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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문화] 광거문(廣渠門)
2017-05-22 12:57:29 cri

광거문(廣渠門)은 베이징 외성 동문으로 대통교문(大通橋門)이라 부르기도 했다. 광거문은 베이징 성문 중 상대적으로 소박한 문으로 명나라 가정(嘉靖) 33년인 기원 1555년에 건설됐다. 광거문은 성루와 전루, 옹성으로 구성됐고 서쪽의 광안문(廣安門)과 대칭된다.

광거문은 1930년대 일본군 점령 시기에 전루가 철거됐고 1953년에 교통의 편리를 위해 성루와 옹성이 철거됐다.

광거문의 옹성은 다른 성문에 비해 특별했다. 옹성은 전쟁시 방어, 공격 시설로 사용되기 때문에 보통 옹성내에는 건축이나 주민이 없다. 하지만 광거문 옹성 내에는 몇 개의 점포가 있었다.

옹성내 양측에는 4~5개 점포가 있었는데 작은 상업거리를 형성했다. 사면이 성벽으로 둘러 싸이고 앞에는 전루 성문이 있고 뒤에는 성루 성문이었다. 하여 성문이 닫히면 이곳은 고즈넉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된다. 광거문 밖에는 곡미 시장이 있었는데 동남쪽 농민들이 이곳에 모여 곡식을 팔았다. 하여 장날이면 그야말로 흥성했다.

광거문은 베이징 동부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629년 황태극이 팔기군을 거느리고 베이징에 진군해 광거문을 공격했다. 당시 명나라 명장 원숭환(袁崇煥)이 9000명의 기병을 인솔해 청나라 군사와 광거문 밖에서 접전했다. 원숭환은 적진으로 돌격하며 화살을 맞으면서 10시간 전투를 벌여 팔기군을 격퇴했다. 황태극은 어쩔수 없이 남해자(南海子)로 군사를 옮기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원숭환을 중원으로 진입하는 가장 큰 장애로 생각해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이간책을 계획했다. 황태극은 원숭환이 팔기군과 내통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포로가 된 명나라 태감의 귀에 들어가 한 다음 명나라 조정에 소식을 전할수 있게 태감들을 풀어주었다. 숭정(崇禎)황제는 아니나다를까 계략에 넘어가 원숭환을 사형에 처했다.

원숭환이 억울하게 살해 된 후 한 부하가 원숭환의 시체를 가로채 광거문 부근에 묻고 세세손손 무덤을 지켰다고 한다. 1984년에 원숭환의 무덤과 사당은 베이징시 문화재로 선정됐고 2006년에 전국 중점보호 문화재 명록에 등록됐다.

이밖에 또 한차례의 전투가 광거문에서 있었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천진(天津), 양촌(楊村), 통주(通州)를 점령한 후 베이징 까지 위협했다. 당시 조양문은 주둔군이 많았던 관계로 성문 공격에서 여러 번 실패하자 수비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광거문과 동직문을 공격했다. 당시 병력이 부족했던 청나라 정부는 나이가 많은 병사들까지 기병으로 편입해 성문을 지키게 했다. 이런 군사들은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도 평소 하는 일이 없이 안일한 생활을 했다. 갑자기 들이 닥친 적들의 공격 앞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은 그야말로 무기력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 참담했다. 우연의 일치라 할까, 270년을 전후로 광거문에서 발생한 이 두차례 전쟁은 청나라의 흥망성쇠 그 과정을 견증했다.

사라진지 오래된 광거문 자리에는 현재 입체 교차로가 건설됐고 지명으로 남아 그 오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현재 지하철 7호선이 지나는 광거문 일대는 현대적인 고층건물과 옛 베이징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골목이 공존하고 있다.

번역/편집: 조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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