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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승리 70주년 특별 기획 (1)
2015-08-19 11:07:24 cri






진행자 인사말
시간에는 먼저 우리 청취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 중국 조선족 사회 주요 뉴스를 전해드린다.

조선어문 번역전문가회의 연길서 소집

길림신문에 따르면 중국민족어문번역국에서 주최하고 길림성연변조선어문사업위원회(번역국)가 주관한 《2015년 중국민족어문번역국 조선어문 번역전문가 업무회의》가 8월 10일 연길시에서 소집되였다.

개막식에서 연변주정부 조경국 부비서장이 축사를 하고 중국민족어문번역국 김영호 부국장이 이번 업무회의 주요의정과 주의사항에 대해 설명하였다. 회의에는 중국내 조선어문 관련 출판사, 언론사와 연구소, 번역국의 조선어문번역전문가 40여명이 참가하였다.

12일까지 3일간 개최된 이번 회의는 부분적인 새 어휘의 사용에 대해 토론 심의한후 전문가학자들의 의견과 건의를 청취하고 번역업무 교류를 진행했다.

제1기 동북아여름국제미술작품전 개최

제1기 동북아여름국제미술작품전 및 제5기 남북코리아 국제미술작품전 개막식이 지난 15일 연길시에서 열렸다고 연변방송이 보도했습니다.

이번 국제미술작품전은 길림성황미술관과 연변화양실업집단에서 주최했습니다. 현장에는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시즘전쟁승리 70주년을 주제로 한 중국화, 서양화, 수채화, 도자기 등 170여종의 작품이 전시됐습니다.

제1기 동북아여름 국제미술작품전 및 제5기 남북코리아 국제미술작품전은 주제작품전, 세미나 등 형식으로 미술인들에게 교류와 문화예술을 담론할수 있는 예술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연변미술가협회 임파 부주석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후대들에게 미래를 기억하고 앞으로의 평화를 노래하는 의미에서 이번 전시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다채롭고 감상할 의미가 있습니다. 미술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정신적 향수를 느낄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개막식에는 국내 유명한 화가, 한국 미술계 유명인사 도합 120명이 참석했습니다. 연변가무단 한선녀 가수의 축가와 연변대학 예술학원 안해월 교수의 살풀이 무대도 마련됐습니다.

이번 미술작품전은 9월 15일까지 계속됩니다.

길림성 씨름팀 5개 1등상중 3개 독판

길림신문에 따르면 일전에 있은 전국소수민족전통경기대회에서 길림성의 조선족선수들이 조선족씨름 5개 종목중 3개 1등상을 독판쳤다. 그중 김해림이 87킬로그람급 이상 경기에서 요녕선수를 제끼고 우승을, 오민규가 74킬로그람급에서 산동선수를 넘어뜨리고 우승을, 고광택이 52킬로그람급에서 티베트선수를 이기고 우승을 하며 큰 영예를 안았다.

제11회 중국조선족청소년음악제 시상식 연길서… 최혜진 대상 수상

연변일보에 따르면 지난 13일 제11회 중국조선족청소년음악제 및 "우리네 동산" 제20회 창작동요제 시상삭이 연변TV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펼쳐졌다.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주교육국, 연변라지오텔레비전방송국의 공동주최로 펼쳐진 중국조선족청소년음악제는 청소년음악애호가들에게 장끼를 보여줄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고 아동문예창작일군들의 창작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조선말 동요의 발전과 보급을 추진하는데 일조하려는데 취지를 두였다.

이번 경연에는 연변과 베이징, 길림시, 목단강시 등 지역 170여개 팀의 500여명 꼬마가수들이 참가했다.최종 최혜진이 음악제 대상을 받고 렴동훈 등이 금상을, 룡정시북안소학교 9명 중창 등이 은상을, 연길시청소년활동센터 18명 중창 등이 동상을, 김현정 등이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외에도 지도교원상, 작품상을 시상했다.

행사 관련 록화프로는 10월 1일 국경절에 즈음하여 연변텔레비전 뉴스종합채널과 연변위성채널을 통해 시청자들과 대면하게 된다.음악제에서 창작된 26수 우수동요는 잇달아 MTV로 촬영, 제작되여 방송된다.

중국조선족"항일가곡선집"출판기념회 연길서

중국조선족<항일가곡선집>출판기념회가 일전에 연길에서 열렸다고 연변방송에 보도했습니다.

<항일가곡선집> 주필은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이며 음악평론가인 남희철 선생이 맡았습니다. 항일가곡선집에 수록된 노래의 권위성과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로 항일간부 리민과 로 해방간부 서영화 ,동희철이 고문을 맡았습니다.

