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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1일 방송듣기
2016-04-21 15:23:31 cri

[편지왔어요]

남: 편지왔어요, 이 코너에서는 여러분이 보내주신 따끈따끈한 사연들을 전해드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먼저 장춘의 최춘월 청취자가 보내주신 사연부터 만나보겠습니다.

여: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편집선생님들 안녕하십니까?

아나운서 송휘 한창송 선생님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전파를 통해 선생님들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특히 송휘 선생님은 고향도 투도이고 학교도 광흥중학교를 다녔다니 정말로 반갑습니다. 나도 고향이 투도이고 우리 아이들도 광흥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고향의 맑은 물, 맑은 공기가 선생님의 목소리를 아름답게 만들었군요. 고향을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뿌듯하면서 선생님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오늘도 우리 애청자들을 위해 두분 선생님 수고 많으십니다. 방송전파를 통하여 연변의 애청자클럽 10주년 기념행사도 잘 들었구요, 화룡3중 이성진 선생님의 문장도 감명깊게 잘 들었으며 청명절 행사도 아주 잘 들었습니다.

전파를 통하여 고향의 소식을 제때에 들으니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행복을 위하여 조국의 강산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마저도 선뜻이 바쳤고 이름도없이 조국의 강산에 조용히 누워있는 열사들에게 충심으로 참배를 드립니다. 윤영학 선생님이 한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 묘지를 참배한 보도도 잘 들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민족의 훌륭한 분이시고 우리 모두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고맙습니다. 윤영학 선생님! 그리고 3월의 퀴즈를 학습하면서 습득한 것이 많고 학교문을 나선후 다시 배우는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뿌리가 깊으면 잎사귀가 무성하다"의 근심엽무의 의미는 아주 깊다고 생각됩니다. 나무도 뿌리 깊으면 잎이 무성하고 열매도 풍부하듯이 사람도 지식을 깊이 습득해야만 문화자질이 높고 아는 것도 많고 열매의 결실도 풍부하고 사회 또한 문명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호랑이와 파리를 때려잡는 부패척결과 당청렴 문제도 보면 뿌리가 깊은 탐관오리들이 너무나도 많아 하루아침에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13차 5개년 계획에 따라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인민들의 생활이 중등권 수준사회에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상 방송을 들은 소감을 편지로 적어봤습니다. 선생님들의 사업의 성공을 축원합니다.

안녕히!

장춘시애청자애독자클럽 관성구 소조 최춘월

2016.4.8

***

남: 방송 청취 소감을 적시적으로 보내주신 최춘월 청취자 고맙습니다.

여: 두분이 한 고향분이셨군요…그 고장의 물이 참 좋은가봐요ㅋㅋㅋ…

남: ㅎㅎ 감사합니다.

여: 타향에서 고향 소식 또는 한 고향의 분의 소식들을 접할 때면 그보다반갑고 친근한 거 없죠. 사연 보내주신 최춘월 청취자 고맙구요, 환절기 건강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어서 다음 사연 만나보겠습니다. 연변애청자협회에서 편지 주셨습니다.

남: 故변철호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장춘 변철호선생님 유가족께: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비보는 우리들을 놀래웠습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빛나는 별이 사라진 아픔입니다.

변선생님께서 생전에 저희들 사업과 생활에 주신 배려는 큰 힘으로 남아 있습니다. 너무나도 따뜻하고 섬세하게 지도해주시던 그 감격이 오늘도 생생합니다.

변철호 선생님께서 창간하신 오늘의 <<로인세계>>는 세인들을 다듬어주는 보귀한 사료이지요. 변철호 선생님은 자신의 희생적 사업정신과 따스한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보귀한 정신식량을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중국 조선족사회의 번영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며 평생을 우리 민족을 위해 분투해오신 선생님의 그 공적과 정신은 영원히 우리 사업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비통을 힘으로 바꾸어 더욱 찬란한 새시대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합시다. 변철호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연변애청자협회

2016년 4월6일

***

여: 변철호 청취자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위문 편지를 보내주신 연변애청자협회에 감사드립니다. 이토록 힘들고 아플 때 서로를 위로해줄 주 아시는 우리 가족분들이 보기 좋습니다. 변철호 청취자님께도 그 마음이 전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남: 그래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유가족분들께서 힘내시구요, 하루 빨리 마음의 평온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 이어서 장춘의 김수영 청취잡니다.

