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4-17 18:30:09 출처:cri
편집:朱正善

이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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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비교적 많은 민족이며 주로 운남(雲南), 사천(四川), 귀주(貴州), 광서(廣西) 등 성과 자치구의 고원과 연해구릉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이족이 주로 살고 있는 곳들로는 초웅(楚雄), 홍하(紅河), 양산(凉山), 필절(畢節), 육반수(六盤水), 안순(安順) 등 지이며 양산이족자치주는 전국 최대의 이족집거지역이다. 2010년의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이족의 총 인구는 871만 여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족은 그 갈래가 많고 타칭과 자칭이 많은데 다른 사람이 이들을 부를 때는 “이(彛)”, “흑이(黑彛)”, “백이(白彛)”, 홍이(紅彛)”, “감이(甘彛)”, “화요(花腰)”, “밀차(密差)” 등이 대표적이다. 운남성의 소통(昭通), 무정(武定) 일대와 사천(四川)의 대량산(大凉山), 소량산(小凉山)의 이족들은 “낙수(諾水)”, “납수(納水)” 등으로 자칭한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이족은 총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운남 애뢰산(哀牢山), 무량산(無量山), 문산(文山), 마관(馬關) 일대의 이족들은 “밀사(密撒)”, “랍소(臘蘇)”등으로 자칭하는가 하면 귀주의 이족들은 “납(納)”, “낙(諾)”, “섭” 등으로 자칭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대다수 이족인들의 의지에 따라 “이족”을 통일된 민족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족의 민족형성설에 대해서는 북래설, 남래설, 동래설, 운남토착민설 등이 주로 제기되어 왔으며 학술계에서 비교적 일치한 견해는 북래설이라고 볼수 있다. 한문과 이족문의 역사기재를 살펴보면 이족의 조상들은 서부의 고대 강족(姜族)과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이족은 주로 고대 강족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초기까지 이족의 선민들이 활동한 중심지역은 현재 운남의 전지(滇池), 사천의 공도(邛都) 두 지역이었으며 이런 곳들에는 “공도”, “곤명(昆明)”, “전(滇)”으로 불리는 농경 혹은 유목부락들이 있었다. 이족의 역사전설에도 그 조상들이 원고시대에 “공지로(邛之鹵)”라는 곳에 살다가 그 후에 “낙이(諾以)”, “곡이(曲以)”라는 두 강의 연안에 살았다고 남아 있다. 여기서 낙이는 지금의 금사강(金沙江), 곡이는 지금의 안녕하(安寧河)유역이다.

그러다가 기원 3세기부터 이족의 선민들이 운남 동부와 남부, 귀주 서북부와 광서 서북부 등 지에로 삶의 터전을 넓혀갔다. 이들이 현지의 기타 민족과 융합이 되면서 고대 남방의 복인(濮人) 등이 후에는 이족으로 편입되었다. 고대이족이 살고 있던 지역에는 이족어계를 사용하는 기타 여러 부락들이 있었기에 역사적으로 복잡한 명칭이 형성되었다.

약 2천여년전에 이족의 선민들은 부계씨족공동체로 과도하게 된다. 이족의 문헌기록에 보면 그 조상인 “중모유(仲牟由)”는 아들이 여섯명이었고 이들이 바로 이족이 모시는 “육조(六祖)”즉 여섯 조상이다. 이 여섯갈래의 분파는 이족의 선민들이 씨족과 부락단계를 거쳐 부락연맹단계에로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기원전 2,3세기경에 운남 전지주변에 살고 있던 이족의 선민들은 이미 계급사회에 진입했다.

기원 8세기에 운남 애로산 북부와 이해(洱海)지역에는 6개의 지방정권이 출현, 역사에서는 이를 “6조(六詔)” 즉 6왕이라 불렀다. 그 중의 한갈래가 783년에 6소를 통일하고 이족을 주체로 하면서 바이족과 나시족을 포함한 정권인 “남소(南詔)”노예제정권을 세우게 되며 당나라에서는 이 정권의 수령을 “운남왕(雲南王)”으로 책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귀주의 이족집거지역에서는 “나전(羅甸)” 등 정권이 세워졌고 이를 총칭해 “나씨 귀주(羅氏鬼主)”라고 불렀다.

기원 937년에는 봉건제도의 “대리(大理)정권”이 “남소”를 대체하면서 운남의 이족지역들은 봉건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13세기 후에는 원나라(元)가 이런 정권들을 굴복시키고 이들이 사는 지역에 로, 부, 주, 현을 세우고 선위사를 파견했다. 원나라 말에는 운남의 여러 이족지역들에서 봉건지주경제가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영주(領主)경제와 노예제의 잔여가 각이한 정도로 존재했다. 명나라(明)와 청나라(淸) 때에 와서는 이런 지역에 대한 통치를 계속 확대했으며 그 결과 영주경제가 대부분 해체되고 봉건지주경제가 한층 발전하게 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후 중국은 점차 반봉건 반식민지사회로 전락되었다. 이때 많은 이족은 고난의 세월을 견뎌야 했고 아편이 이들이 집거해 사는 지역에 범람했다. 양산이족 노예주들은 아편을 이용해 많은 무기와 백은을 교환하고 주위에 그 세력을 넓혔으며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이족 내부에서 무장충돌이 날로 빈번해졌고 많은 이족은 살길을 찾아 안녕하 서부 여강(麗江)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착취와 억압에 맞서 이족인들은 역사적으로 여러번 항쟁을 벌였다. 특히는 근대에 와서 이들의 항쟁은 전국 여러 민족의 반제반봉건투쟁의 한 부분으로 되었다. 청나라 함풍(咸豊) 연간에 애로족 산간지역의 이족인 이문학(李文學)은 성세호대한 봉기를 일으켜 23년간 견지했는데 이는 큰 영향을 낳았다. 19세기 말에는 금평(金平)과 원양(元陽) 등지의 이족과 하니족인들이 여러번 연합하여 중국의 변강지역을 침략한 프랑스 침략자들과 싸웠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는 양산주의 일부 지역의 이족인들이 노예제를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의 고조기가 1914년이었기에 이 해를 이족역법의 “범의 해”로 정했다.

해방전쟁 때에는 운남의 많은 지역들에서 이족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유격대를 세워 중국인민해방군이 순조롭게 이 지역에 진격해 해방을 하도록 기여했으며 이족의 많은 우수한 젊은이들이 이 과정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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