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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등우 장군을 기리며
2015-08-07 17:28:59 cri

조등우(趙登禹) 장군

조등우(趙登禹) 장군이 희생될때 그의 장녀 조학분(趙學芬)은 3살 미만이였다."7.7사변" 발발 78주년에 즈음해 기자는 80고령의 조학분과 인터뷰를 나눴다.

어릴적 아버지를 여읜 조학분은 일생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형상은 갈수록 또렷해졌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숭경의 마음도 갈수록 깊어졌다. 조학분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가장 큰 재부는 바로 "애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1937년 7월 28일, 국민혁명군 제 29군 132사단 사단장을 지냈던 조등우는 일본군의 포위습격을 당해 39세의 젊은 나이에 장렬히 희생됐다. 그가 희생된곳은 오늘날 베이징 풍대구 대홍문 (北京豊臺區大紅門) 부근이다.

"아버지가 희생될때 저는 3살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나이의 어린이한테 기억을 운운하기 어렵지만 저는 두가지 일만은 특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학분은 첫번째 기억으로 아버지가 자신과 오빠 학무(學武)에게 각기 군복 한벌씩 지어주었다고 말했다. 두번째 기억은 아버지가 희생된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용천사(龍泉寺)에서 아버지의 영구를 본 것이다.

조등우가 희생된후 그의 시신은 대충 파묻혔다. 며칠후 도연정(陶然亭)내 용천사의 승려들이 장군의 시신을 좋은 관에 모셔 사찰에 안치했다.

"아버지가 희생된후 어머니는 우리를 이끌고 용천사에 가서 아버지를 추모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넓은 나무걸상 두장우에 검은 빛을 뿌리던 관을 말입니다. 온 가족이 관앞에서 울음바다가 되였지요."

조학분의 회억에 따르면 남편을 더없이 그리던 어머니는 관을 열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 했다. 용천사의 주지는 장군은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다고 위안했다. 주지는 장군의 영구를 용천사에 모신후 밤마다 장군이 병사들을 훈련하는 소리를 들을수 있다고 말했다. 장군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후에 조학분은 줄곧 아버지가 희생될 때의 세부사항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많은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아버지가 희생될때 곁을 지켰던 호위병들도 찾아냈다.

"일본인들이 반역자로부터 정보를 얻은후 충분한 준비 끝에 아버지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부상한 후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은 살 가망이 없다면서 군인이 전장에서 숨을 거두는것은 본분을 다한 일로 비통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만 연로하신 어머님이 놀랄까봐 알리지 말것을 부탁했지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둘다 돌보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조상들을 뵐 면목은 있을 같다고 말했다 합니다."

용천사의 승려들은 조등우 장군의 영구를 9년간 비밀리에 지켜왔다. 관목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해마다 관에 칠을 올렸는데 관은 줄곧 깨끗하고 빛이 났다.

조등우(趙登禹) 장군의 딸 조학분(趙學芬)

1946년 7월 28일,조등우 장군이 희생된지 9년만에 이종인(李宗仁)과 손련중(孫連仲)장군이 국민정부를 대표해 북평 중산공원에서 동림각(佟麟閣)과 조등우 장군을 위한 성대한 국장(國葬)을 치렀다.

29일, 조등우 장군의 영구가 용천사로부터 사람들의 호송을 받으며 노구교(盧溝橋) 서쪽 철도교측의 산비탈에 안장되였다. 그때 조씨네 가족은 사처에 널려 있었는데 국장을 치를때 친족이 한명도 없었다. 동림각, 조등우 가족은 사이가 아주 좋았다. 동림각의 아들 동병(佟兵)이 조동우를 위해 조기를 들었다.

조등우의 묘지는 노구교에서 2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조학분은 아버지가 여전히 노구교를 지키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7.7사변"이 발발하기 전 조등우는 이미 장성항전(長城抗戰)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조학분은 여러차례 아버지가 피흘려 적을 무찌르던 옛 전쟁터를 찾아갔다. 현지 동향인들은 장군의 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격동하여 조학분의 손을 잡은채 "자네 아버지는 대 영웅이라네. 가세, 아버지가 놈들을 무찌르던 곳으로 안내해주지."라고 말했다.

조등우는 여단장의 신분으로 1933년 장성항전에 참가해 명성을 떨쳤다. 일본군의 무기설비가 훨씬 월등하고 지리적으로도 우세해 중국군은 손실이 극심했다. 조등우는 대도대(大刀隊)를 이끌고 일본 포병진지 마천령(摩天嶺)을 야간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일본군의 사상 손실이 상당했지요. 웬 영문인지를 알기도 전에 머리가 나 뒹굴었으니까요.아버지는 그때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부대를 이끌고 진공했습니다. 식칼 두자루를 휘둘렀는데 칼날이 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후에 29군 '대도대'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지요. 목이 잘릴가 두려워 쇠로 만든 목도리를 둘렀다고 합니다."

조학분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가장 큰 계시는 우리는 중국인이며 개인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아무리 큰 곤난앞에서도 머리를 숙여서는 안되며 단결 노력하면 모두 극복할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등우(趙登禹) 장군

조학분과 그의 어머니는 새중국이 창건된후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조씨네 낡은 저택을 정리한후 그들에게 돌렸으며 "혁명희생군인가족 영광기념증"을 발급했다. 기념증은 "베이징 제 00080호"로 편입됐으며 모택동(毛澤東)읜 친필 서명으로 되였다.

오늘날, 베이징에는 "조등우로"가 있는가 하면 통주구(通州區)에는 "조등우 거리"가 있으며 풍대구에는 "조등우 학교"도 섰다. 산동 하택(山東河澤)에 있는 조등우의 옛집에는 조등우기념관도 세웠다.

서북군에 있을때 생활이 검소했던 조등우는 후대들에게 재산을 별로 남겨주지 못했다. 조학분은 아버지가 남겨준 가장 큰 재부가 바로 "애국"이라고 말한다.

조학분은 국가에서 "9.3승리 기념일"과 "12.13 남경 대학살 기념일"을 설치한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한 민족은 역사를 명기해 국가를 더욱 강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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