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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근로자 캐리어에 담긴 "획득감"
2017-01-23 14:42:06 cri

귀향길에 오른 농민근로자들 (자료사진)

크고 작은 배낭을 짊어지던데로부터 캐리어를 끌고,밖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데로부터 온 천하를 자기의 집으로 삼는다...

설여객 수송을 맞은 정주(鄭州) 기차역에서 수많은 농민근로자들이 이같은 "세대변화"를 겪고 있다. 그들의 심경도 날로 여유로와진다.

정주기차역 서쪽 광장에서 중경시(重慶市) 봉절현(奉節縣)의 농촌에서 온 엽주(葉洲) 씨와 그의 동료 유평(劉平)씨가 한창 한담중이다. 이들의 곁에 놓인 두개의 붉은색 캐리어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자신의 품팔이 경력을 얘기 하면서 70년대 생 엽주 씨는 감개가 무량해한다. 한것은 예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때 화학비료주머니를 어깨에 둘쳐메군 했는데 지금은 멋진 캐리어를 끌기 때문이다.

8년전 엽주씨는 화학비료 주머니에 옷과 이불을 메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품팔이를 나왔다. 상해(上海)며 광주 (廣州), 절강(浙江) 등 지역에는 모두 이들의 발자국이 찍혀있다. 한달전 엽주 씨는 하남(河南) 신정(新鄭)에 와서 다리건설 근로자가 되었다.

"우리는 오랜 기술자에 속합니다. 솜씨가 괜찮다 보니 하루에 인민폐 300-400원은 문제없습니다." 곁에 앉은 유평 씨는 설이 지난후 계속 근무할 예정으로 옷가지를 시공현장에 남기고 캐리어에는 갈아입을 옷 두벌만 챙겼다고 말했다.

배낭이 훌쭉해진 반면 농민 근로자들의 지갑은 두둑해 졌다.

검정색 나사천 코트를 입고 손에 캐리어를 끌고 귀향길에 오른 52세 사천(四川) 농민 오군방(吳軍邦) 씨는 생기로 가득찼다.

정주(鄭州)시에서 목공일을 하는 오군방 씨는 월수입이 인민폐 5천원에 달한다. 책임자가 주숙을 책임지고 임금체불현상도 없다보디 반년간 3만원을 적금했다.

오군방씨는 전에 한동안 생활에 대한 신심을 잃은적이 있다고 한다. 2008년 문천 (汶川)지진으로 그의 고향인 광원시(廣元市) 삼퇴진(三堆鎭)은 엄중한 재해를 입었다. 페허로 된 고향마을을 지켜보면서 오군방 씨는 소극적으로 변했다.

그후 정부의 도움으로 오군방 씨는 새집에 입주했다. 뛰여난 솜씨를 가진 오군방 씨는 외지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생활이 점차 펴이기 시작했다. 특히 뿌듯한것은 2008년 지진이 발생한 해에 대학에 입학했던 딸애가 대학원 졸업후 수입이 괜찮은 직장을 얻은 것이다.

"어렵던 시절은 다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생활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오군방 씨는 생활에 대한 자신감으로 차넘치고 있다. 가벼운 차림으로 귀향길에 오르는것 역시 인생에 대한 오군방 씨의 일종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하남(河南) 초작(焦作)의 모운춘(毛運春) 촌민은 올해 고속철을 타고 귀주(貴州)로부터 정주(鄭州)로 돌아왔는데 1천 킬로미터 노정을 6시간만에 도착했다. 최근 연간 모운춘 씨가 근무하는 경작촌(耿作村)이 초작시 고신구에 편입되면서 농촌에서도 도시인들의 생활을 누릴수 있게 되었다.

농민 근로자 출행 장비의 변화를 지켜 보면서 20 여년간의 설여객 수송 근무 경력을 갖고 있는 정주 기차역 여객운수원 왕단(王丹)씨는 이는 필연적인 추세라고 말한다.

왕단씨는 젊은 세대 농민 근로자들은 언녕부터 출행의 편의도에 중시를 돌리기 시작했고 노일대 농민근로자들도 수확이 커지면서 기존의 묵직한 배낭을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귀향길에 오른다고 말했다.

"처음에 외지에 품팔이를 나올때 마을 촌민들과 함께 낯선 도시에 머물면서 밤마다 몰려오는 고독감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중년에 들어 절반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지갑이 두둑해지고 획득감도 높아졌으며 자신감으로 차넘칩니다. 이제는 외지에서 근무하는 것을 또 다른 관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감개무량한 엽주 씨의 말이다.

번역/편집:강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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