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5-22 12:36:20 출처:cri
편집:朱正善

아창족의 역사

图片默认标题_fororder_探访云南阿昌族户撒刀“刀王”李德永 打造出7米多长“天下第一刀”

(아창족의 후싸도 도왕 길이 7미터 '천하제일' 후싸도 주조)

아창족은 운남성(云南省)에 살고 있는 인구가 비교적 적은 7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다. 그 언어는 아창어로 한어-티베트어계에 속하며 양하(梁河)방언과 후싸(戶撒)방언 두가지로 나뉜다. 아창족은 한어, 따이어 등 기타 민족의 언어와 방언에 능하며 본 민족의 문자가 없다.

아창족은 주로 운남성 더훙(德宏)따이족징퍼족자치주 농천현(陇川縣)의 후싸아창족향, 양하현 낭송(囊宋)아창족향, 구보(九保)아창족향 등에 집거해 살며 일부는 노서(潞西), 영강(盈江), 등충(騰沖), 운룡(云龍) 등 현들에 살고 있다. 그외 운남과 인접한 미얀마에도 일부 아창족이 살고 있다.

아창족은 철기제조로 이름을 날렸으며 후싸도(戶撒刀)라 불리는 칼은 그 대표적인 철기제품이다.

2010년 제6차 인구보편조사결과로 보면 아창족의 총 인구는 3만 9천여명으로 집계되었다.

고대 한문자료로 보면 아창족은 어창, 우창 등으로 불리웠다. 아창족은 또 여러가지 자칭이 있는데 후씨지역의 아창족은 자신들을 “멍싸”, “따이싸”, “천싸” 등으로 부르고 양하지역의 아창족은 “한싸”, “아창”, “어창”으로 자칭했다.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아창족의 염원에 따라 그 명칭을 아창이라고 통일했다.

아창족의 역사는 고대의 저강족 군체와 연결이 되며 남소, 대리국 시기의 “심전만(尋傳蠻)”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당(唐)나라 문헌자료에는 이들은 “심전만”으로 기록했는데 이들이 바로 아창족과 다른 한 소수민족인 징퍼족의 조상들을 지칭한 것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아창”이라는 명칭은 원나라 때의 “초포총록(招捕總錄)”, “원사•지리지(元史•地理志)”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아창족은 민족발전과정에서 여러 민족과 융합되는 양상을 보였다. 송(宋)나라, 원(元)나라 때 내지의 상인들이 운룡 일대의 아창족들과 통상을 했다. 명(明)나라 때에는 운남에 군민둔전제(軍民屯田制)를 실행하여 대량의 한족인구가 유입되었고 일부 아창족은 한족과 기타 민족과 융합되었다. 명나라, 청(淸)나라 때에는 한족, 바이족, 따이족 등 민족과의 내왕이 긴밀해 지면서 융합도 가속화되었다.

아창족의 민간에는 민족내원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농천현 후싸향의 아창족들중에는 그 역사를 “동래(東來)설”, “남래(南來)설”, “내지(內地)이주설” 등으로 보는 부동한 견해가 있다. 일부 아창족은 그들이 내지에서 왔다는 징표로 가보 즉 족보를 가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설법들 중에서 “동래설”과 “북래(北來)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으며 이는 또 아창족이 징퍼족과 역사적인 연결고리가 있음을 말해준다고 분석한다. 이런 주장들을 보면 아창족은 비록 인구가 많지 않으나 그 내원이 비교적 복잡하며 다원화되고 일체화된 민족임을 보아낼수 있다.

아창족의 선민들은 고대에 운남 서북부의 금사강(金沙江)과 난창강(澜滄江), 누강(怒江) 유역에서 살아 왔으며 그 후 일부 사람들이 누강 서안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약 13세기경에 지금의 농천현에 정착했으며 다른 일부는 운룡, 보산, 등충 등 지역으로 이주했다가 최종 양하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역사전설로 보면 아창족은 최초에 채집과 수렵을 주요한 생계수단으로 삼았으며 그후 점차 농경생산에 종사했다.

당나라, 송나라 때 아창족지역은 운남의 남조(南詔)와 대리국(大理國) 관할이었다. 남조의 노예주들은 무력에 의거하여 아창족들에 대해 잔혹한 착취를 하고 노역을 강요했다. 대리국 통치자들도 운룡지역의 아창족들에게 공납을 요구했다. 원나라 때에 와서 아창족거주지역은 운남성 산하의 금치선무사(金齒宣撫使) 등의 관할권내에 있었다.

명나라, 청나라 때에 와서는 중앙정부가 더훙지역에서 토사제도를 실시했다.

청나라는 운남지역에 대한 통치에서 명나라 때의 토사제도를 답습했다가 후기에 가서는 관리파견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아창족지역의 토사제도는 중화민국 시기까지 이어졌다. 청나라 때 아창족은 여러번 무장봉기를 일으켜 토사들의 폭압에 저항했다.

 1949년 라싸지역의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토사를 죽였다. 이때 중국인민해방군의 남하부대가 보산에 이르렀고 아창족의 봉기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들은 세명의 대표를 파견해 해방군과 만나도록 했으며 1950년에는 해방군이 더훙지역에 주둔하면서 아창족과 기타 여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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