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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전탑후퉁(磚塔胡同)
2016-05-23 16:29:43 cri

(만송 노인탑)


전탑후퉁(磚塔胡同)은 후퉁 동쪽 입구에 전탑(磚塔) 즉 벽돌탑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전탑후퉁은 현재 베이징에서 파손된 부분이 가장 적게 잘 보존된 후퉁 중의 하나이다.

일찍 원나라 때 부터 존재한 전탑후퉁은 당시 29개 후퉁 중 문자로 기재된 유일한 후퉁이다. 또한 원나라 시기 부터 명나라, 청나라, 민국시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 까지 문헌 자료로 찾아볼수 있는 후퉁은 전탑후퉁 뿐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전탑후퉁을 "베이징의 뿌리"라 말한다.

전탑후퉁을 알려면 우선 전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전탑은 원나라 때 건설된 청전(靑磚, 내화 벽돌) 불탑으로 금나라와 원나라 시기를 살았던 덕망이 높은 스님, 만송(萬松) 노인이 탑속에 묻혀 있다.

밀첨식(密檐式)으로 된 이 전탑은 원래 7층이였으나 나중에 2층을 더해 9층으로 됐다. 이것은 베이징 옛성 내에서 찾아볼수 있는 유일한 원나라 전탑이다. 이 전탑을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 자료는 원나라 시기의 <석진기(析津記)>인데 "양시탑(羊市塔)"은 법명이 "행수(行秀)"인 스님을 기념해 축조됐다고 기록했다.

행수 스님은 성이 채(蔡)가로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사람이다. 15살때 하북 형대(邢臺)에 있는 정토사(淨土寺)에서 출가해 승려가 됐다. 그후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하북 자현(磁縣)의 대명사(大明寺)에서 설암만(雪巖滿) 고승의 전수를 받고 선학(禪學)을 공부했다. 그리고 정토사에 돌아가 만송헌(萬松軒)을 세워 거처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만송 노인"이라 불렀다. 만송 노인은 학식이 높고 재간이 뛰어났으며 불학에 정통했고 경서와 법도를 투철하게 풀이해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줬다. 불교에 몸을 담고 천하에 뜻을 둔 만송 노인은 상경해서도 당시 금장종(金章宗)의 극찬을 받았다. 그후 원나라가 베이징에 도읍을 옮기면서 원세조와 중신 야율초재도 만송 노인을 스승으로 모셨다. 만송 노인은 평소 원세조에게 경전을 강론하고 도리를 전수하면서 인자함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불교의 도리로 마음을 닦으며 절대 폭정으로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원세조는 스승의 말을 새겨 들었고 만송 노인은 여유 시간에 고금을 연주하며 원세조에게 음악을 들려줬다. 3년후 원세조는 이런 스승과 제자의 정을 기념하기 위해 궁중 승화전(承華殿)의 고쟁(古箏)과 "비풍(悲風)" 악보를 만송 노인에게 선물했다. 만송 노인이 세상 뜬 후 사람들은 연경(燕京) 북부 외곽에 소박하면서도 색다른 전탑을 세워 스님을 기념했다. 그리고 전탑 북측에 있는 골목을 전탑후퉁이라 이름했다.

그리고 원대도가 전부 건설된 후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외곽에 위치했던 전탑은 도시 내에 포함됐다. 만송 노인은 생전에 존경받는 스님이였으나 그 유골을 묻은 전탑이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파손됐다.

명나라 때 잡초가 지붕에 까지 자란 전탑 주변에는 많은 주점들이 들어앉아 술독으로 둘러 쌓였고 취객들의 모습을 종종 볼수 있었으며 향불을 피우지 않은지 오래됐다. 명나라 만력 34년에 낙암(樂庵)이라는 승려가 남방에서 베이징성에 왔는데 주점에 둘러쌓인 만송 노인의 전탑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고 성금으로 전탑을 매입한 후 이곳에 거주하며 전탑을 지켰다. 하지만 낙암이 세상 뜨면서 전탑은 다시 황폐된 건물로 남았다. 청나라에 이르러 전탑은 또 다시 주택들 속에 갖히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 건륭 18년(1753)에 황제의 명으로 원래 규모로 개축되면서 황가의 소유로 된다.

그후 민국 시기에 전탑은 재차 고초를 겪게 된다. 이번에는 양고기 정육점이 들어앉으면서 불탑 정원이 양우리로 변했다. 그리고 스님의 유골이 묻혀있는 불탑에서 양을 잡는 일이 매일 반복됐다.

전탑과 운명을 같이 했던 전탑후퉁 역시 긴 세월동안 수많은 풍상고초를 겪었다.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기 전탑 후퉁은 베이징에서 희곡 활동의 중심지였던 터라 가장 흥성한 지역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당시 잡극(雜劇) 극장을 "구란(勾闌)"이라 불렀는데 규모가 큰 구란은 수천명의 관객을 수용할수 있었다. 전성시기 전탑후퉁과 주변 후퉁에는 극단과 구란이 20,30개나 있어 하루 종일 흥성거렸다. 청나라 때는 군사 주둔지로도 쓰였다가 나중에 다시 희곡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 운동이 폭발하면서 전탑후퉁은 서십고(西什庫) 교회당을 공격하는 의화단 조직의 본부로 됐고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하면서 전탑후퉁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많은 극단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로 베이징의 오락 중심지였던 전탑후퉁이 몰락하면서 나중에는 주민구역이 됐다.

그리고 1927년 민국 16년에 전탑 북측에 작은 문이 생기고 문 위에 "원 만송 노인탑"이라는 글이 적히면서 그제야 사람들은 이곳에는 덕망 높은 스님이 묻혀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최근 전탑은 보수 공사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지금의 전탑은 정원과 정원을 둘러싼 담장이 있으며 대문을 만들어 그 위에 "원 만송 노인탑"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높은 역사적 가치를 자랑하는"만송 노인탑"은 현재 베이징 특유의 풍경이 되고 있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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