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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기록문학 <량가하> 제6회
2018-07-09 15:43:56 cri


개혁개방으로 량가하 사람들의 살림살이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류서련(劉瑞蓮)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어린 동생들이 여름철에는 신발이 없이 지냈다며 이불도 네명이 겨우 하나를 같이 덮여야 했고 밀가루 빵을 먹는다는 건 꿈 같은 일이었다고 회억했습니다.

열일곱살 되던 해 류서련은 량가하의 공정복(巩政福)에게 시집왔습니다. 시집 온 뒤에도 살림형편은 어렵기만 했습니다.

량가하대대의 당지부서기로 있으면서 습근평은 철물사(鐵業社)와 위판점(代銷店), 봉제사(縫纫社)를 설립했습니다. 그 중 봉제사는 여 사원 세명을 뽑았는데 그 중의 한명으로 류서련이 뽑혔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경사에 류서련은 온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성과급 제도로 운영됐던 봉제사는 하는 일의 양에 따라 노동점수(工分:1950년대에서 1980년대 초까지 농촌 집단 경제 조직의 노동량과 임금의 계산 단위)를 줬습니다. 더 많은 노동점수를 받기 위해 류서련은 남편 공정복과 의논하고 돈을 꿔서 "표준(標準)"표 재봉틀을 샀습니다. 그때로부터 류서련은 끼니도 대충 때우면서 재봉틀을 돌렸고 수작업이 필요한 일은 집에 가져다 밤중까지 일을 계속 했습니다……

1984년 봄, "가정생산도급제(包産到戶)"라는 말을 처음 들을 때 까지만 해도 류서련은 그 무게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농촌을 바꾸는 거대한 변혁이 시작되였습니다.

수많은 섬북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류서련네도 열심히 노력하여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 삶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먹고 입을 걱정은 없어졌지만 쓸 돈은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타향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류서련도 도시에 가서 일할 방도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농한기 때면 류서련은 남편과 함께 연천(延川) 시내에 가서 아이스케키를 포장하는 등 날품팔이를 하여 살림에 보탰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량가하의 "1세대 농민근로자"로 불렀습니다.

개혁은 농촌에 유례없는 큰 변화를 불러왔고 개방은 그 변화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했습니다.

1993년 복주(福州)시 당위원회 서기로 재직하던 시절 량가하를 찾은 습근평은 마을 사람들이 더는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 것을 보고 더 없이 기뻤습니다. 한때 배불리 먹는 것이 꿈이였던 마을 사람들이 이젠 집집마다 곳간이 차넘쳤으니 기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연안의 경제와 사회발전에서 1999년은 분수령입니다. 국가에서 경작지를 산림으로 환원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연안도 경사도가 25도 이상이 되는 비탈의 경작지를 전부 산림으로 환원하기 시작했고 도시 전체가 "녹색" 혁명의 열기로 뜨거워졌습니다.

1999년부터 연안은 경작지 1000만묘(畒:'1市亩'는 약 666.7제곱미터임)이상을 산림으로 환원하여 황색에서 녹색으로의 변화를 이루어냈습니다.

2007년8월28일 , 습근평은 마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량가하의 산이 푸른색으로 바뀌고 물이 맑아졌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며 선두에 서서 인민을 부유의 길로 이끄는 당의 올바른 정책에 따라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나날이 나은 삶을 살도록 하라고 촌 당지부와 촌 위원회에 격려했습니다.

