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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서태후가 노닐던 곳
2014-08-13 11:27:35 cri

문화유적지가 즐비한 베이징에서 유독 "이화원"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청나라 말 지고무상의 권력을 향유했던 서태후(西太后1835.11.29~1908.11.15), 남자의 천하였던 중국 황실에서 여주인으로 등극했던 그녀는 바로 이곳에서 후반생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화원은 중국 최대의 황실 원림이자 서태후의 피서행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여자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화원에서 서태후의 비범한 "기운"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는 8월의 어느 하루, 베이징 천안문에서 서북쪽으로 19km 떨어진 교외에 위치한 이화원을 찾았다.

이화원의 전신은 1750년 청나라의 건륭(乾隆)황제가 모후인 숭덕(崇德)태후에게 효도하기 위해 건설한 '청의원(淸漪園)'이였다. 그후1860년 제2차 아편전쟁때 이화원은 영국, 프랑스군에게 약탈 당하고 훼손되였지만 서태후가 청나라 해군의 군자금 30만냥을 남용해 수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광서(光绪)황제의 휘호로 된 "이화원" 현판

한낮의 이화원 동궁문(東宮門)은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의 눈길이 맨 먼저 머문 곳은 광서(光绪)황제의 휘호로 된 "이화원" 현판이었다. 황제의 친필이 적힌 이 현판은 시작부터 황실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동문에 들어선 후 조금 걸으면 인수전(仁壽殿)이 나타난다. 인수전은 이화원 궁전지역의 주요건물이다. 인수전 내부엔 옥좌, 병풍, 공작새 깃털로 만든 장식용 부채, 향로, 학모양의 등이 원래 진열되어 있던 그대로 남아 있다. 이화원은 아편전쟁때 영국,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고 또 그 후 연합군에게 약탈당했다. 이화원의 보물은 그때 상당수 도난당했다. 그런 난리판에 병풍이나 부채, 학모양의 등, 옥좌가 그냥 남아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건 무게 때문이 아닐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인수전(仁壽殿)

인수전(仁壽殿)앞뜰의 장수석

연년정(延年井)

인수전의 북쪽엔 연년정(延年井)이 있다. 서태후는 이 우물의 물을 마시고 70세가 넘도록 장수했다고 한다.

옥란당(玉澜堂)은 본전과 두 개의 보조전각으로 이루어진 삼합원(三合院)형태의 건물이다. 처음엔 건륭 황제가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였는데 후에는 광서황제가 10년동안이나 연금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서태후는 아들 동치황제가 죽자 3살밖에 안되는 광서황제를 자리에 올려 놓고 수렴첨정을 계속 했다.(광서황제는 서태후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광서황제가 19살이 되자 서태후와 큰 충돌을 빚었는데 바로 광서황제가 1898년에 실시한 "무술변법"(유신변법)이다. 그러나 변법은 103일만에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때로 부터 광서황제는 요즘 말하는 가택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문일까, 옥란당을 지나오는 내내 이 불운한 황제에 대한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인수전 북쪽의 덕화원(德和園)은 서태후가 경극(京劇)을 관람하던 곳이다. 서태후는 17살에 궁녀로 뽑히여 황궁에 들어간다. 이 17살 소녀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황제가 산책할 무렵에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러 함풍황제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참으로 당돌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그때부터 벌써 남다른 예지를 보였다고 할까… 아무튼 노래를 즐긴 서태후는 황태후로 된 후 날마다 덕화원에서 경극을 보았는데 이는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과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

낙수당(樂壽堂)은 원래 건륭황제가 모후를 모시고 곤명호의 절경을 감상하던 곳이라고 한다. 1887년 서태후가 여름에 머무는 별장으로 재건했다. 그녀는 48명의 시종과 수천명의 수행원을 옆에 두고 있었다. 서태후는 이 곳에서 식사를 즐기는데 매끼마다 60종의 주식, 30종의 간식을 포함한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고 한다. 어디 이뿐이랴,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번씩 옷을 바꿔입는 사치꾼이였다고 한다. 서태후의 부와 타락한 생활을 동경하는것은 아니지만 단 한번이라도 서태후처럼 이 아름다운 지상락원에서 화려한 생활을 누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법도 하다.