<항일가곡선집>은 노래의 객관성과 원시성을 보존하는 원칙하에 원문을 수정하지 않았고 노래마다 악보뒤에 출처를 밝혔습니다. 항일가곡의 맥락으로 놓고보면 민족주의계렬과 공산주의계렬 항일음악으로 나누었습니다. 그중 민족주의계렬 항일음악은 의병음악,독립군음악,광복군음악 등 음악이 있고 공산주의계렬 항일음악은 유격대음악,홍군음악,항일련군음악,팔로군음악 등 음악이 있습니다.

항일가곡선집 주필을 맡은 남희철 교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금년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우리들이 항일시기를 잊지않고 항일투사를 기념해서 편찬한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독립군,광복군,유격대 등을 포함해서 이 분들이 창작하고 불렀던 노래가운데 193곡을 골라 책에 수록했습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항일전쟁의 나날에 조선민족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일본 침략자들과 결사전을 해왔고 군민의 항일의지와 용기를 더해주고저 수많은 항일가곡들을 창작해 불렀습니다. 남희철교수는 이번 기념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항일가곡을 사랑하고 대를 이어 애창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랐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조선족 사회 뉴스를 보내드렸다. 노래 한곡

[중국사회] 항일전쟁승리 70주년 특별 기획 (1)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일을 맞으며 일전에 본 방송국 특별취재팀이 중국 길림성 연변을 찾아 항일 유적지를 방문하고 인물들을 인터뷰하면서 연변인민들의 빛나는 항일역사를 되새게 보았습니다.

그럼 이 시간에는 항일전쟁승리 70주년 특별기획 1부를 보내드립니다.

본 방송국 강옥 기자가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예술극장"에서 일어났던 70년 전의 탈옥사건

2013년 5월, 연길 도심 남쪽에 위치한 연변예술극장(延邊藝術劇場,현 연변노동자문화궁) 주변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낡은 집 개조공사를 벌이던 현장에서 불현듯 녹이 뻘겋게 쓴 족쇄가 발견된 것이다. 주변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섬뜩한 물건은 대뜸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중공 연길시위 당사연구실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그때 가슴이 널장 뛰듯 쿵쿵 하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음향1)

"바로 저쪽 공사 현장에서 족쇄가 발견됐지요. 족쇄는 녹이 쓴 상태였는데 부순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 문물은 지나간 투쟁사의 견증이고 역사의 견증입니다. 이는 과거 이곳에서 아주 잔혹한 투쟁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힘 있게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70여년 전, 이곳에는 악명 높은 연길감옥(延吉監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민국 13년(1924)에 세워진 연길감옥은 당시 "길림성 제4감옥"으로 명명되었다. 부지면적이 1만 ㎡로 당시 연변지역에서 제일 큰 감옥이었다. 연길감옥은 훗날 중경(重慶)의 백공관(白公館)과 사재동(渣滓洞)에 버금가는 "악마의 소굴"로 불렸다. 백공관과 사재동을 둘러싼 "붉은 바위"이야기는 동명의 소설 "붉은 바위"에 나오는데, 1940년대 말 중경의 국민당 감옥에 수감된 공산당인들의 옥중 투쟁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누군가 일부러 파괴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감옥 옛 터의 족쇄… 그렇다면 백공관과 사재동에서 일어났던 "붉은 바위(紅岩)"의 이야기가 이곳에서도 일어났던 것일가?

연길감옥의 "붉은 바위"의 이야기

(음향2)

"'9.18'사변이 발발한 후, 일본침략자들은 이 감옥을 접수하고 '연길모범감옥'이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른바 '모범'이란 혁명자(반일투사)를 진압하는 수단이 보다 잔인했음을 의미하지요."

주연휘 연구원은 그때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30년대, 일제와 괴뢰 만주국은 "반만항일" 투쟁을 진압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체포된 반만항일(反滿抗日) 인원들은 일부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압송되었고 일부는 연길감옥과 길림감옥에 수감되었다.

"9.18"사변 이후, 무려 1,000명에 달하는 반일투사가 연길감옥에 감금되었다. 이 가운데는 중국공산당 왕청현 (汪淸縣) 당위원회 초대 서기였던 김훈(金勳)도 들어있었다.

김훈은 체포된 후에도 감옥에서 항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훈은 감옥에 중공 연길감옥 지하당위원회를 설립하고 서기 직무를 맡았으며 감옥 투쟁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이때 연길감옥에는 두 차례의 탈옥투쟁이 일어나지만 변절자의 밀고로 모두 실패했다. 수감자들에 대한 감시는 보다 더 심해졌으며 옥중 투쟁은 보다 더 어려워졌다.