남: 변철호선생을 추모하여

노혁명간부이며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고문인 변철호 선생은 2016년 4월 3일 저녁 9시 10분에 88세를 일기로 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 청명절인 4월 4일 오전에 장춘시혁명열사기념관 열사탑앞에서 혁명열사들에게 헌화하고 묵념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뜻밖에 이 비보를 접한 우리 모두의 마음은 쇠덩이같이 무거웠습니다. 그 순간 선배이고 동지이며 스승이고 지기인 그이가 우리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도 그지없이 허전했습니다.

변철호 선생의 일생은 평범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일생이며 파란만장하면서도 보람찬 일생입니다.

1928년 4월 24일 조선 중강의 한 빈한한 농가의 아들로 태여난 그는 어려서 중국으로 건너왔고 일찍 혁명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1946년 8월에 통화시에서 리홍광지대 교훈대대에 입대하였고 <4보림강>전역시기에 민간운수사업에 참가했습니다. 1947년에는 해룡현 토지개혁공작대에 참가하였고 조선민주연맹 해룡현 노동자위원회 선전위원을 담임했으며 그해 12월 19세의 어린 나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1948년에는 요서성인민정부 민족과에 전근되였고 동년 8월에 회덕현인민정부 민족과에 파견되여 현정부 직속당위원회 조직위원을 겸임했습니다. 1950년 봄에 그는 길림성당위원회 조직부로 전근됐습니다. 그는 어디에 가서나 헌신적으로 사업하였고 승승장구로 진보가 남달리 빨랐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무심했던가, 아니면 운명의 조화였던지. 그해 여름에 그는 본인의 인사서류에 이상이 있다 하여 회덕현에 돌아가 현당위원회 지도자와 분쟁이 있었고 결국엔 부당한 비판을 받고 억울하게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형사처분까지 받아 1년간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혁명에서의 좌절은 누구에게나 원통한 일이지만 그의 좌절은 동족상잔의 결과라니 더욱 통분했습니다.

확고한 신념과 견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변철호선생은 역경속에서도 추호의 동요도 없이 황소처럼 꾸준히 배우며 부지런히 사업했습니다. 그는 1951년 여름에 출옥하여 공주령시전업건설위원회에서 문서로 사업하였으며 1953년에는 길림성 행정간부학교의 수강생으로 학습하였고 공주령시인민정부 민정과의 과원으로 일했습니다. 1956년에 연변대학 중문학부에 입학한 그는 1960년 7월에 대학을 졸업한 후 선후로 장춘시조선족중학교와 장춘시 제56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1989년에 정년이직할 때까지 장장 30년간 줄곧 교육사업에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1983년에야 비로소 억울한 누명을 벗고 당적을 회복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꼬박 33년이란 긴 세월 어두운 터널속을 숨가쁘게 달려온 것입니다.

정년이직한 후의 변철호선생의 후반생은 더욱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재직 때부터 항일전쟁시기와 해방전쟁시기의 조선족영웅인물과 혁명열사들에 관한 재료수집과 조사연구를 해온 변철호선생은 남영전 시인의 평가처럼 «장춘조선족력사연구가»의 신분으로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겸직 연구원으로 초빙받았으며 «중국조선족발자취»라는 8권으로 된 총서 제5권의 부주필을 맡고 성공적으로 출판, 발행했습니다.

변철호 선생은 남관구 조선족노인협회를 창설하고 제1임 회장으로 다년간 봉사하였으며 1993년부터 장춘시조선족로인협회의 제3기와 제4기 부회장을 역임하고 6년간 노인사업에 정진했습니다.

