(萧珊)이다.

1936년, 32살의 파금은 소설 '가家'로 많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문학창작과 번역에서 모두 명성을 떨첬다. 당시 파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자신의 하는 일에 모든 정력을 쏟았던 파금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애국학생 중에는'10여세의 여학생'이라고 발신인의 이름을 밝히는 편지가 가장 많았다. 두 사람은 반년 가까이 통신거래를 했지만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다. 나중에 여학생이 먼저 편지에서 '편지로도 이같이 잘 어울리는데 왜 만나서 얘기할 수 없을까요?'라고 적어 보냈다.

그날 오후, 파금은 호기심을 안고 약정한 장소에 도착했고 조금 뒤에 단정한 학생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두 눈이 반짝이는 여학생이 나타났다. 여 학생은 한 눈에 파금을 알아보고 쾌활하게 웃었다. 마치 익숙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옆쪽으로부터 걸어오면서 여학생은'일찍 오셨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순간 파금은 전률을 느꼈다. 그 여학생이 바로 소산(萧珊), 그 해 그녀는 18살이었다. 그 후로부터 두 사람은 8년간의 긴 연애를 시작했다.

1944년 5월1일에 파금과 소산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책을 목숨처럼 아껴온 파금: 돈은 책을 사기 위한 지불수단이다

당시 파금이 열독을 즐기는 것은 문화권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서재를 드나들기 시작함녀서 그는 문자를 남달리 좋아해 꾸준한 독서습관을 양성했다. 집에 소장한 낡은 책을 일고나면 파금은 형이나 동생이 새 책을 사면 빼앗아 읽군 했다.

1949년 상해가 해방될 무렵 파금의 일가는 가세가 기울어졌으나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계속 책을 사서 읽었다.

어느 하루, 항상 남편의 뜻에 따르던 아내 소산은 참다못해 '지금 집에는 일전한푼 없다'고 말했다. 집에 돈이 있는지, 매일 생활은 어떻게 영위 되는지를 전혀 모르는 파금은 '돈은 책을 사기 위한것'라며 '책을 쓰는 사람이 책을 사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답했다. 그 이튿날에도 파금은 여전히 아이들을 데리고 서점을 찾았다.

파금은 책을 즐겨 읽을 뿐만아니라 책을 소장하기도 좋아했다. 그의 서재 네면은 모두 책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응접실 역시 벽을 따라 4개의 책장이 놓여있으며 지어 복도나 통로마저도 책장으로 채워졌다. 그의 친구들도 모두 책을 좋아하는데 늘 교환해서 읽군 했다. 그가 사는 책은 종류가 많은데 특히 유명인들의 사진이 들어있는 양장본이 많았다. 책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보귀한 재부였다. 만년에 와서 그는 여러번에 걸쳐 베이징 도서관이나 모교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도서를 기증했다.

[정에 관하여]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나와 이 사회를 연결시키는것 역시 사랑이다. 이는 나의 모든 성격의 근본이다."

깊은 사랑, 그녀는 내 생명의 일부분이다.

파금은 감정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와 아내 소산의 사랑은 낭만적이면서도 감동적이다. 그들은 28년을 함께 해오면서 말다툼 한번 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어려운 세월에도 서로 격려하고 돌보면서 생활해 왔다. 1972년에 아내 소산은 직장암 진단을 받았는데 당시 파금의 슬픔은 극치에 달했다. 그는 자신이 아내의 고통을 대신해 주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러왔다고 회억했다. 매일 텅 비고 조용한 집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그는'모든 어려움이 다 나의 머리위에 떨어지라, 모든 재난이 덮쳐라, 내가 이겨 나가겠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고 했다.

아내의 생명은 초 읽기에 들어갔고 그녀는 매우 담담했고 줄곧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아름다웠고 맑았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파금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소산을 그리며'라는 글에는 "나는 마치도 곧 스러져가는 초불을 보고 또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두 눈이 영원히 맑아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나는 그녀가 내 곁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심지어 나의 14권의 '사서' (邪书)를 갈기갈기 찢어서라도 그가 조용히 살아있기를 갈망한다."라고 적혀있었다.

파금의 애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무정한 죽음의 신은 아름다운 소산을 앗아갔다. 아내 소산의 시신을 화장한 후 파금은 그녀의 유골함을 줄곧 자신의 침실에 보관했다. 그는 "아내 소산은 자신의 생명의 일부이며 그의 유골에는 자신의 눈물과 피가 들어있다"고 했다. 파금은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최후이지 절대 결말은 아니며 그의 결말은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가족의 아픔: 그들이 모두 세인에게 기억되기를

파금은 일찍 큰 형은 자신을 가장 깊이 사랑한 사람이며 셋째 형은 자신을 가장 많이 돌봐 준 사람이라고 수차례 얘기했었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두 형의 이미지를 이렇게 묘사했다."큰 형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뜻이 있고 이상이 있으며 가장 일찍 '5.4' 신문화운동의 사상을 집에 전파했다. 그는 몰락한 대 가정의 생활의 중임을 짊어졌으며 가장 사랑하는 두 동생을 공부시켰고 집안이 가장 어려운 시기 넷째 동생을 프랑스에 유학도 보냈으나 가문이 파산하면서 최종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셋째 형은 재주가 있고 친화력이 있으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뜻 있는 청년이다. 큰 형이 돌아간 후 자진해 11명되는 집안 살림을 맡아했고 최종 가난과 질병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형이 돌아 가면서 파금은 심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도 파금 선생은 과거를 돌이킬 때마다 슬픔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큰 조카에게 "내가 가장 마음 아픈 것은 나를 아꼈던 두 형이 모두 돈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 형들을 생각하면 나는 좋은 생활을 하기 싶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몇번이나 통곡했다.

파금은 자신을 도왔던 두 형에게 보답할 기회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세인에 기억될 때 두 형도 함께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우정의 빛으로 나의 영혼 물들여

파금은 늘 자신은 "우정으로 살아간다"며 그 숭고한 우정을 암흑을 몰아내고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등댓불이라고 했다. 파금과 유명작가 심종문(沈从文), 조우(曹禺). 빙심(冰心)의 깊은 우정은 지금까지도 문인들의 모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파금과 심종문의 우정은 1932년부터 시작 되었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작품 창작에서 명성을 떨쳤고 두 사람의 창작이미지는 각기 다르지만 서로가 깊이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진정성과 이해, 관용이 있었다. 파금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 심종문, 장요와(张兆和) 부부는 자신들에게 연루될 위험도 마다하고 파금에게 관심을 돌렸고 파금의 아내 소산이 최후를 보내는 시각에도 온정을 담은 5폐이지에 달하는 긴 편지를 보내왔다. 파금 역시 다시 문단에 복귀한 후 베이징을 찾을 때마다 심종문 집을 찾아 방문했다. 심종문 타계한 후 파금이 쓴'종문을 그리다'라는 문장은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의 증거로 남았다.

파금과 조우의 우정은'뢰우'로 부터 시작되었다. 파금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단 숨에 수백폐이지에 달하는 조우의'뢰우'를 다 읽었다. 작품에 깊은 감동을 받아 그는 수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여 "문학계간지"는 한기에'뢰우'를 전부 게재하는 전례없는 상황도 일어났다.

당시 조우는 청화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때로부터 매번 조우의 작품은 파금이 먼저 봐준 후 발표했다. 1996년에 조우 선생이 타계했다. 1998년에 파금은 중병으로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해 거대한 신체적인 고통을 이겨내면서 병원에서 '조우를 그리며'라는 글을 썼다. 이 문장은 그가 창작생애에서 최후에 완성된 작품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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