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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전의 5년)호북 기춘현 관요진, 도자기로 빚는 행복상
2017-06-12 10:12:05 cri

기술일군의 손끝에서 완성되어 가는 도자기

"14살부터 기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40살에 공장장이 되었지요. 25년간 공장장으로 근무한 셈입니다."

하량법(何良法) 노인은 호북성 기춘현 관요진 수공 도자기제작 기예 프로젝트의 무형문화재 전승인이다. 올해 70세에 나는 하량법 노인은 지난 세기 관요진 도자기 제조 산업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기도 하다.

도자기는 점토나 도토(陶土)를 이갠 후 모형을 만들고 구워낸 기구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호북성 기춘현 경내에 위치한 관요진은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이름으로 명명된 진이다. 인구가 3만명밖에 안되는 이곳은 적서호(赤西湖) 바닥의 풍부한 도토자원을 우세로 세세대대 도자기 제작을 해 왔으며 전성기 때는 만여명 도자기 제작 근로자를 보유했던 이름난 "도자기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도자기를 제작한 역사는 1369년인 명나라 홍무(洪武) 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 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관요진의 수공예 도자기는 그 기예가 일품으로 각광을 받아왔다.

구이 절차를 기다리는 도자기들

하량법 노인은 자신은 수많은 동년배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도자기 제작 공예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40살에는 도자기 공장의 공장장이 되었다고 터놓았다. 그 때 하량법 노인의 공장에서는 단지와 항아리 등 일상용 도자기를 생산했는데 효익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후에 플라스틱과 유리 등 재질이 흥행하면서 시장화 운행에 충격을 입기 시작했으며 공장 경기도 갈수록 못해졌다.하량법 노인의 말이다.

"플라스틱 제품으로 대체되면서 공장은 경기가 갈수록 못해졌지요. 2000년에 들어서서는 기본상 생산을 정지했고 기술 근무자들도 하나둘 떠나갔습니다."

CRI기자와 인터뷰를 나누는 하량법 노인

하량법 노인은 대대손손 전해온 산업이 쇠퇴하는것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칼로 에이듯 아팠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관요진에서 수많은 우대조치를 내와 도자기 산업을 부축하고 특색 도자기문화진을 구축하면서 하량법 노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다시 피어났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새시대 관요진 첫 도자기 기업인 호북 명요(明窯) 도자기 유한회사를 꾸렸다.

"2013년 정부는 수백년을 이어온 도자기 공예가 이대로 없어지는건 아닌가고 걱정했습니다. 그 때 마을의 도자기 공예 근무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두 손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해마다 설이면 집에 오군 했는데 고향에서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할수 있지 않을가 고민했습니다. 저도 외지에서 고찰 학습을 하고 돌아와 회사를 등록했습니다. 향진 지도자들도 큰 지지를 줬습니다. 모두의 힘을 합쳐 회사가 일어섰습니다."

회사 상황을 소개하는 하건평 씨

새 회사는 기존의 간단한 생산형식을 개변해 일상용 정품 도자기 생산과 도자기 문화체험, 교학을 결부시켜 연구개발과 생산, 판매, 체험을 일체화 한 종합성 도자기 회사로 부상했다.

하량법 노인의 아들 하건평(何建平) 씨는 명요회사 설립시 가장 많이 출자한 사람이다. 도자기산업이 부진을 겪던 시기에 성장한 하건평 씨는 비록 도자기 공예 가문에서 태여났지만 도자기를 빚을줄 몰랐다. 마을의 기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하건평 씨는 성인이 된후 심천의 한 전자기기 공장에서 품팔이를 했다. 그후 현의 투자유치정책에 힘입어 하건평 씨는 고향에 돌아와 전자기기 공장을 꾸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 하건평 씨는 조상대대로 내려온 도자기 공장과 다시금 접촉하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 공장을 운영하면서 선명한 대비를 느꼈습니다. 전자기기공장은 활황을 누리는데 반해 도자기 제조 산업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면서 대대손손 내려온 가업이 이대로 소실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가업이 우리 세대에서 소실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자기 공예를 선보이는 하등명 씨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지니고 있는 하건평 씨는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자금을 내여 아버지와 함께 도자기 기업을 일떠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오래동안 외지에서 근무하던 경력은 회사 발전에 보다 넓은 사고맥락을 제공했다.