변철호선생은 1994년부터 또 저와 함께 채규억 회장을 모시고 «로인문고» (후에 «로인생활»로 개명하였음)를 창간하고 1997년까지 4년간 총 20기를 발행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의 노인잡지가 없던 역사적 공백을 미봉하였으며 «로인문고»의 명의로 두 차례의 동북3성 조선족 노인협회 경험교류회를 소집하여 경험을 교류하고 친목을 도모했습니다. 1997년 2월에는 로인잡지의 발행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동분서주하다가 얼음판에서 넘어지면서 다리를 크게 상해 불행하게도 지팽이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종신불구가 됐습니다.

변철호 선생은 2001년부터 몇몇 지기들과 함께 «장춘조선족»이라는 민족역사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5년간 노심초사한 끝에 어렵사리 완성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볕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2월까지만 해도 그는 나와 만나거나 통화할 때마다 «장춘조선족»을 운운했지만 끝내 그 책의 출판을 보지 못하고 영영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소원을 풀지 못하고 우리와 영별한 고인을 생각하면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나마 시민위 함영일부주임께서 올해안에 꼭 출판되도록 책임지겠다니 고인도 하늘나라에서 이 소식을 듣고 위안이 되였으면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변철호 선생은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창시자이며 2010년부터는 이 클럽의 고문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남달리 사랑하는 그는 중앙인민방송국과 중국국제방송국의 우리말방송의 가장 열성높은 애청자였으며 «길림신문», «장백산» 등 우리말 신문이나 간행물의 가장 열성높은 애독자였습니다. 때문에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변철호선생은 우리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방송인들과 추억의 역사를 함께 써오신, 그리고 병환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우리 방송을 잊지 않으시고 대필을 통해서라도 편지를 보내주시는 참으로 고맙고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에서도 «변철호선생님은 한평생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온 분입니다. 또한 8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저희 방송에 매일 귀를 기울이시며 소중한 건의를 제출해주곤 합니다. 이처럼 충실한 애청자가 계신다는 것은 우리 방송의 재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치하했습니다.

변철호 선생과 저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변대학 어문학부에서 4년동안 학창생활을 함께 보낸 제8기 동기 동창입니다. 그는 중문을 전공했고 나는 조문을 전공하였기에 한 학급은 아니였지만 여러 모로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는 우리와는 달리 수년간 사업하다가 진학한 간부출신의 대학생이였고 우리 학부의 유일한 털보대학생이였으며 당시 연변대학의 교장까지 겸임한 주덕해주장의 부인 김영순녀사와 한 학급의 학우였고 대학 또는 학부에서 진행된 대형행사 때마다 거동이 남달리 로숙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960년 8월에 함께 졸업할 때 그는 장춘으로 배치받고 저는 통화로 배치받아 갈라진 후 꼬박 30년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1990년 봄에 우리 장백산잡지사가 장춘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다시 만나게 되였고 서로 손잡고 많은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는 시종 «장백산»의 충실한 애독자이자 유력한 후원자로서 잡지사의 모든 식구들과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우리는 중국조선족의 로인잡지를 꾸려야 한다는 공통한 구상으로 «로인문고»를 창간하고 4년간 함께 출판발행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습습니다. 우리는 바둑문화 역시 민족문화의 대사라는 동일한 인식으로 길림성조선족바둑협회를 설립하고 각종 바둑대회를 함께 개최했습니다. 우리는 장춘조선족의 역사와 인물을 정리하고 사료를 보존하기 위해 다년간 함께 고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하여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을 함께 꾸준히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다가 근년에 와서 체력이 점차 쇠약해지면서 그는 종종 «올해를 넘기지 못할것 같다»고 걱정했고 그때마다 내가 그더러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가면 안됩니다»라고 고무격려하면 «그래, 그래» 하고 통쾌히 대답했었습니다. 지난 년말에 그는 자기가 수십년동안 애써 수집하고 정리한 보귀한 자료와 도서들을 꽁꽁 묶어서 우리 클럽에 넘겨주었습니다. 우리는 경건한 심정으로 목록을 재정리하고 소중히 보관하였는데 무려 여섯 박스가 넘었습니다.