2013년7월은 연안이 1945년 기상관측 기록을 시작한 이래 우기가 가장 길고 정도가 제일 심각한 한 달이었습니다. 연안시의 13개 현과 구(區)에서 도합 154만5천여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만 120여억원에 달했습니다. 량가하 농호의 토굴집 80%가 파손됐고 일부는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피해복구를 하면서 현지 정부는 량가하 촌민 전원을 이주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량가하촌의 100여가구가 연이어 진(鎭)으로 이주하고 모든 어린이들이 문안역(文安驛)진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량가하촌이 자리하고 있던 곳은 원 모습을 복원시켜 당원과 간부의 당성 교육기지와 청소년교육기지, 아름다운 시골 시범기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2014년1월, 량가하촌위원회는 습근평 중공중앙총서기에게 마을의 경제와 사회 발전 상황과 재해복구 상황을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5월 5일 습근평 총서기는 량가하촌에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습근평 총서기는 답장에서 "작년 여름 연천이 심각한 지속적인 폭우의 피해를 입으면서부터 줄곧 마을 분들이 염려됐습니다. 당과 정부의 지원 속에서 여러분이 자구책을 적극 취하고 재해복구에 힘을 넣어 농업생산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킨 결과 마을의 형편이 전보다 더 좋아졌다니 더없이 기쁘고 마음이 놓입니다. 농촌에서 정한 올해 발전계획에 따라 마을 분들을 이끌고 착실하게 일해 더욱 부유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가기 바랍니다"라고 썼습니다.

량가하촌에서 습근평이 살던 집의 집주인 류금련(劉金蓮)은 이제는 몸이 아프면 참지 않고 곧바로 병원에 간다고 말합니다. 류금련은 2015년 상반기에 팔이 아파 병원에 갔다가 종양을 발견하고 수술치료를 받았는데 농촌까지 보급된 의료보험 덕분에 수술비에서 8000원 가까이를 정산 받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합니다.

합작의료 이외에 량가하 촌민들은 양로보험에도 가입해 60세 이상이 되면 매달 상황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고령보조금을 받습니다.

부유해지면서 량가하 사람들도 자녀교육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진과 현의 학교에 자녀를 보내 공부시키는 집이 늘고 이미 십여명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현재 량가하향촌문화관광발전유한회사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있는 류금련은 매달 1200원의 월급을 받는 외에 집에 작은 노점을 만들어 수작업으로 만든 신발 깔창과 특산물을 팝니다.

그젯날의 봉제사 사원 류서련은 의무 해설사가 됐으며 아들 공강(巩岡)은 15만원을 투자해 민박집을 경영하는 외에 회사를 설립하고 "량가하"를 브랜드로 한 좁쌀과 대추를 경영합니다.

량가하향촌문화관광발전유한회사와 양돈전문합작사, 사과전문합작사, 소상품생산과 민박집 등 다양한 경제형태들이 모여 량가하는 새로운 발전궤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2017년10월18일 량가하 촌민들은 촌당지부 회의실에 모여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의 승리적인 개막을 함께 시청했습니다.

베이징인민대회당에서 뜨거운 박수소리가 울리고 있을 때 량가하촌 당지부 회의실에서도 뜨거운 박수소리가 끊기지 않았습니다.

습근평 총서기의 보고를 청취한 마을사람들은 마디마디가 마음속에 와닿는 말들이라면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더 아름다운 미래를 동경했습니다.

량가하, 꿈을 만들어가던 평범했던 어젯날의 작은 산골 마을이 오늘은 꿈을 이루는 곳이 됐습니다.

청년 습근평이 량가하 마을에서 지낸 7년 세월을 돌이켜보고 량가하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보면서 새로운 역사적인 시기에 사람들은 섬서북부에 자리한 량가하라는 작은 마을에 만사 인민을 위하는 초심과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 착실하게 일에 몰두하는 기풍, 난관을 끝까지 헤쳐나가는 의지가 깊이 배여 있음을 느낍니다. 량가하는 헌신을 달갑게 여기는 젊은이들이 지향하던 곳이며 특히는 사명을 명기하고 분발 정진하는 수많은 공산당원의 높은 정신적인 경지가 녹아 있는 곳입니다.

위대한 시대는 위대한 꿈을 키웁니다.

오늘날의 량가하는 새시대의 봄바람을 타고 새로운 발전의 길에서 파도를 헤가르며 "두개의 백년"분투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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