"우리는 고찰을 통해 전통적인 도자기산업의 전환을 실현하려면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존재한다는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품 도자기 공예를 발전시키는 것은 원자재에 대한 연구제작으로부터 판매, 네트워킹 구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긴 과정이라는것을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정책 지지와 명확한 목표확정으로 하건평 씨의 회사는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는 하량법 노인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오래된 이 공장은 1500 평방 미터에 달하는데 향후 대학생 실습양성과 소학생 체험장소로 꾸리려 합니다. 우리는 호북성 고급교육실습양성기지입니다. 해마다 무한경제학원과 미술학원, 이공학원, 경공업학원의 학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려 하는데 접대수준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명요회사의 성공은 마을의 기타 도자기 제조자들을 크게 고무했다. 올해 60세 나는 하등명(何登明) 씨는 1998년 광주로 갔는데 뛰여난 도자기 제조 공예로 현지 도자기 기업의 기술 골간으로 되었다. 후에 광주미술학원 교원과 청화대학 교수의 세심한 가르침을 통해 그의 도자기 제조 기예도 갈수록 제고되었으며 유명한 도자기 제조 전문가로 등극했다.

하등명 씨의 작품

2015년 하등명 씨는 관요진 정부의 초청으로 광주의 높은 임금도 마다하고 고향에 돌아와 창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요진 도자기제작의 부흥에 기여하련다고 밝혔다. 하등명 씨는 높은 시작점과 혁신이 결합되어야만 관요진의 도자기 제조업이 부흥할수 있다고 말했다.

"대대손손 도자기를 빚어 왔는데요, 관요 도자기를 한층 발전시키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가합니다. 예전에 제작하던 도자기는 내놓기가 무엇했는데 앞으로 꾸준히 개진해 자랑스럽게 내놓을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현재 하등명 씨는 진의 한 도자기 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자체 작업실을 운영해 창의 도자기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작업실에 있는 모든 작품들은 하등명 씨 혼자서 전 과정을 완성한 것이다.

새 도자기 기업의 출현과 하등명 씨와 같은 대가급 기술자들의 복귀는 오래된 도자기 제조 진인 관요진에 생기를 부여했으며 갈수록 많은 주목을 받도록 했다. 올해 5월 호북성 미술가 협회 도자기공예 창작기지, 황강시 미술가협회 도자기공예 창작기지는 잇달아 관요진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관요진 이가요

관요진의 서홍하(徐紅霞) 진장은 특색 도자기문화진으로 발전하는 것은 최근 연간 관요진의 중심업무라고 터놓았다.

관요진은 정책을 제정해 많은 대가들이 관요진에 와 개인 작업실을 개설하도록했다. 이밖에 우대정책을 제정해 도자기 공장의 전환발전을 격려했다. 뿐만 아니라 도자기제작 문화의 발굴과 산업화 개발 역시 중심 업무로 추진하고 있다. 서홍하 진장의 말이다.

"관광을 발전시키려 합니다. 이가요(李家窯)를 일례로 원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참답게 기획하고 자금을 쟁취해 복구작업을 추진함으로써 문화내실이 있는 도자기 가마 유적으로 건설해 향촌관광지로 부상시킬 타산입니다. 학생들의 실습 양성과 교원 양성기지로 건설할 타산도 갖고 있습니다. 현재 8개 고등학교들이 이 곳에 현판을 걸었습니다. 해마다 수천명이 찾아와 도자기를 제작하고 사진을 찍고 관광을 하고 있는데 이는 현지 주민들의 향촌관광발전도 이끌었습니다."

서홍하 진장이 소개하는 이가요는 관요진에 현존하는 가장 완정한 옛 도자기 가마이다. 이 가마의 보수가 마무리되면 이곳에서 도자기를 굽던 옛 풍경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번역/편집: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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