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8-10-31 16:43:22 출처:cri
편집:朱正善

회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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녕하회족자치구 창설 60주년 기념우표

회족은 회회민족의 약칭이다.

회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비교적 많은 소수민족으로 2010년의 통계로 보면 총 인구가 981만명을 넘는다. 전국의 31개 성, 시, 자치구 직할시에 모두 회족이 살고 있으며 가장 집중된 지역은 녕하회족자치구로 186만명이 살고 있어 전국 회족 총 인구의 19%정도를 차지한다.

중국 회족의 뿌리는 당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 사료로 보면 당나라 고종 영휘 2년(기원 651년)에 아랍과 페르샤의 무슬림상인들이 해로를 통해 당나라에 오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광주와 천주, 항주, 양주, 장안 등 도시들에 정착했다. 이들은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예배사원을 축조했고 현지에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세세대대로 중국에서 살게 되었고 자신들만의 공동묘지도 만들었다. 당시 이들을 번객 혹은 토생번객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바로 회회민족의 선민들이다. 그후 송나라 때 유대인들이 오게 되었는데 종교적인 근접성으로 이들도 회족의 일부분이 되었다.

13세기 초에 몽골군대가 정벌전쟁을 진행하면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인, 아랍인들이 중국으로 징발되어 왔다. 이들은 장인, 상인, 학자, 관리, 교직원 등 부동한 신분으로 중국의 각지에 살면서 회족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명나라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회족에 융합되었다. 예하면 아랍, 페르시아인, 서역 돌궐 여러 민족과 동남아 나라의 사람들이 공물을 지참한  사절의 신분으로 수백명씩 왔다가 일부 사람들은 중국에 거주하거나 아예 정착해 살기도 했다. 학술계에서는 회족이 명나라 때에 형성되었다고 인정하며 원나라 떄는 회족형성의 준비시기라고 본다. 그러다가 청나라 때에 와서는 회족의 사회적, 정치적지위가 비교적 낮았다. 전국의 여러 집거지에서의 회족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었으며 그 중에서도 서북지역과 운남, 산동, 하남, 안휘 등 지에 회족인구의 분포가 가장 집중되었다.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회족은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목축업과 수공업, 상업에도 종사하는 특징을 보였다. 이때에 와서 회족의 농업은 이미 상당히 성숙되었고 농업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1958년 10월 25일 녕하회족자치구가 설립되었고 현재에 와서는 하나의 자치구, 두개 자치주, 11개 민족자치현이 설립되어  있고 전국적으로 140개 회족자치향이 있다.

현재 회족은 한어를 통용하며 부동한 지역에서 다른 방언을 사용한다. 회족의 선민들은 중국에 정착하는 초기에 아랍어, 페르시아어, 한어를 함께 사용했다. 그 후 회족 중의 한족의 인구가 점차 많아지면서 한어를 본 민족의 공동언어로 하게 되었고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단어들을 일부 보류했다.

원나라 때의 회회문은 신 페르시아문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명나라 때에 이르러 무슬림언어교학, 번역작업에 종사는 “회회관”이 있기도 했으나 한어는 점차 회족의 공동언어로 고착되었다. 명나라 중엽에 와서 경당교육이 흥기하면서 경당어, 소아금이라는 회족 언어가 나타나게 되었다.

회족의 경당어는 중국 이슬람교 청진사의 경당교육에서 사용하던 전문언어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한어로 음역하거나 한어단어로 의역하는 언어였다. 경당어는 중국의 유교, 불교, 도교의 경전용어와 민간용어를 흡수, 개조했다.

회족 소아금은 경사들이 중국의 특정된 역사조건에서 창조한 병음문자이다. 아랍어자모로 한어를 표기하는데 그중에는 아랍문, 페르시아문의 단어가 포함되고 간혹 한자가 섞이기도 한다. 이는 경서를 기록할 때 사용하거나 통신, 기록 등 교제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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