이 무렵 김명주(金明柱)라고 부르는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훗날 김명주는 연길감옥의 집단탈옥 사건에서 제일 관건적인 인물로 되고 있다. 운명의 작간인지 모르지만, 이때의 김명주는 공산당 조직과 별로 연관이 없었던 인물이다. 기어이 이때의 그와 공산당 조직을 연관시킨다면 어릴 때 공산당 소년선봉대(少年先鋒隊)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었다고 할까…

김명주는 옛 소년선봉대 대장으로부터 석유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 밤 마을 류(劉)씨 성 지주의 가옥과 낟가리에 누군가가 불을 놓았다. 현장에서 석유 병이 발견되면서 김명주는 졸지에 방화범으로 낙인 되어 연길감옥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연길감옥에서 김명주가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인물로 떠오른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김철수 (金哲洙) 연변박물관 원 부관장 겸 연구원은 그때 그 당시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음향3)

"'죄수'들이 하루는 하남다리에서 '구렁창'을 가시게 되었는데 한 일본여인이 아이와 개를 데리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먹던 기름떡이 땅에 떨어졌는데 여인이 죄수들을 향해 그 기름떡을 던져 주었지요. 개보다도 못하다는, 인격모독이지요. 성질(성격)이 사나왔던 김명주는 삽으로 흙물을 퍼서 그들을 향해 냅다 뿌렸지요. 급기야 큰일이 난 것입니다. 일본사람을 무시했다고… (김명주가) 간수들에게 죽게 얻어맞고 감옥에 끌려 들어왔는데 상황이 형편없었지요."

"구렁창"사건은 김훈을 비롯한 수감자들의 극도로 되는 분개를 자아냈다. 연길감옥 중공 당 조직은 "구렁창"사건을 발단으로 단식투쟁을 단행했다. 이들은 김명수의 상처를 치료하고 야만적인 폭행을 가했던 이(李)씨 성 간수를 면직시킬 것, 병상의 수감자들을 하루속히 치료해줄 것, 밥을 깨끗이 하고 양을 증가하며 감방안의 대우를 개선할 것 등 세 가지 요구를 제기고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끝까지 단식투쟁을 계속할 결의를 다졌다.

단식투쟁 3일차 되던 날, 감옥당국이 부득불 이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기로 하면서 단식투쟁은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구렁창"은 더러운 오물이 빠지지 않고 썩어서 고여 있는 바닥이라는 뜻을 가진 "시궁창"의 방언이다. 이때 인간세계에서 "시궁창"으로 몰려 버림과 모역을 받은 김명주의 감수는 남달랐다. 그는 이 단식투쟁을 거쳐 중공 당 조직의 힘을 또 한 번 절실히 느끼게 된다. 더구나 김훈 등 항일투사의 직접적인 교육과 솔선적인 영향은 그를 이때부터 확고한 항일신념을 가진 "투사"로 변신하게 한다.

김명주가 훗날의 감옥 탈옥사건에서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동북지역을 진감한 연길감옥의 탈옥사건

감옥당국은 수감자들이 다시 조직되어 사단을 만들까봐 두려워 한 달에 몇 번씩 감방을 옮기게 했으며 정치범들의 감방은 더욱 자주 옮겼다.

그러나 옥중 수감자들의 항쟁의 열기는 결코 식지 않았다. 이때 바로 연길감옥에서 유명한 노래 "연길감옥가(延吉監獄歌)"가 탄생하는 것이다.

훗날 "연길감옥가"의 작사자 이진(李進)은 무거운 족쇄를 찬 채 이 노래를 부르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음향4 )

"바람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기에 폭탄차고 날뛰던 몸이

연길감옥 같힌 이후 몸은 시들제

혁명에 끓는 피야 언제 식으랴

감수놈이 웨치는 소리 높고

때마다 먹는 밥은 수수밥이라

밤잠은 새우잠 그리운 꿈에

나의 사랑 여러 동지 그립구나. "

……

사실상 이 시기 항일투사 윤범(尹範), 신춘(申春) 등이 육속 살해되고 오세국(吳世國)도 감방에서 끌려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는 등 연길감옥의 당 조직은 전례없는 파괴를 당하고 있었다.

이에 앞선 1934년 겨울, 연길감옥 옥중 투쟁의 핵심지도자로 있던 김훈도 적들의 암해로 희생되었다고 김철수 연구원이 설명한다.

(음향5)

"(단식투쟁이 승리한지) 얼마 안 되어 (그해 겨울) 일본군이 연길 부르하통하의 하남다리를 짓는 위에서 김훈을 얼음구덩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김훈 등 지도자들이 연이어 희생된 후 연길감옥 지도자의 중임은 김명주의 두 어깨위에 떨어졌다. 김명주는 김훈 등의 부탁을 명기하고 겉으로는 표현이 좋은 척 하면서 집단 탈옥의 기회를 노린다.

