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2 09:46:42 | c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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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월 12일입니다. 1942년의 오날 중상을 입은 조상지(趙尙志) 장군이 일본군의 포로로 잡혔습니다.
조상지는 1908년 10월 26일 요녕(遼寧)성 조양(朝陽)현 라마구(喇嘛溝)에서 태어났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그해 황포(黃埔)군관학교 제4기에서 공부했습니다.
1932년초 중국공산당 만주성(滿洲省)위원회에서 조상지를 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로 임명했습니다. 같은 해 6월, 동북 대부분 국토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조상지는 반만항일(反滿抗日)무장을 조속히 설립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파언(巴彦)현 장갑(張甲)주 유격대로 갈 것을 요구했으며 대오 정돈을 돕고 일련의 항일 골간을 양성했습니다. 사진속에 말채찍을 들고 있는 작은 키의 사나이가 바로 조상지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조상지 장군 생전의 유일한 사진입니다.
1936년 8월, 조상지는 동북항일연군 제3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7개 사단의 6천여명 군대를 인솔해 송화강 양안과 소흥안령 산기슭의 광범위한 구역에서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찌르며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동북인민은 그를 "북국의 숫사자"라고 불렀으며 양정우(楊靖宇)와 함께 "남양북조"로 불리웠습니다. 일본침략자들은 부득불 "작디작은 만주국, 크나큰 조상지"라고 애탄했습니다.
1939년 9월, 우메즈 요시지로가 일본 관동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양정우와 조상지 두명의 항일장군을 전격 체포할데 관한 첫 명령을 내렸습니다. 적들은 현상금 1만원을 걸고 조상지 장군을 수색했으며 여러차례 특무 간첩을 항일군 내부에 파견해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1942년 1월, 조상지 장군은 몇명의 소분대를 거느리고 흑룡강(黑龍江) 학립(鶴立)현에 진입했으며 일본간첩에게 발견되었습니다. 학립현 흥산(興山)진 경찰서 서장 타이 히사지로가 매국노 유덕산(劉德山)을 조상지 곁으로 침입시켰습니다. 2월 12일 조상지 장군은 부대를 인솔해 오동하(梧桐河) 경찰소를 습격하는 도중 등뒤에서 날아 온 유덕산의 탄알을 맞았으며 쓰러지는 순간 유덕산을 사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혼수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적에게 포로되었습니다.
적들은 중상을 입은 조상지 장군에 대해 돌격 심문을 진행했습니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의 일본경찰들을 크게 욕하는 외에 적들의 그 어떤 심문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1942년 2월 13일 오전, 조상지 장군은 총에 맞은지 8시간만에 장렬하게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였습니다.
조상지 장군이 피살된 후 적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경축했으며 시신을 송화강에 던졌습니다.
1947년 주하(珠河)현 공농대표대회는 이 현의 이름을 상지(尙志)현으로 고쳤습니다. 2004년 조상지 장군의 두개골이 장춘(長春) 호국반약사(護國般若寺)에서 발견되었으며 2008년 10월 25일 열사의 고향인 요녕성 조양시 "조상지열사능원"에 안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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