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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삭가분(索家墳)
2016-06-20 15:26:12 cri

서직문교(西直門橋) 북쪽 학원로를 향하는 길에 삭가분(索家墳)이라는 곳이 있다. 삭가분이라는 지명은 옛날 삭니(索尼) 가문의 무덤이 있다 하여 붙여졌다. 지금의 삭가분은 주민구역으로 바뀌었고 이름만 남았다.

성이 허서리인 삭니는 만주(滿州) 정황기(正黃旗) 출신으로 청나라 초기 순치(順治)제와 강희(康熙)제를 보필하던 대신이였다.

누르하치가 두각을 드러내기 전에 허서리 가문은 작은 부락에 불과했다. 명문 가족의 혁혁한 지위도 없었고 높은 관직의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누르하치가 허서리 가문이 살고 있던 하다(哈達)를 공략하면서 허서리는 누르하치에게 귀순하고 허서리 가문의 수십년 휘황한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만족의 흥기는 철 같은 전투력에서 왔다. 그리하여 청나라 초기 전장에서 수십번 공을 세운 장군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학식이 있는 인재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때 학식과 문화 수양을 중요시 했던 허서리 가문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만족어, 몽골어, 한어에 능통했던 삭니는 누르하치의 중용을 받아 문관으로 취임했다가 나중에 누르하치를 호위하며 많은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다. 황태극이 즉위한 후에도 삭니는 황태극을 보필하는 대신으로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황태극은 건강상황이 악화되자 어린 아들 부린을 보필할 것을 삭니에게 부탁한다.

황태극이 사망한 후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이 삼관묘(三官廟)에서 삭니를 만나 황제 책립에 관해 논의했다. 황위를 탐냈던 도르곤은 삭니의 의향을 알아봤는데 삭니는 당장에서 "선황제가 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선택해야지요. 그래야 선황제가 구천에서 안심할수 있지 않겠나이까"라고 말했다. 그후 많은 논쟁을 거쳐 최종적으로 황태극의 9번째 아들, 6세의 부린이 황위에 올랐다. 그리고 도르곤과 지얼하랑이 섭정하여 어린 황제를 보필했다.

도르곤은 섭정왕이 됐지만 어린 황제를 보필한 삭니에게 앙심을 품었다. 순치5년, 삭니는 도르곤에 의해 누명을 쓰고 관직을 잃었으며 황태극의 능묘를 지키게 된다. 그러다가 3년뒤 도르곤이 사망하면서 순치제는 삭니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여 내무부를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순치 18년에 청세조가 또 사망하면서 삭니와 수커사하, 세피룽, 오배 네명의 대신이 어린 강희(康熙) 황제를 보필해 정사를 돌보면서 4대 대신으로 불렸다. 그중 삭니의 세력이 가장 컸다.

삭니는 조정에 충성하고 강희제를 보필할것을 맹세하면서 기타 세명의 대신들과 함께 나라 정사를 돌보았다. 하지만 4대 대신 중 세력이 가장 약했던 오배가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젊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오배는 사당(私黨)을 결성해 전횡을 일삼고 어린 황제와 기타 보좌 대신을 무시했다. 세명의 황제를 보좌하면서 여러번의 권력 다툼을 경험했던 삭니는 연세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조정에서 물러나 오배와의 정면 충돌을 회피했다.

오배가 조정을 제패하게 되자 효장(孝庄) 태황태후는 오배를 저지하기 위해 삭니와 그의 아들을 끌어들였다. 태황태후는 삭니의 손녀를 황후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 후로 몇십년간 허서리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조정에서 중요한 관직을 맡았고 권력의 핵심이 됐다.

삭니가 사망한 뒤 강희제는 그에게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추증했다. '문충'은 중국 고대 충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상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삭니가 일생동안 쌓은 최고의 충신이라는 명예에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의 셋째 아들 수어투(索額圖)이다. 수어투는 삭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조정에서 관직을 맡았고 삭니가 사망한 후에도 국사원대학사(國史院大學士), 보화전대학사(保和殿大學士), 의정대신(議政大臣) 등 중요한 직위를 가졌다. 그리고 태자의 외조부였던 그는 황실과의 관계가 밀접했다. 태자가 성장하면서 강희제는 매번 순찰하거나 출정할 때면 태자가 조정의 사무를 처리했고 당시 대학사이고 외조부인 수어투도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그러던 강희 40년 수어투와 태자가 임금의 자리를 노려 찬위를 시도한다는 증거가 강희제에게 들키면서 강희 42년 5월에 수어투는 청나라 제1 죄인으로 감옥에 갖혀 옥중에서 죽게 된다.

그 후로 삭니 가족은 조정에서 지위를 철저히 잃게 되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더이상 큰 묘지를 건설할 능력이 없게 된 그 후손들은 가족이 사망하면 멀리 떨어진 베이징 서부 시교에 묘지를 건설하던 전통을 버리고 더 가까운 서직문 밖에 묻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삭가분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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