변철호 선생은 이제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습니다. 그의 별세는 우리 장춘의 조선족사회, 더 나아가서는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의 큰 손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비록 그의 몸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애국애족애민의 고귀한 품성과 불요불굴의 정신 및 성실하고 강직한 성품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고 변철호선생님이시여, 고이고이 잠드소서.

2016년 4월 18일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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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김수영 청취자의 말씀처럼 변철호 선생의 인생은 범상치 않은, 파란만장하면서도 보람찬 삶의 여정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드라마한편입니다.

남: 그렇습니다. 그리고 변철호 선생이 그토록 바랐던 작품이 하루속히 출판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사연 보내주신 김수영 청취자 고맙습니다. 이어서 장춘의 지영숙 청취잡니다.

여: 역사를 명기하고 오늘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자

4월 4일 청명절을 맞이하면서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에서는 선열들의 유지를 이어가는 행사로 장춘혁명열사능원에 가 혁명열사들을 참배하고 또 장춘혁명열사 기념관을 참관한 후 "중국조선족항일지사 100인"에 대한 이야기대회를 하기로 하고 클럽의 각 소조에 책들을 발급하였습니다.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의 요구에 의하여 우리 조양구 애청자애독자소조에서는 조양구 조선족노인협회 그리고 새일대사업관심위원회와 연합하여 3월을 혁명전통 학습의 달로 정하고 장춘 제1자동차공장 조선족노인협회 활동실에서 이야기대회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월 12일 대회는 클럽 부회장이며 조양구소조를 책임진 지영숙의 주재하에 우렁찬 "의용군 행진곡" 합창으로 시작되었고 이어 조양구 조선족 노인협회 안종원 회장의 개막사가 있었습니다.

대회에서는 손성만(87세), 이근본(84세), 안종원(82세), 이인숙(82세), 김영익(79세), 김옥자(79세), 김순덕(76세) 박옥순(74세), 김숙자(72세), 현인자(62세) 등 10명이 항일열사들의 혁명사적을 이야기했는데요, 모두 고도의 책임감과 드높은 열정, 깊은 감정을 담아 이야기를 하였기에 듣는이들의 심금을 울려주었습니다.

87세의 손성만 노인은 "나는 귀가 좀 멀어 잘 듣지는 못하지만 일본놈들의 만악의 죄행을 직접 겪었고 목격했기 때문에 우리 선렬들의 대공무사, 영용무쌍한 영웅적 기개를 똑똑하게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하셨고, 84세의 이근본 노인은 백내장으로 시력에 영향이 있어 확대경을 들고 읽어가면서 이야기 준비를 참답게 하셨고 이야기 대회를 마친 후 백내장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또 79세 김영익 노인은 대회발언 일주일 전에 책을 받은 후 낮과 밤을 이어가며 책을 읽으시면서 발언준비를 하였습니다. 그의 안노인의 말에 의하면 새벽 두시에 일어나서 책을 읽으면서 발언준비를 하시더랍니다. 이밖에 또 나어린 현인자는 2살되는 외손녀를 돌보면서 짬짬이 준비를 하였습니다.

연로하신 노인님들이셔서 준비과정에 많은 사연들이 있었지만 모두 고도로 되는 책임감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참답게 준비하셨기 때문에 이야기대회에서 모두 책도, 발언원고도 없이 매개 혁명열사들의 영웅사적을 아주 똑똑하게, 아주 조리있게 깊은 감정을 담아 똑똑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80여명은 모두 오늘 우리의 행복한 생활은 그 시대 피끓는 청년들의 목숨으로 바꾸어 온 것임을 새삼스럽게 느꼈고 중국꿈을 실현하는데서 황혼의 빛을 빛내가리라고 다짐들을 했습니다. 혁명전통교양은 영원히 우리 노인님들의 원동력으로 될 것입니다.

2016년 4월 3일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조양구소조 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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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역사 현장을 목격하신, 아픈 역사의 산증인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는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은데요, 좋은 행사를 조직하신, 그리고 적시적으로 우리 청취자 가족분들과 공유해주신 지영숙 청취자 고맙습니다.

