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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이지민(李志敏)
2015-08-07 17:25:44 cri

CRI기자와 인터뷰 중인 이성강

 

"이 일들은 모두 저의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저에게 이야기 해주신 것입니다."

올해 66세인 이성강(李性剛)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작은 소설책 표지를 끊임없이 매만지면서 말했다. 그의 손에 쥐여진 이 책은 "집의 꿈"으로 그의 아버지가 항일전쟁시기에 몸소 겪었던 사실들을 개편해 창작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 이지민은 국민당 군관으로 항일전장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는데 도운관(圖雲關)에 있던 중국 지원 국제의료팀의 치료를 받아 두 다리를 보존할수 있었다.

그때 그 경력에 대해 이지민은 평생동안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지민의 아들 이성강의 말이다.

"저의 아버지는 166사단 498여단의 부대대장을 지냈습니다. 1944년 11월 22일,부대의 철퇴를 담보하기 위해 아버지는 전사 세명을 데리고 두 산사이에 놓인 도로 다리를 폭파하러 갔습니다. 폭파 도중에 아버지는 두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사들은 간이식 대나무 가마를 만들어 윤번으로 아버지를 업고 철퇴했습니다. 90여리 길을 줄달음쳐 12월 2일에 아버지는 귀양(貴陽) 도운관에 도착했습니다."

월터 프리드먼 오스트리아 의사

이지민의 치료를 담당한 오스트리아 의사 월터 프리드먼은 살뜰한 서비스와 더없는 책임감으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성강의 말이다.

"월터 프리드먼 의사는 아버지가 도착한 그 날로 환자 접수 등록을 마치고 아버지를 데리고 온 전사 3명의 숙식을 배치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월터 프리드먼 의사는 첫 회진을 왔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다쳤는가를 상세히 묻고나서 합동 진찰을 연계했습니다. "

이지민의 두 다리가 검은 색을 띠면서 부어나자 월터 프리드먼 의사는 지체없이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월터 프리드먼 의사는 그 시절에는 흔치 않던 엑스레이 설비를 통해 이지민이 오른쪽 다리 상처가 비교적 경한데 비해 왼쪽 복사뼈가 엄중히 손상돼 절단 위험이 있음을 판단했다.참답게 진단한 후 월터 프리드먼 의사는 최종적으로 보수치료를 하기로 결정했다. 골절된 다리를 수동치료법으로 제 위치로 회복시킨 후 석고를 고정해 천천히 낫게 하는 방법이였다.

월터 프리드먼 의사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회진하는 외 수시로 이지민의 병세를 물었다. 월터 프리드먼 의사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 이지민의 상처는 갈수록 호전되였다.

"두 주일이 지난 후, 붓기가 빠지면서 아버지 다리에 고정했던 석고가 느슨해졌습니다. 의사는 상처가 낫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두달이 지난후 적십자 구호 총대의 영독산(榮獨山)교수가 국립 귀양병원에서 의료진 양성반을 열었는데 아버지를 치료 성공사례로 들면서 제2차 회진시 현장에서 학원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습니다. 월터 프리드먼 의사는 특별히 전용차를 내여 친히 아버지를 부축해 차에 모신 후 귀양시로 향발하도록 했습니다."

몸조리 단계에 들어간 후 이지민은 지팡이를 짚고 병원내 이곳저곳을 다닐수 있게 되였다. 절단 우려로 근심에 가득찼던 이지민은 더없이 기뻐났다. 병실을 나온 그는 처음으로 도운관의 전경을 볼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대 규모에 이지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봉기때 도운관에는 5천여명의 의료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아버지는 이곳을 평범한 야전병원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다리를 쓸수 있게 되면서 지팡이를 짚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이곳 규모가 헤아릴수 없이 크다는것을 알게 됐습니다. 도처에 대나무로 만든 집이 들어섰는데 풀로 지붕을 얹었다고 합니다. 네면에 모두 비스듬한 용마루가 있어 비행기를 닮았다 해서 '비행기 집'이라 불렀다 합니다."

도운관 시절의 외국 의사들 (오른쪽 첫 사람이 월터 프리드먼 의사다.)

바로 이같이 허름한 조건에서 중국지원 국제의료팀이 소재한 중국적십자회 구호총대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간 20여만차의 수술을 진행했으며 골절환자 3만여명을 치료하고 입원 치료환자 200여만명을 돌보았다. 또 문진치료를 받은 군인과 군중은 450만명에 달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하면서 승리의 소식은 인츰 귀양에 전해졌다. 의료팀은 특별히 축하 플랜카드를 걸었으며 도운관 전체가 들끓었다. 전쟁이 결속되면서 중국에서의 중국지원 국제의료팀의 사명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이성강의 말이다.

"9월 중순, 적십자 총회의 통지에 따라 도운관 구호총대는 편제를 줄이고 부상자 사후처리 작업을 마무리 한 후 남경으로 돌아갈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이때 중국 지원 국제의료팀 성원들도 하나둘씩 중국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회복상황에 따라 도운관의 부상자들은 원 소속 부대로 돌아가거나 가까운 야전병원으로 전이돼 계속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지민은 "잠편 28단(暫編28團)"에 배치되였으며 대오를 따라 금북준의지역(黔北遵義地區)으로 전이했다. 이로서 이지민의 도운관 생활이 일단락 되였다. 이지민을 비롯한 모든 분산 안치 부상자들은 가장 유감스러운것은 바로 그들에게 두번째 생명을 준 의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못한채 각지로 흩어진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연간, 귀양정부가 항일전쟁 역사 수정사업 추진에 진력하면서 역사의 한페지에 그쳤던 도운관과 항일전쟁시기 이야기들이 점차 세인들에게 전해졌다. 이성강의 말이다.

"이 단락의 역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역사는 귀주에만 속하는것이 아니라 전 중국에 속합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역사기념지입니다. 그 것은 그 당시 이곳이 국가의 힘을 대표했기 때문입니다. 적십자의료총대는 도운관에서 각이한 전쟁구역으로 9개 분대를 파견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정신과 물질적 힘을 각지에 보낸 것입니다."

대나무로 지은 간이수술실

이성강은 외국의사들의 도움을 받은 환자의 후대로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우며 보수를 따지지 않고 중국인민들을 도와 항일전쟁을 마친 외국 의사들에게 경모의 정을 표달하련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창 나이에 그렇게 먼 곳에서 중국으로 왔는데 정말 감동적입니다. 이들은 실제행동으로 적십자 구호총대의 죽음에 처한 자를 구하고 부상자를 돌보며 박애의 정신으로 병사들을 동정하는 '구사부상, 박애휼병'(救死扶傷,博愛恤兵) '의 취지를 보여주었습니다. "

올해 8월, 귀양시는 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 대형행사를 가진다. 귀양시는 이미 중국지원 국제지원팀 성원들의 후대를 찾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도운관에 초청해 함께 역사를 기릴 예정이다. 이같은 소식을 듣고 이성강은 더없이 격동됐다.

"참 잘됐습니다. 전 그들을 청해 식사를 할것입니다. 얼굴을 맞댈 기회가 안되더라도 그들의 자녀와 연락이 닿는다면 저는 그들의 부모세대 이야기들을 묘사한 이 책을 그들에게 보낼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부모님 세대에 특별히 감사를 표하려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중국지원 국제의료팀성원과 그들의 도움을 받았던 부상자들은 모두 작고했지만 영광과 정열은 조금도 색바래지 않았다. 도운관 산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중국 지원 국제의료팀기념비가 세인들에게 그 불멸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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