1935년의 초여름, 김명주는 우연히 간수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그 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음향6)

"단오절에 3-5일간 운동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때가 되면 감옥에 몇몇 당직 인원만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이 경기장에 모이고 저녁에는 술판도 벌어진다는 정보였습니다. 김명주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일하는 틈을 타서 이영춘(李英春)과 이태근(李泰根) 등 옥중의 몇몇 당조직 지도자들과 만나 단오절 운동회가 열리는 두번째 날 (음력 5월6일) 오후에 거사를 치르기로 하고 17명에 달하는 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때 거사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긴다. 음력 5월 6일, 일부 사람들에게 동요정서가 나타나면서 거사는 부득불 다음날로 미뤄지는 것이다.

음력 5월 7일 오후 3시, 점심 후 결사대 대원들은 신호를 주고받으며 탈옥준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목조장(木造場)에서 훔친 조막 도끼로 족쇄를 부순 후 다시 삼노끈으로 매놓고 눈가림을 했다.

이때 그들은 갑자기 감방에 들어온 왕(王)씨 성의 간수를 결박하고, 또 당직 차로 찾아온 일본인 지도관을 처결하며 이어 감방 문 어구의 보초병을 처리하고 간수실의 간수들을 처단하며 소총 50여 정과 수류탄 10여개를 노획한다.

이때부터 김철수 연구원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영화를 방불케 하고 있다.

(음향7)

"앞에서 이미 한사람은 일본 지도관의 권총을 잡고 나가면서 밧줄을 쥐고, 김명주가 옆으로 도끼를 든 채 간수를 압송하면서 나갔습니다. 간수가 달아나면서 소리치는 바람에 총을 쏘았지요. 총소리가 나니까 다 알게 된 것입니다. 김명주는 다시 도끼를 쥐고 감방으로 뛰여 들어가 다른 감방문도 다 열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감방에서 권총을 들고 나오는 감옥장과 마주쳤지요. 더없이 긴장한 상태인데 뒤에 있던 사람이 간수의 총으로 감옥장을 쏘아 눕혔지요…"

미구에 탈옥에 성공한 이들은 적들의 추격목표를 줄이기 위해 두 갈래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항일근거지를 찾아가기로 한다.

김명주 일행은 모아산(帽兒山) 고개를 넘을 즈음 일본 수비대의 추격을 받았다. 탈옥 3일째 되던 날, 그들은 적들과 조우하면서 3차례에 달하는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이때 김명주는 여러 곳에 부상을 당하며 왕덕발(王德發)과 이영춘 (李英春) 등은 다른 사람들의 철수를 엄호하다가 희생되었다.

예술전당에 세워진 영원한 기념비

김명주가 인솔한 탈옥자들은 마침내 일본군의 추격에서 벗어나 안도(安圖) 차창자(車廠子) 항일근거지에 도착했다. 며칠 후 이태근이 인솔한 다른 한 갈래의 탈옥자들도 근거지에 이르렀다. 이때 두갈래 대오의 인원은 50명 미만으로 탈옥 당시의 절반도 안 되었다고 전한다.

(음향8)

"연길감옥 탈옥투쟁은 동북지역에서 공산당이 영도한 탈옥투쟁 중 유일하게 성공한 탈옥투쟁입니다. 이는 동북지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북인민들의 항일투지와 승리신심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연길감옥 탈옥투쟁승리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제 날 높은 담과 철조망이 둘러섰던 연길감옥 옛터에는 현재 인민의 예술전당으로 불리는 연변예술극장이 들어섰다. 예술극장 주변에는 수양버들이 휘늘어졌고 극장 앞에는 춤을 추는 조선족 여성의 조각상이 자리를 잡았다. 2000년 6월, 이곳에는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가 세워졌다.

(음향9)

"영용무쌍한 투사들을 부각한 이 조각이 바로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입니다. 이곳 연길감옥투쟁 유적지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비문은 연길감옥투쟁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문 아래에 새겨진 것이 바로 이진이 작사했던 '연길감옥가'입니다."

연길감옥 옛터로 우리를 안내하던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기념비 앞에 그린 듯 잠깐 서있더니 조용히 "연길감옥가"의 가사를 읽기 시작했다.

(음향10)

"바람 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 기에 폭탄차고 날뛰던 몸이

연길감옥 같힌 이후 몸은 시들제

혁명에 끓는 피야 언제 식으랴..."

허공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옛 가사의 낭독 소리, 그리고 예술전당과 나란히 한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

" 연길감옥가"가 새겨진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는 영원한 역사적 징표로 그제날 인간지옥에 오늘날 예술의 전당이 들어설수 있도록 몸바쳐 싸운 항일 영웅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지금까지 항일전쟁승리 70주년 특별기획 제1부를 보내드렸습니다.

이상으로 이 시간 [사회생활] 방송을 전부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애청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 김금철이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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