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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국가당안국,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기록 선집 제2집 공개
2015-08-18 09:34:11 cri

중국 국가당안국은 16일 공식사이트에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당안 선집 제2부--"일본측이 당시 정리한 자료"를 발표했다.

제2부에는 6부의 자료가 망라했다.

제1부는 일본군 화중(华中)파견 헌병대의 "남경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1938년 2월 19일)로 길림성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이 당안은 소화 13년(1938년) 2월 19일 일본군 화중파견대 사령관 오오끼(大木繁)의 "남경(南京)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에 속하는데, 소화 13년 2월 1일부터 10일까지의 남경과 주변지역 각 시, 현 군대의 "위안시설" 상황을 종합했다.

이 가운데는 남경, 하관(下关), 구용(句容), 진강(镇江), 금단(金坛), 상주(常州), 단양(丹阳), 우호(芜湖), 녕국(宁国) 등 여러 지역 일본군의 수량, "위안부"의 인수, "위안부" 1인에 대응하는 병사 숫자, "위안부"의 구성, 10일내에 "위안소"를 이용하는 병사 인수 등 상황을 망라했다. 당안의 기재에 따르면 일본군은 침략부대에 비례 있게 "위안부"를 배비했다. 남경 당시의 일본 주둔군은 2만 5천명이었으며 "위안부"는 141명으로 "위안부" 1명이 상대해야 하는 병사가 178명이었다.

제2부는 일본군 화중파견 헌병대의 "남경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 (1938년 2월 28일)으로 길림성당안관에서 제공했다. 이 당안은 소화 13년(1938년) 2월 28일 일본군 화중파견 헌병대 사령관 오오끼의 "남경헌병대 관할구 치안회복상황에 대한 조사보고(통첩)"에 속한다. 보고는 도합 12개의 내용으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서 제11조항은 서식 형식으로 남경헌병대 관할구 각 시와 현 군대의 "위안부시설" 상황을 종합했다. 서식의 종목은 2월 29일의 보고 서식과 기본상 같았다.

서식에서 우호의 "위안부"가 10일내에 84명 늘어났으며 109명의 "위안부" 가운데 중국인 "위안부"가 25명, 조선인 "위안부"가 36명으로 우호의 "위안부" 총 숫자의 1/2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강에서 2월 중순 "위안소"에 진입한 일본군은 8,929명으로 상순의 5,734명보다 3,195명 늘어났다. 당안은 또한 단영에서 2월 중순 "위안부" 1인에 대응한 병사는 267명이며 "위안부"가 적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위안부"를 모집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3부는 일본군 북지나(北支那)헌병대의 "위안소의 설비증가 등 문제에 대한 보고(1943)"으로 하북성(河北省) 진황도시(秦皇岛市)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대량으로 "위안부"를 "이용"했고 또 "위안부" 생존상태가 열악했기 때문에 그중 적지 않은 "위안부"가 성병에 걸리고 일본군에 전염시켰다. 일본군 북지나 헌병대의 "위안소의 설비증가 등 문제에 대한 보고"에 따르면 "성병으로 인한 독해는 아주 심각하여 전투력을 소모시켰다." 그리하여 "위안소는 반드시 제거설비와 용구를 장착해야 한다."

제4부는 관동 헌병대의 "통신검열월보"에 기재된 일본군인 서한에 반영된 일본군의 "위안부" 노역 죄행(1941년)으로 길림성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일본군은 점령구에서 아주 엄격한 서한 검사제도를 채용했다. 재 중국 일본군과 가족 사이의 서한은 헌병대 검사관에 의해 비밀리에 개봉되었으며 전장의 진실한 상황을 기록하거나 "군심에 영향을 줄 수 잇는" 서한이라면 소각되었다. 그러나 소각되기 전에 검사관은 서한 내용을 베껴서 서류로 남겼다. 서류로 남긴 이런 서한에는 일본군의 "위안부" 노역 그리고 "위안소"의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편지 한통은 개봉(开封) 주둔 일본군 제84야전군 와타나베(渡边)부대의 토무라 에이유우(户村英雄)가 소화 16년(1941년) 2월 1일 도쿄 요시다 호(吉田保)에게 보낸 서한 절록에 속한다. 이 편지는 군대가 관리하는 "위안소" 그리고 "위안부"가 부대를 따라 이동하는 특수한 생활상태를 기록했다. 서한은 "소각" 처리되었다. 즉 서한에 있는 "위안부" 내용이 "뚜껑"을 열었기 때문이다.

편지 다른 한건은 개봉에 주둔하는 하라다(原田) 부대 겐죠(见城)부대 하기와라(萩原)부대 본부 키타호리 코우치(北堀考治)가 소화 16년(1941년) 사이타마(埼玉)현 히키(比企)군 미야마에(宫前)촌의 코바야시 노기쿠(小林菊野)에게 보낸 서한의 절록으로, 젊은 일본군인이 동정 유지를 바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지만 부대에서 자포자기하고 군대 전투지역의 "위안소"에서 조선 "위안부"를 찾아 쾌락을 추구하다가 나중에 성병에 걸린 기형적인 생활상태와 마음가짐을 반영하고 있다. 서한은 "제거" 처리된다. 즉 서한에서 해당 "위안부" 내용을 "삭제"하는 것이다.

제5부는 "헌병월보"에 기재된 인도네시아 쟈바에 군대 "위안소"를 설립한 당안(1943년 3월 5일)으로 길림성 당안관에서 제공했다. 1944년 3월 5일, 일본 쟈바헌병대 본부 "헌병월보(1월)"은 제3선박국 군가족이 허용을 받지 않고 군대 "위안소"에서 쾌락을 추구하였으며 욕야카르타(日惹) 철도공장 일본군 고용인원이 술 뒤끝에 군대 "위안소"에서 "위안부"를 구타하고 쟈바 주둔 27비행여단의 한 일본 육군병사가 술 뒤끝에 군대 "위안소"에서 "위안부"를 구타하고 돗보(独步)1567부대 본부 육군 1등병이 군대 "위안소"에서 쾌락을 추구한 등 상황을 기록하고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쟈바에 군대 "위안소"를 설립한 사실을 까밝혔다.

제6부는 일본군 위안소 경영 등 상황에 대한 정보(1944~1945)로 내몽고자치구당안관에서 제공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하이랄(海拉尔), 만주리(满洲里)의 헌병대 등 일본군 위안소 경영 상황을 기록한 정보이다.

일본 관동헌병대 하이랄 분대의 다마무라(玉村) 헌병보가 수집한 정보는 하이랄시 위안소의 영업상황을 기록하고 있는데, 군비부족으로 위안소 경영이 잘되지 않고 있었다.

이케우치(池内)병조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군대 위안소의 설치로하여 하사 장병들이 지방식당을 찾아가는 흥미가 줄어들었으며 차강에 주둔하는 일본군 1백여명이 만주리에 주둔하는 부대와 함께 2백여명이 군대 위안소에 집중되었다.

[글:신화사, 번역: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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