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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10월 8일,대만 육갑(六甲) 군민 일본경찰 습격
2015-10-08 16:18:35 cri

오늘은 10월 8일입니다. 1938년의 오늘, 중국 대만 육갑(六甲)의 군민이 일본경찰을 습격하면서 일본 식민통치자의 압박과 착취에 반항해 나섰습니다.


일본은 대만에서 50년간의 식민통치를 감행해 왔으며 이 기간 대만인민들은 줄곧 일본침략에 반항하는 투쟁을 계속해왔습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많은 대만 동포들은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조국 대륙에 와서 항일전쟁승리를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불완전한 집계에 의하면 장장 50년간의 항일 투쟁에서 대만인민 약 50-60만명이 자신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대만은 자고로부터 중국의 영토입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이 갑오전쟁을 발동하고 잇달아 전패한 청나라 정부를 핍박해 대만섬과 그 부속섬 그리고 팽호열도를 일본에 할양하게 했습니다.

일본이 대만을 강점한 후 식민당국은 대만에서 "황민화(皇民化)"운동을 강행하면서 학교과 기관 등에서의 중국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심지어 "개명운동"을 추진하고 대만 민중들이 일본 이름을 쓰도록 강요했습니다. 일본 침략자들은 또 "황민봉공운동(皇民奉公運動)"을 전개해 집집마다 전시노동복무에 참가하고 전쟁채권을 구매하며 전쟁물자를 납부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아울러 대만에서 20여만명을 강제징용해 일본군 또는 부역꾼으로 삼았고 대만 여성들을 강제또는 기편해 "위안부"로 삼았습니다. 이런 잔혹한 식민통치는 대만인민들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하여 대만인민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반항해 나섰습니다.

1938년 3월, 대만노동당 당수 고비(高斐)가 일본이 대 대륙전쟁에 대만 동포들을 강제 동원하는 것을 반대해 수천명의 광부들을 인솔해 의란(宜蘭)에서 폭동을 일으켜 일본군 사령부를 진공하고 화약고를 소각했습니다. 고비 등은 일본군과 4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후 아리산으로 후퇴해 현지 주민들과 연합으로 항일유격투쟁을 벌였습니다.

1938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대만 육갑과 고웅(高雄) 등지의 군민이 선후로 일본 경찰을 습격해 일본 경찰 수십명을 사살했습니다. 일본군은 즉시 이를 진압해 섬내 주민 2백여명을 살해하고 400-500명을 체포했습니다. 1939년 3월 일본군이 징용한 농민 천여명이 고웅 병참에서 반전폭동을 일으켜 일본 헌병과 반나절간 격전을 벌이다 궁극적으로 실패해 6백여명이 사살됐습니다.

1939년 10월, 강제 징용돼 대륙 전쟁터로 출발대기 중이던 기륭(基隆)의 300명 남성이 총기를 받은 후 반전폭동을 일으켜 현장의 30여명 일본군을 사살하고 증원된 일본군 145명마저 사살한 후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습니다. 1940년 겨울, 대남현 동석박자(東石朴子)소학교 교원 이흠명(李欽明)이 비밀리에 항일지사 50여명을 연락해 1941년 4월 대만민족주의청년단을 설립하고 대륙전쟁터와 소통하면서 아군이 일단 대만에 들어올 경우 안팎으로 협력할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소식이 누설돼 백여명이 일본군에 체포됐습니다.

대만인민들이 섬내에서 전개한 항일투쟁은 일본의 중국침략을 효과적으로 견제했으며 실제행동으로 조국의 항일전쟁과 세계반파시즘전쟁을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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