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8-11-01 10:53:49 출처:cri
편집:朱正善

묘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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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인구가 다섯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이다. 2010년 중국의 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묘족의 총 인구수는 천만명에 육박하는 942만여명에 달했다.

묘족은 주로 중국 남방지역의 귀주와 운남, 사천, 광서, 호남, 호북, 광동 등 성과 자치구에 거주하며 동남아시아의 라오스와 베트남, 태국 등 나라와 지역에도 일부 살고 있다.

묘족은 그 역사가 유구하다.묘족의 기원은 무려 5천여년 전의 염황(炎黃) 전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황하(黃河) 하류와 장강(長江) 중하류 일대에는 치우(蚩尤) 두령으로 하는 구려(九黎) 부락연맹이 거주하고 있었고 감숙, 섬서 황토고원에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와 황제(黃帝) 헌원씨()를 두령으로 하는 양대 부락연맹이 있었다. 염제와 황제는 황하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쳐들어와 선후로 치우와 전쟁을 했다. 치우가 먼저 염제를 패배시키자 염제는 황제와 손잡고 치우에 대항했으며 치우는 전장에서 숨지고 치우의 구려 연맹은  남방의 장강 중하류 지역으로 쫓겨 점차 삼묘(三苗)부락을 형성했다. 그러다 약 4천여년전 요(), (),()를 두령으로 하는 북방의 화하(華夏) 부락과 삼묘간 전쟁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삼묘의 패배로 끝났으며 삼묘 부락 연맹의 와해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삼묘의 아주 적은 일부는 원 거주지에 남아 하나라에 귀순해 자자손손 노예로 전락하고 그 외 대부분은 장강 중하류 지역을 떠나 오늘의 섬서, 감숙 접경지대에 이주하고 그 뒤 오랜 세월 속에서 점차 오늘의 사천 남부와 운남 동북, 귀주 서북 등 지에 정착해 서부방언을 사용하는 묘족으로 되었다.

()가 계()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중국의 첫번째 노예제 왕조인 하나라가 세워지고 또 하나라가 통치했던 장장 500여년간 삼묘와 관련된 기재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다 주나라에 이르러 형만’(荊蠻)이라는 방대한 부락이 등장하는데  ‘이 바로 고대 남방민족과 부락에 대한 북방인들의 호칭이다. ‘은 큰 개념으로서 여기에는 삼묘의 후대도 포함된다. ‘형만중 일부가 점차 발전해 초나라를 세우고 일부는 귀주와 호남, 사천, 호북, 운남과 이어진 산간지역에 이주해 오늘 날 동부와 중부 방언을 사용하는 묘족의 선민이 되었다.

의 호칭이 가장 먼저 나타난 시기는 당나라 때이지만 송나라에 이르러서야 는 비로서 중국의 다른 한 소수민족인 족과 구분되어 단일 민족 호칭으로 자리매김했다.

청나라 초기의 문헌을 보면 백묘’(白苗), 화묘(花苗), 청묘(靑苗), 흑묘(黑苗), 홍묘(紅苗)등으로 묘족의 갈래를 구분했는데 이런 구분은 주로 의상의 색상에 따른 구분이였다고 한다. 이 중의 일부 호칭은 오늘 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다사다난한 이주역사를 경과하면서 각지의 묘족들은 거주하는 자연환경이 다르고 또 잡거한 민족이 다름에 따라 서로간의 큰 차이를 보였으며 방언의 차이도 크고 의상도 다양화된 양상을 보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묘족은 새로운 발전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과 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고 구역자치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1990년까지 묘족은 선후로 동족(侗族), 포의족(布依族),토가족(土家族),장족(壯族)과 함께 6개 연합 자치주를 세우고 5개 단일 자치현을 세웠다.  

묘족은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는 묘족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민족문자가 있었다. ‘묘족고가’(苗族古歌)의 기재에 의하면 묘족의 선민들이 전쟁을 피해 다니는 과정에 민족문화의 비밀이 적군에게 폭로 될가봐 저어해 저들의 문자를 불살랐다고 한다. 묘족의 문자는 소수의 지식분자들의 타계와 함께 실전되었으며 다만 의상에 새겨졌던 글에서만 그 문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50년대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하에 묘족 학자를 포함한 많은 언어학자를 배양했으며 전국의 묘족 언어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 뒤 옛 묘족 문자를 개혁해 동부, 서부, 중부 3종 방언의 라틴표음 묘문을 창제했니다. 묘족 내부 갈래가 복잡하고 언어적인 차이가 큰 탓으로 통일하기 어려워 오늘날 대부분 묘족은 중문을 사용한다이밖에 동남아 묘족들은 프랑스 전도사가 발명한 라틴표음묘문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점차 국제묘문으로 발전했다.

묘족은 두가지 성씨를 쓴다. 하나는 묘족 성씨이고 하나는 한족 성씨이다. 각지 각 방언구역, 각 갈래의 묘족은 모두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유의 묘족 성씨가 있으며 일부는 오늘 날까지 여전히 내부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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