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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5월 12일 장가하구 전투
2015-05-12 10:53:55 cri

오늘은 5월 12일입니다. 1938년의 오늘, 신사군 제4지대가 안휘(安徽) 소현(巢懸)지역의 장가하구(蔣家河口)일대에 잠복해 일본군을 섬멸함으로써 화중 적후항일유격전의 서막을 열어놓았습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국공양당은 1937년 10월 합의를 달성하고 남방의 8개 성 14개 지역의 홍군유격대를 국민혁명군 육군 신편 제4군으로 개편했습니다. 1938년 봄, 신사군은 재편성된 후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선후로 화중적후에 진입해 항일유격전쟁을 전개하면서 광활한 화중 적후 전장을 개척했습니다.

적들의 병력을 견제하고 분산시키고 국민당 정면전장의 작전을 협조하며 화중 적후 인민군중들을 구출하기 위해 중공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는 1938년 2월부터 5월사이에 여러차례 장강국과 신사군 지도자들에게 전보를 보내 신사군이 하루속히 화중 적후에 진입해 강소와 절강, 안휘지역에서 항일유격전쟁을 하고 항일근거지를 세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1938년 4월, 고경정(高敬亭)이 인솔한 신사군 제4지대는 안휘성 서부 곽산(霍山)현 유파(流波)마을에서 안휘성 중부로 진군해 노강(盧江), 무위(無爲), 서성(舒城), 동성(桐城), 손현(巢縣) 지역에서 유격전쟁을 펼쳤습니다.

1938년 5월, 소현을 점령한 일본군은 자주 소부대를 소호(巢湖)동안 장가하구(蔣家河口)일대에 파견해 소탕을 진행했습니다. 제4지대 제9연대는 주도면밀한 정찰을 통해 물줄기가 종횡으로 뻗어있고 갈대가 무성해 잠복공격이 이상적인 지점임을 발견하고 하구서안에 잠복해 적들을 섬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월 11일 오후, 제9연대 정찰대와 제2대대 제4중대가 은병산(銀屛山)에서 출발해 12일 새벽 잠복지역에 매복했습니다. 오전 8시경, 일본군 제6사단의 일부 병사들이 소현에서 배 두척을 타고 장가하구로 출동했습니다. 적들이 강변에 오르자마자 잠복해 있던 신사군 부대가 갑자기 맹렬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돌연습격을 당한 일본군 중 일부는 물속에 뛰어들어 다시 배를 타고 도망가려 시도했고 일부는 강변에 올라와 완강하게 대항했습니다. 신사군 제4중대 3소대는 화포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정찰대는 수류탄묶음으로 배를 폭파시켰습니다. 전투는 20분만에 끝났습니다. 일본군 제6사단 소현 수비대 20여명이 전멸되었고 신사군은 총 10여 자루를 얻었으며 사상자는 한명도 초래하지 않았습니다.

1938년 5월 15일 "신화일보"는 장가하구전투 관련 보도를 개재했습니다. 5월 16일 장개석(蔣介石)이 신사군 지도자 엽정(葉挺)과 항영(項英)에게 전보를 보내 "4지대가 장가하구에서 기적처럼 적들을 물리친데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표시했습니다.

장가하구 전투는 신사군 제4지대가 환중 적후로 진입한후 치른 첫 전투인 동시에 신사군이 재편성 후 화중에 진입해 펼친 첫 전투입니다. 이로써 신사군은 화중 적후에서 광범한 항일유격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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