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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동안문(東安門)
2016-12-26 18:05:59 cri

동안문(東安門)은 베이징 황성의 동문이다. 명나라 영락(永樂) 15년인 1417년에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그 모양이 지안문(地安門)과 비슷하다. 서쪽은 궁성의 동화문(東華門)을 마주하고 동쪽은 옥하(玉河) 위에 세워진 '황은교(黃恩橋)'와 마주한다. 옥하는 원나라 시기 통혜하(通惠河)의 일부분이었으며 명나라 초기 까지도 화물을 해자 즉 적수담(積水潭)까지 운송하는 성내 수로였다. 옥하는 궁성과 가까웠기 때문에 이곳의 시끄러운 소음이 황궁내에 까지 전해졌다. 하여 명나라 선덕(宣德) 7년인 1432년에 황성 동쪽 성벽을 옥하 동쪽으로 옮겼으며 동안문도 따라서 황은교 동쪽에 재건됐다. 그러면서 궁내에 들어온 수로가 점차 황폐됐다. 그리고 동안문 원래 자리에는 동안리문(東安里門)이 세워졌다.

동쪽을 향하고 있는 동안문은 성대가 없으며 청백석(靑白石)으로 기초를 다졌고 담장은 붉은색이며 지붕은 황금빛 유리 기와로 건설됐다. 동안문은 문이 3개 있으며 가운데 문이 가장 높았다. 동안문을 지나 궁내로 들어가면 바로 옥하 위에 놓인 돌다리에 이르는데 관원들이 조정에 들어설때 동안문을 통과해 입궐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 다리를 지나야 했다. 하여 망은교(望恩橋) 또는 황은교라 불렀다. 그리고 황은교에는 동안문과 동안리문을 연결하는 담장이 있었는데 이런 구조는 청나라 말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또한 지금의 동안문대가(東安門大街)와 동안시장의 이름이 바로 동안문에서 유래됐다.

1912년 2월, 청정부를 압박해 퇴위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하기 위해 손중산(孫中山)은 남경국민정부 임시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원세개(袁世凱)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대신 원세개에게 반드시 남경에서 대통령에 취임할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원세개는 오랜 근거지인 북방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남경으로 가지 않기 위해 원세개는 장훈(張勛) 등 측근들을 부추겨 원세개의 남경행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선후로 베이징, 천진, 하북 등지에서 군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고 원세개는 북방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핑계로 반드시 베이징에 남아야 한다는 가상을 만들었다. 당시 반란군은 도처에서 만행을 저질렀으며 배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그해가 임자년(壬子年)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임자병변(壬子兵變)'이라 한다. 그리고 동안문은 바로 임자병변때 불에 타버렸다.

또한 1926년 부터 1927년 사이 북양 정부 내무부는 황성의 성벽을 허물어 팔아버렸으며 동안리문 역시 철거됐다. 기재에 따르면 황은교 위에는 원래 진무묘(眞武廟)가 있었는데 성벽이 철거되면서 서북쪽으로 옮겨졌다. 동부 성벽이 철거된 후 옥하도 도로로 개조됐는데 바로 지금의 남하연대가(南河沿大街)와 북하연대가(北河沿大街)이다. 이곳은 옛날 황성 동부 성벽의 유적지라 볼수 있다.

역사상식:

진무묘(眞武廟)

진무묘는 옛날 진무대제(眞武大帝)를 공봉하던 장소이다. 진무대제는 도교에서 신봉하는 신으로 진무제군(眞武帝君)또는 현천상제(玄天上帝)라고도 부른다. 진무대제는 반고(盤古)의 아들로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아버지이고 인간세상에 복희씨(伏羲)로 태어났다가 여래불(如來佛)의 제자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여 진무대제는 민간에서 공경을 받는 신으로 공봉하는 도장이 많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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