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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석굴: 사라져가는 선비족
2015-08-13 15:43:58 cri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굴 10중 두번째인 운강석굴(雲岡石窟)은 4대 중국석굴 중 규모가 가장 웅장하고 석굴의 내용이 가장 풍부한 석굴이다. 운강석굴은 또한 멀어져가는 선비족의 뒷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기 453년에 담요(曇曜)라는 스님이 당시 북위(北魏)의 수도인 평성(平城) 북쪽의 주무산(周武山)에 이른 뒤로부터 494년에 효문제(孝文帝)가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길때까지 수십년동안 이 곳에서는 돌 깎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담요의 굳은 신앙과 황실의 후원으로 장장 1km나 뻗은 예술의 걸작 운강석굴이 조성됐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석굴은 45개이고 그 속에 보존된 석상은 5만여기에 달한다.

운강석굴은 2001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운강석굴을 이렇게 평가했다. "운강석굴은 5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중국 불교석굴예술을 대표한다."

운강굴은 음미할만한 민족인 선비족과 갈라놓을수 없다. 싸움을 즐기는 선비족이 중국을 통일하고 북위를 세운 후 앞서가는 문명을 받아들였다. 호방한 선비족의 성격은 섬세한 문명에 정복되어 문명으로 가는 길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중화민족의 구성원으로 융합되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서기 386년부터 534년까지 짧은 시간동안 존속했지만 최고로 눈부신 유산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대범하고 힘있는 필치의 위비체(魏碑體)이다. 이 글자체는 역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본땄고 컴퓨터세상인 오늘날에도 메인폰드로 남아 있다.

북위는 석각예술분야에서 더욱 전무후무의 성과를 거두었다. 문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효문제가 편 한화(漢和)정책이 석굴에 반영되어 인물의 모양이나 의상이 모두 한(漢)족을 본따고 있다.

그로부터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청수한 몰골의 인물상이 중국에 널리 퍼져 중국북방에 조성된 석상은 거의 모두가 그와 유사한 형상을 유지한다.

이른 아침 운강석굴의 입구에 이르면 푸른 하늘아래 고건물의 지붕에 덮힌 청색의 오지기와가 유난히 눈부시고 광장에 심어진 푸른 식물이 주무산의 짙은 쪽빛과 어울려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이른 아침이라 관객은 거의 없고 광장의 주인은 즐겁게 뛰노는 꼬마와 열심히 태극권을 하는 노인이다. 1500여년전 운강석굴이 조성될때 이 곳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산체에 바리때가 즐비하고 수많은 장인들이 땀을 비오듯 흘리지 않았을까.하지만 세월은 이 모든것을 삼켜 어젯날의 모습은 벌써 사라지고 산체에 가득한 석굴만이 남아 있다.

운강석굴은 관객들에게 과도할수 있는 아무런 공간도 주지 않는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문을 지나 짧은 통로를 거치면 바로 눈앞에 운강석굴의 대표인 제5석굴과 제6석굴이 나타난다.

제5석굴의 북쪽벽에는 운강석굴 최대의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좁은 공간에 서서 머리를 들고 17m 높이의 불상을 바라보면 스스로 불조의 위엄이 느껴지고 인간의 왜소함도 뒤따른다.

제6석굴은 더욱 석각예술의 극치를 자랑한다. 사면의 모든 벽에 빈 공간 하나없이 석각물이 즐비하다. 미소를 띤 불조와 보살, 위무당당한 호법신 등을 중심으로 석굴 중앙에 내리 드리운 기둥과 사면의 벽에 불조의 일생을 그대로 펼쳐보이고 있다.

세자로 태어나서 말을 타고 입성하며 궁중에서 소일하다가 세상을 여행하고 그 뒤에는 출가해서 산속에서 도를 닦아 터득한 불조의 일대기가 생동하고 완정하게 펼쳐져 있다.

제9석굴부터 제13석굴까지는 오화동(五華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청(淸)나라때 석상에 다양한 색을 입혀 이 곳의 불교세상은 오색이 찬연하다. 이 곳에 들어서면 마치 흑백영화를 보다가 컬러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중 제12석굴은 화려한 파티장이다. 높은 석각예술로 인해 크라이막스의 파티가 그대로 굳어져 있다. 천정에는 비파와 피리, 북 등 온갖 악기를 든 수십명의 악사들이 옷깃을 날리며 하늘을 날고 불단에 자리 잡은 불상도 음악에 도취된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바람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다시 천정을 바라보면 악사들의 옷깃이 여전히 바람에 날리는 듯 하다. 그 순간 모두들 천국에 들어선 듯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제16석굴부터 제20석굴까지가 바로 가장 먼저 조성된 석굴인 담요5굴(曇曜五窟)이다. 웅장한 이 곳의 석상은 짙은 서역의 분위기를 띤다. 몸에 가사를 두르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불상은 오늘날 인도와 태국에서 많이 볼수 있는 모습이다.

그 중 한 석상은 상의를 걸치고 가슴쪽에는 오늘날의 넥타이와 비슷한 띠를 두르고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의상은 당시 한족의 옷이었다고 한다. 어깨를 드러낸 의상과 넥타이와 유사한 의상은 운강석굴의 조성역사를 말해주기도 한다.

제18석굴의 불상 양쪽벽에는 10대 제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두 손을 합장한 제자도 있고 한 손을 가슴에 댄 제자도 있는데 모두가 그토록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어 높은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이런 석상들은 또한 단순하게 벽체에 줄지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혹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입체감을 보여주는데 마치 돌벽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듯 혼연일체를 이룬다.

운강석굴 최대의 불상인 운강대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키 높은 불상은 풍만한 몸매를 하고 약간 들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듯 위엄을 보이는 동시에 자애로움을 잃지 않는다.

특히 대불의 눈빛은 자애로움과 예지로 빛나서 속세를 꿰뚫어 보고 번뇌를 쓸어버리는 듯 하다. 그 눈빛을 마주하면 불법을 이야기하는 불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하다.

운강대불의 뒤에는 천불상이 즐비하다. 부드럽게 하늘을 나는 악사와 타오르는 불빛 등이 어울려 떠들썩해 근엄하고 자애로운 불상이 더욱 대조적으로 안겨온다.

불상앞에는 어린 나무가 자라나 딱딱해보이는 석굴에 부드러움을 가미한다. 저 멀리에는 키 높은 나무가 서서 생명의 룰을 보여준다. 운강석굴을 조성한 담요는 이름 석자만 남겼고 수많은 장인들은 자신의 이름마저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예술의 걸작은 영원하다.

운강석굴의 정수는 제5석굴과 제12석굴에 집중되어 있다. 제1석굴에서 부터 제4석굴까지는 세월속에 많이 풍화되어 있는데 제3석굴의 불상과 보살상은 당(唐)나라 후반에 조성한 것으로 다른 시기의 석각과 비교해서 볼수 있다.

아침 일찍 도심을 출발해 운강석굴이 문을 열기 전 석굴에 도착한 후 석굴앞 가게에서 주무산의 아침을 보면서 조식을 먹는다. 석굴에 들어선 후에는 순서대로 보지 말고 먼저 담요오굴을 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관객이 몰려들기 전이라 마음껏 기념촬영을 할수 있다. 이른 아침에 출발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아예 오후 3시뒤에 보는 것이 더 좋다. 석양이 비출때 운강석굴은 세월의 분위기를 더욱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운강석굴은 중국 산서(山西)성 대동(大同)시에 위치해 있다. 이곳으로 가려면 다양한 교통편으로 대동에 이른 다음 대동열차역에서 운상석굴행 열차를 타거나 관광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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