여: 감사합니다. 그리고 "송휘, 한창송을 비롯한 방송국 임직원 분들이 금년에는 사업상 더 큰 성과가 있기를 축원하면서 앞으로 방송을 더욱 열심히 들으면서 훌륭한 참여자로 되기에 노력하겠습니다"라는 추신까지 적어주셨는데요, 지영숙 청취자의 응원의 메시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김경복 청취자도 청명절 맞이 행사 소식을 보내주셨는데요, 지금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남: 청명을 맞아 벌초하는 미덕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임직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도 벌써 4월이라 청명계절 봄바람이 불어오니 남방에는 배꽃, 복숭아꽃, 유채꽃 천송이 만송이 만발한다니 우리 동북 장춘도 만물이 움트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 좋은 계절 청명이면 우리는 조상의 무덤에 가서 흙을 덮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은 조상에게 효도하는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춘의 여러 애청자 클럽에서는 청명을 맞이하여 며칠간 다양한 형식으로 혁명열사능원에 가서 그들을 추모하면서 벌초하였습니다. 우리 장춘애청자애독자 남관구소조에서도 역시 며칠간 계속 바삐 보냈습니다.

지난 4월 1일에는 장춘조선족 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에서 혁명열사묘 "화피창(華皮廠)혁명열사능원"에 가서 벌초하였습니다. 전시 40여명의 조선족 오로(五老)대오와 장춘조선족중학교 초중1학년 학생 100여명이 참가하였는데 우리 남관구소조에서도 대표 11명이 참가였습니다. 하늘도 우는듯 이날은 바람 불고 큰 비방울이 얼굴을 때렸지만 모두들 한손에는 모자를 벗어쥐고 한손에는 하얀 국화꽃 한송이를 들고 나란히 서서 엄숙히 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먼저 묵념한 후 이종성 관공위 주임의 연설에 이어 오상금 부주임의 화피창 혁명열사능원 소개가 있었습니다. 이 열사묘는 1948년 4월 15일에 설립됐는데요, "동북인민해방군 독립6사"가 길림, 장춘 전토에서 희생된 열사 654명의 시신이 땅밑에 누워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184명은 아직도 이름없이 그 땅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 "독립6사전"은 대부분이 조선족입니다. 연령은 모두 20세 정도, 최연소 병사는 16세랍니다.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생대표 발언이 있었고 학생들이 묘앞에서 선서했습니다. 이 활동에서 "5로"대오나 학생들이나 모두 큰 교육을 받았습니다. 역사를 잊지 말며 혁명열사들의 혁명정신을 계승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분투하겠다고 결심을 내렸습니다.

4월 2일엔 남관구 조선족 노인협회와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남관구소조가 연합하여 청명을 앞두고 "중국 조선족 항일지사 100인"이야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9시반쯤 회의가 개막하자 우리는 혁명열사들에게 묵도를 드린 다음 혁명가곡 "유격대 행진곡"을 불러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김철골 청취자는 "통조림통으로 발을 짜른 항일열사 박상활", 이희림 청취자는 "조기 여성 반일투사 남자현", 송영옥 청취자는 "양림을 애모하면서", 이만호 청취자는 "인민화가 한락연", 장순자 청취자는 "왕청유격대의 창시자 김근", 김윤동 청취자는 "양정우 장군의 전우 이홍광", 김춘실 청취자는 "연변여성운동 선구자 김영신"을 이야기했는데, 이야기한 분들은 눈물이 앞을 가리우고 목메여 겨우 말했고 듣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며 들었습니다. 이날 행사는 김수영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회장의 총화발언으로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 활동을 통하여 우리는 항일투사들의 혁명노정과 항일업적을 다시 기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혁명정신을 계승하고 그들의 발자욱을 따라, 그들이 완성하지 못한 혁명이상을 완성하는데 힘쓰겠다고, 다시말해 '중국꿈,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 분투하는데 여생을 빛뿌려 가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최고령자 이희림은 90세, 최연소자 김춘실은 75세였습니다. 평균 연령이 80세입니다. 허나 열정이 높고 열심히 준비하였으며 아주 생동하고 감격적으로 하여 여러분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들었습니다.

