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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은 사랑-불가리아 의사 감양도를 기리며
2015-08-07 17:26:31 cri

"금남의 첫 관문 도운관에서 역사를 파헤치다"의 저자 팽홍서(彭鴻書)

"제가 도운관(圖雲關)에 친근감을 갖고 있는것은 많은 외국우호인사들이 이곳에 온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1939년, 중국 항일전쟁이 발발하던 시기 한패의 부대가 도운관에 왔는데 그들은 중국지원 국제의료팀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운관에 온후 현지의 중국적십자회 구호총대에 편입되여 도운관에 주둔했습니다."

상황 설명에 나선 이는 올해 83세인 팽홍서(彭鴻書)이다. 그는 글 "금남(黔南, 귀주성 남부)의 첫 관문 도운관에서 역사를 파헤치다"의 저자이다. 도운관은 중국 서남부에 위치한 귀양(貴陽)에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국 서남지역의 중요한 관문이였다.

20세기 80년대, 역사에 대한 요해가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과정에 팽홍서는 역사속 중국지원 국제의료팀에 대해 알게 되였다. 중국지원 국제의료팀 성원들 중 일부는 중국 적십자회 구호총대가 소재한 도운관에 배치되였고 또 일부는 전국 각지의 전장에 파견되였다. 팽홍서의 회상이다.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국제의료팀 성원들은 무작정 중국에 왔습니다. 이들은 실로 찬송할만합니다. 국제의료팀 성원들은 개인실리를 따진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중국에서 7,8년씩 근무하면서 어떤 사람은 생명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 외국의사들이 중국에 온후 감명적인 이야기들이 수없이 발생했는데 이 가운데는 불가리아 의사 감양도(甘揚道)의 사적도 들어있습니다."

감양도는 원명이 이안토 카네티(Ianto Kanetti)이다. 그는 1910년 불가리아 카잔러크에서 태여났다. 1935년, 소피아대학 의학전업을 전공한 감양도는 체코와 독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핀란드 등 나라의 의사 30여명과 함께 영국 런던을 거쳐 중국에 왔다.

그때 전쟁의 화염이 자욱하던 중국은 생존환경이 더없이 어려웠다. 중국 적십자회 구호총대 주미옥(周美玉) 호리주임은 인터뷰중에 " 도운관은 주변에 큰 산이 둘러있었는데 모두들 초가에 거주했다. 3층짜리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비오는 날이면 비가 새여 맨 윗층의 사람은 우산을 펴야 했다. 쥐들이 집안을 꺼리낌없이 들락거렸고 일년에도 몇번씩 식량난을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그 때 도운관의 생활,근무 환경에 대해 감양도의 둘째 아들인 69세 보화(保華)는 이렇게 소개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요, 도운관에서 먹고 자는 모든것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곳은 항일전쟁의 전선으로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건 누구에게나 불가능했지요. 아무것이나 닥치는대로 다 먹었다고 해요. 지나치게 배가 고프면 참새를 잡아서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상 항일전쟁에 몸바친 국제의료팀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의식주행문제가 아닌 환자와 동료간 소통장애였다. 중국지원 국제의료팀의 역사에 대해 오래동안 깊이있는 연구를 했던 대빈무 (戴斌武) 박사의 소개이다.

"국제의료팀 성원들은 손짓과 표정,몸짓으로 구호총대 기타 인원들과 소통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번역을 할수 있는 사람과 영어를 구사할줄 아는 사람이 모두 많지 않았습니다. 작은 어종의 언어를 장악한 사람은 더군다나 적었지요. 근무과정에 부상자가 전부 중국의 병사들이라 양자간 교류는 더없이 어려웠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기 위해 이들은 별수없이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어 학습은 감양도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시작점으로 되였다. 도운관에서 감양도는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한 중국 간호사를 만났다. 그가 바로 후에 감양도의 아내가 된 장손분(張蓀芬) 이다. 귀주 (貴州)의 사계충(史繼忠) 문사전문가의 소개이다.