중국에서 가장 큰 원림지석이라 부르는 낙수당 앞뜰의 기암괴석을 지나 서쪽의 요월문(邀月門) 에 들어서는 순간, 번잡한 세상에서 훌쩍 뒤로 물러선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각각의 고궁느낌의 건물들이 모두 아름다운 장식을 자랑하고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웠지만 이렇게 감탄이 터져나오진 않았다. 눈을 어디에다 뒀으면 좋을지 모를 정도로 눈앞의 산수화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장랑(長廊)

낙수당 서원(西院)에서 석장정(石丈亭)에 이르는 장랑(長廊)은 길이가 728m로서 중국 고전원림 중 최고의 길이를 자랑하는 복도이며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불린다. 중간중간에 '춘하추동'을 본딴 유가(留佳) , 기란(寄澜), 추수(秋水), 청요(清遥)라는 4개의 8각 처마의 정자가 있다. 장랑은 서유기(西遊記),삼국연의(三國演義),홍루몽(紅樓夢),견우직녀(牛郞織女)등 중국 고전 문학과 전설에 나오는 장면, 산수화가 1만4천여 점의 회화로 정교하게 장식된 산책로이다. 그야말로 중국문화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딱 맞는것 같다. 장랑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화원의 명소들을 연결하고 있어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관람통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태후가 매일이다 싶히 걸어다녔다는 장랑, 해빛을 막아주고 비를 막아주는 그야말로 춘하추동 그림 같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나도 지금 서태후가 눈에 담았던 전경을 그대로 담으며 마치 서태후라도 된듯이 이 장랑을 걷고 있다.

장랑을 따라 걷다보면 배운전(排雲殿)이 나타난다. 배운전의 이름은 진나라 (晋朝) 때의 곽박(郭璞)의 시구 "신선배운출(神仙排雲出),단견금은대(但見金銀臺)" (신선이 나와 구름을 가르니, 한가로이 금은대가 바라 보이누나) 에서 따온 이름이다. 만수산 남쪽 중앙에 위치한 배운전은 서태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에 사용되었다. 더 가다보면 이화원 최고의 수상건축물인 석방(石舫) 이 보인다. 석방(石舫)의 각 층의 창루에는 큰 거울이 하나씩 있는데 비가 올 때면 서태후는 거울 앞에 앉아 차를 마시며 거울 속에 비친 풍경을 감상했다고 한다. 또 이화원 북동쪽 끝에 위치한 해취원(諧趣園)은 연꽃이 아름다워 서태후는 이 곳에서 낚시를 즐겼는데 환관들이 몰래 물 속에 들어가 바늘에 고기를 걸어주었다고 한다.

 곤명호(昆明湖)에서 바라본   만수산(萬壽山)전경

장랑 남쪽은 곤명호(昆明湖)다. 곤명호는 항주(杭州)에 있는 서호(西湖)를 본따 만든것인데 호수라기보다는 바다를 방불케 한다. 생각해보라, 이화원 전체 면적인 300만평방메터 규모중에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으니 인공으로 만들었다고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장랑 북쪽에는 60m높이의 만수산(萬壽山)인데 곤명호를 만들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서 기세가 웅장한 궁전누각이 지어져 있다. 산 중턱에 불향각(佛香閣)이 있는데 주변경관을 감상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로 남쪽은 곤명호요, 뒷쪽엔 지혜해(智慧海)를 등지고 있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서태후는 불향각에 올라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곤명호에서 바라본 인공섬 남호도(南湖島)

이화원의 석양을 바라보는 동우(銅牛)

곤명호를 사이에 두고 만수산과 마주한 섬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인공섬 남호도(南湖島)이다. 남호도로 이동하는 배에서 본 이화원의 풍경은 매력적이기 그지 없었다. 남호도는 조각된 청백색의 돌들이 섬을 둘러싸고 있고 곽여정(廓如亭)과 이어놓는 십칠공교(十七孔橋)는 총길이가 150메터로 다리의 돌난간 위에는 544마리의 돌사자가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다리를 지나면 동쪽 제방에는 지춘정(知春亭), 곽여정(廓如亭), 동우(銅牛)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화원에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끄는 크고 작은 고대 건축물이 3000여개나 있다.

석양이 비낀 십칠공교(十七孔橋)위에 아름다운 실루엣

이화원 호수가에서 본 불타는 석양

아직은 이화원의 반의 반도 돌지 못했는데 벌써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화원 호수가에서 하늘가에 불타는 석양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100여년전, 서태후도 궁녀들에게 옹위되어 호수가에서 이렇게 석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천하를 다 가졌던 그녀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말 그대로 이르는 곳마다 황실의 역사를 읽을 수 있고 또 서태후의 흔적을 밟을 수 있는 이화원이다. 베이징 대표적인 4대 관광 코스중 자금성(紫禁城), 만리장성(萬里長城), 천단(天壇) 에서 느꼈던 황제들의 위엄과 달리 청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던 서태후가 누릴수 있었던 사치와 아름다움, 그 짙은 정취는 오직 이화원에서만이 느낄수 있다. 이화원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를 비로소 알것 같다.

사진/김동광 글/이향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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