올해 우리는 중국공산당 창건 95주년, 중국공농홍군 장정승리 80주년을 맞이하여 유사한 활동을 더 잘 조직하려 합니다.

4월 4일 청명날,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에서는 장춘혁명열사능원에 가서 벌초활동을 하였습니다. 먼저 혁명열사기념비 앞에 화환을 진정한 다음 묵도를 드리고 장춘혁명열사능원에 대한 소개를 들었습니다. 장춘혁명열사능원은 1952년에 건립되었으며 중국에서 비교적 큰 열사능원입니다. 이곳에는 조기민주혁명시기와 항일전쟁,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희생된 혁명열사 912명이 안치되었으며 그중 524명이 아직도 이름없이 누워있고 조선인민군 열사 79명과 일찍 혁명에 참가하고 건국후 사망된 노간부 60명도 있습니다. 동시에 왕희천 등 50명 열사의 영웅사적이 소개되었는데, 소개를 들으면서 우리는 애국적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길림성에는 조선족 50여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5만여명 즉 1/10이 참군하였고 그중 1/11 즉 4000여명이 희생됐습니다.

계속해 혁명열사 이야기회의를 열었는데 각 소조에서 선정된 "중국조선족항일지사 100인" 이야기 대표 7명이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상 관게로 어떤 분들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였지만 혁명열사들을 추모하는 마음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로써 우리 남관구소조의 청명활동을 거의 마치게 되였는데 새로운 일이 생겼습니다. 4월 4일 새벽, 장춘 남관구 조선족 노인협회 제1임 주임,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창시인이며 남관구소조의 창시인인 변철호 노인이 병으로 장기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별세했습니다. 4월 6일 아침 5시에 장례식이 있어 바삐 서둘렀습니다. 변철호 노인은 일찍 혁명에 참가하였고 후에 교육사업을 하시다 이직 휴양하고 정년 퇴직했습니다. 그 후에도 조선족사회에서 많은 좋은 일을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역시 조선족의 우수한 간부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기념하며 그의 정신을 고양하겠습니다.

이상 우리 남관구노인협회와 애청자애독자소조가 청명을 전후해 개최한 활동상황을 적어보냅니다. 일찍 적어보내려했지만 연이어 이어진 활동과 일로 미처 쓰지 못하고 늦게나마 이제야 보내드립니다.

2016년 4월 7일

김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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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역시 변철호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전해주셨는데요, 마음이 참 무겁기만합니다.

남: 유가족분들의 마음이야 오죽하시겠어요…

여: 그래요.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그 또한 변철호 선생의 바람이실 겁니다.

남: 이어서 연변의 남정자 청취자가 보내주신 사연 만나보겠습니다.

여: 농민작곡가 오태근

"농민작곡가"라는 별명은 장춘시 경제기술개발구 노인협회 회원들이 오태근에게 지어준 애칭입니다.

길림성 왕청현 라자구촌에서 태여난 오태근은 일찍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장래 꼭 작곡가가 되려는 푸른 꿈을 지니고 있었지만 고중 1학년때 가정경제난으로 부득불 퇴학하고 농촌에 돌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오태근은 작곡가의 푸른 꿈을 이루기 위해 짬짬의 틈을 타서 농촌군중예술구락부 활동에 참가하여 나중에는 군중예술활동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비록 정규적 음악교육은 못 받았지만 꾸준한 자습으로 손풍금, 젓대, 피리, 색소폰 등 악기를 다루면서 끝끝내 능숙한 연주기능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남이 흥얼거리는 노래도 악보를 정확히 써내는 기보능력도 갖추었습니다. 그의 연주를 들어본 음악전문가들도 "참 대단합니다"라는 절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라자구촌에서 그는 팔방미인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는 생산에서 선줄꾼일 뿐만 아니라 문예, 체육 등 모든 방면에서 재간둥이었습니다. 개혁개방의 신시대에 들어서서 그는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남부럽잖게 넓은 뜨락과 큼직한 곡간이 달린 새집을 짓고 펌프도 새로 박고 집 주위에는 과수나무도 줄지어 심고 짜장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유호로 되여 지난날 부모세대의 가난의 감투를 벗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인생길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2001년 그는 부인 조봉순녀사의 지병치료를 위하여 반평생 심혈을 기울여 꾸려온 보금자리를 떠나 아들을 따라 장춘으로 이주했습니다. 장춘에 온 조봉순 여사는 남편 오태근의 지극한 보살핌과 아들 내외의 효성속에서 여러 의사들의 진찰과 치료를 받고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완쾌하지는 못하여 5,6년사이 바깥출입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간병과 가무는 모두 오태근의 몫이 되었습니다. 조봉순 여사는 남편 오태근에게 너무도 감동되여 "당신의 부모가 생전이라면 나는 매일 절이라도 올리고 싶소!"라고 말했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이처럼 착한 낭군님을 나에게 보내주신 은공을 갚으려고…"라고 말했습니다.

