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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 발발
2015-12-11 16:24:30 cri

오늘은 12월 12일입니다. 1936년의 오늘, 내외를 진감한 서안(西安)사변이 발발했습니다.

1936년 10월,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공농홍군 3대 주력군이 감숙(甘肅)경내에서 승리적으로 합류해 홍군은 서북지역에서 동북군, 제17로군과의 "3위일체" 통일전선을 안정하게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장개석은 "외적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국내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방침을 고집하면서 11월 10일과 12월 4일 두차례 서안에 가서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이 인솔하는 동북군과 제17로군이 홍군을 진공하도록 명령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동북군을 복건(福建)으로, 제17로군을 안휘(安徽)로 이전시킬 것이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장학량과 양호성은 홍군과 전쟁하려 하지 않았으며 서북을 떠나 장개석에 의해 개편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연며칠 이들은 나라와 민족의 대의를 중히 여겨 항일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장개석을 수차 권고했지만 모두 장개석의 질책을 받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만난을 무릅쓰고 "병간(兵諫)"을 실행해 장개석이 "공산당숙청"정책을 포기하고 연합항일의 새 방침을 실행하도록 압박했습니다.

12월 12일 새벽 다섯시, 장학량과 양호성이 사전 논의한 배치에 따라 동북군 일부는 화청지(華淸池)를 포위해 장개석을 억류했습니다. 한편 제17로군은 서안성을 통제하고 남경에서 온 수십명의 국민당 군정요원을 연금했습니다. 이날 장학량과 양호성 등은 전국적인 전문을 통해 사변의 동기는 전적으로 항일구국이며 장개석 본인의 "안전을 보호하고 반성하도록 촉구할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모든 내전을 중지한다는 등 8가지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외를 진감한 서안사변입니다.

12월 13일, 중공중앙은 서안사변 소식에 접한 후 즉시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이번 사변이 혁명적이며 그 행위와 강령은 모두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고 한결같이 인정했습니다. 장학량과 양호성의 요구에 응해 12월 17일 주은래(周恩來), 엽검영(葉劍英), 박고(博古) 등은 중공중앙 대표의 신분으로 서안에 도착했으며 평화적으로 사변을 해결할데 대한 주장을 제기하고 서안사변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장학량, 양호성을 적극 협조했습니다.

남경방면은 12월 22일 송자문(宋子文), 송미령(宋美齡)를 서안으로 파견했고 장개석은 이들에게 서안방면과 담판하련다는 의도를 전했습니다. 주은래도 중공중앙 전권대표로 담판에 참석했습니다. 24일 달성한 6가지 합의에 따라 장개석은 "공산당숙청"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연합해 항일할 것이라고 표시했습니다. 이튿날 장학량은 장개석과 함께 남경으로 가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서안사변의 평화적인 해결은 시국전환의 관건으로 되었으며 중공중앙이 장개석을 압박해 항일방침을 실현하도록 추진했습니다. 항일의 전제하에 국공 양당의 제2차 합작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장학량, 양호성도 서안사변을 발동하고 또 사변의 평화적인 해결에 참여함으로써 항일에서 공훈을 세운 천추의 공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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