"장손분은 춤과 노래를 즐겼는데 체구가 작았습니다. 그는 매일 도운관에서 의료진에게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어느날 하루는 노래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주의깊게 살펴보니 바로 감양도였습니다. 그의 중국어 발음은 아주 어색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장손분은 감양도에게 노래를 배우려면 중국어부터 익히고 중국어를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장손분은 감양도를 도와 중국어를 구사할수 있도록 했습니다."

감양도(우)와 안해 장손분(좌)

공동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뜻이 통했던 두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가 각별히 가까워졌다. 1942년, 감양도와 장손분은 도운관 초가에서 혼례를 올렸다. 이듬해 그들의 장남이 태여났는데 이름을 "보중(保中)"이라고 지었다. 3년뒤, 그들의 둘째아들이 태여나 이름을 "보화(保華)"라고 지었다.

두 아들은 이들 부부의 사랑의 결실로 중화를 보위하고 평화를 수호하려는 마음을 두 아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담았다. 어린 시절 중국에서 생활한적있는 보화는 지금까지도 간단한 중국어를 구사할수 있다. 그는 우스개로 자신의 중국어 수준이 아버지의 뒤꽁무니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보화의 회억이다.

"아버지는 중국에 오기전 중국어를 한마디도 구사하지 못했는데 중국을 떠날때에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뽐냈습니다. 불가리아에 돌아온 후에도 아버지는 기회만 되면 중국의 신문,잡지를 열독했습니다."

1945년, 독일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동맹국의 승리로 종료됐다. 같은해 8월, 감양도는 처자식과 함께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갔다. 세계 반파시즘 투쟁에서 이룩한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불가리아 정부는 감양도에게 "공화국 훈장"을 수여했다.

사학민(謝學敏)은 중국 신화통신사 불가리아 주재 기자를 지낸적이 있다. 10년간 그는 여러차례 감양도를 취재했다. 사학민의 기억속에 감양도는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몸이 웅장하며 신념이 굳은 사람이였다. 사학민의 회억이다.

"감양도는 특별히 진보를 추구하던 청년이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선진사상의 영향을 받아 감양도는 전세계 그 어떤 민족도 타민족의 침략과 압박을 받는것을 용인할수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일본 침략자들의 도살과 능욕을 당하는것을 보면서 감양도는 외국적 의사들과 함께 중국에 왔습니다. 그의 신앙은 아주 견정했습니다. 바로 평등사회 구축을 추구하는것이였습니다."

불가리아에 돌아간후 감양도 부부는 중국과 불가리아 간 문화교류를 적극 추진했다. 감양도는 계속 의료사업에 종사하면서 의학원 교수를 지냈다. 장손분은 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첫 "불가리아어-중국어 사전"을 편찬했다.

1983년과 1989년, 감양도 부부는 다시금 중국땅을 밟았다. 이들은 오래전 자신들이 머물었던 도운관을 찾았다. 감양도 부부는 중국지원 국제의료팀 기념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영국 여의사 바라라 코너(高田宜,Barbara Courner)의 묘소에 헌화 했다. 보화의 말이다.

"전쟁은 두렵지만 항전과정은 사람들에게 만남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항일전쟁의 가장 힘든 시기에 만나 사랑이 싹트고 가정을 이뤘습니다. 지금 소피아에서 중국관련 문화 행사가 자주 열리고 있습니다. 저는 중국과 불가리아 사이의 연계가 지속되고 돈독해지는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2004년, 중국 지원 국제의료팀의 마지막 생존 의사 감양도가 소피아에 있는 저택에서 타계했다. 2010년 그의 안해 장손분도 작고했다. 중국에 있어서 감양도의 이야기는 어느 한 개인이나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나라와 한 연대의 축소판이다. 국경을 넘은 사랑은 세인들의 경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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