오태근은 부인의 병시중과 가사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2007년에 그는 다른이들과 함께 장춘시 경제기술개발구 조선족노인협회를 창립했고 협회 상무부회장으로 추대됐습니다.

갖가지 악기의 기능을 장악한 오태근은 70세가 넘어서 사비를 털어 대형 노래책을 편집하여 회원들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 출판된 이 노래책 <애창가요 240곡>에 실은 가요는 우리가 즐겨 부르거나 익숙한 연변조선족가요 120곡(그중에는 오태근의 작품 5수도 포함) , 한국가요 40곡, 조선가요 40곡, 중국가요 40곡으로 도합 240곡에 달합니다. 이 책은 지금 우리 협회 회원들의 친구이자 교과서로 됐습니다. 이 책은 선후로 1200권 출판되였는데요, 장춘시 각 노년협회 회원들에겐 물론 흑룡강성,베이징, 상해, 영구, 훈춘 등 각지의 노인협회 회원들에게도 선물해 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도 심양, 대련 등 지역 노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그는 매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오태근은 진정한 "농민작곡가"로 우리 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016년 1월 17일

남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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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농민작곡가의 이야기를 생동하게 잘 들었습니다. 사연 보내주신 남정자 청취자 감사합니다.

여: 생활이 곧 예술이 된다고 하잖아요, 이처럼 풍부한 경력을 쌓으신 분이 창작한 노래들, 들어보진 못했어도 참 구수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녜, 이어서 연변의 박금순 청취잡니다.

남: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는 박철원 회장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빈다면 우리는 중국 민족정책의 혜택으로 조선어 방송과 신문, 잡지를 마음껏 듣고 볼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박철원 회장이 방송 청취대오를 늘리기 위해 작은 농촌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홍보한 사실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한 방송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내는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회원인 김봉숙 뢰봉할머니가 사천 문천지진 때 기부금을 마련하기 위해 결혼반지를 팔아서 지원한 사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지금 박회장을 따라 방송애청자협회뿐 아니라 장수협회에도 참가해 방송 홍보에 동참하고 있을뿐 아니라 북도 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 각지에서 살고 있는 많은 조선족 가정의 자녀들은 주변에 조선족 학교가 없어 조선어를 배우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들어가며 연변의 자녀들은 조선어를 잊지않도록 조선어를 잘 배워주고 조선어방송을 많이 듣게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10주년 행사때 우리는 축하무대에서 북 프로그램을 선보여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평가를 받을수 있은 것은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박철원 회장의 덕분이라고 봅니다.

박회장이 말씀하신 것처럼 애청자협회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참가하실 분들은 언제든 활동에 참가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2016.4.12

연길 애청자 박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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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사연 보내주신 박금순 청취자 감사합니다. 연변애청자협회가 날이갈수록 활기찬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는 박철원 회장님을 비롯한 연변애청자협회 모든 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열성적인 지지에 힘입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 그래요. 훌륭한 분들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죠. 연변애청자협회가 보다 더 장대하게 발전하길 기원합니다.

여: 녜, 이외에도 연변의 손화섭 청취자가 지난 14일 용정시 안민지역사회승룡노인협회에서 민족단결활동으로 고스톱경기 개최했다는 소식 등을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지사연소개는 이만 마치구요, 이어서 퀴즈한마당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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