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9-12 17:27:5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9월 10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 두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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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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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9월을 개 구를 넣은 구월(狗月이라고도 한다.

이 구월은 고정된 것으로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등 12지지(地支)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기상(氣象) 의미로 놓고 볼 때 9월은 북방의 여름과 가을이 사귀는 계절이다. 9월은 남방에서는 여름철로 중국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세 번째로 더운 달이다. 이때 평균 기온은 8월과 7월 버금으로 간다.

9월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이날은 국제자살예방협회가 발기하고 세계보건기구가 공동 주관했다.

9월 10일은 중국 특히 교원들에게 특수한 날이다. 1984년 1월 21일,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9차 회의는 해마다 9월 10일을 중국의 교원절 즉 스승의 날로 할 데 대한 결의를 통과했다.

교원절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기고 그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정한 날이다. 스승에게 감사하는 명절이다.

교원절은 여러 나라와 여러 지역의 스승의 날은 날자가 다르다. 대만은 9월 28일을 교원절로 삼고 있다.

한국은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삼는다.

1963년 충남지역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은사의 날’을 정하고 사은행사를 개최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교원절은 중국의 전통적 명절이 아니다. 그리하여 각 지역은 해마다 부동한 경축 행사를 열며 통일되거나 고정적인 형식이 없다.

정부, 학교는 교원절 경축표창대회를 갖고 교원에게 증서를 수여, 포상금을 발급한다. 학교와 학생을 조직하고 춤노래 행사를 준비하여 교원들에게 표현한다. 방문, 위문 형식으로 교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한다.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이런 제목으로 길림성 연변의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한때 학교로 이름났던 용정의 마을 이야기입니다.

'선바위가 파수하고 있는 명동마을'

용정의 명동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유명한 윤동주의 고향이다. 그러나 시인 윤동주는 마을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이방인처럼 낯선 이름이었다. 적어도 윤동주가 저항시인으로 연변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1985년 무렵까지 내처 그러했다.

손영숙 노인은 옛 명동학교 출신이지만 훗날 흑룡강에 이주하여 살다보니 더구나 윤동주를 몰랐다. 10여 년 전 우연히 책자를 보고 비로소 교우 가운데 이처럼 유명한 시인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맘때 연변에서 시모임이요, 연구회요, 문학상이요 하는 단체와 상패에는 윤동주의 이름 세 글자가 곧잘 보석처럼 박히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혜성처럼 문득 돌아온 이 교우는 명동학교 나아가 명동의 상징으로 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명동이라는 이 이름을 만든 게 아니지만 그가 다녔던 명동학교가 바로 마을 이름의 시원이라고 용정의 지명지(地名志)가 밝히고 있다. ‘명동(明東)’은 ‘동방을 밝힌다.’는 뜻이니 정말 학교의 이름 같기도 한다. 명동학교는 궁극적으로 민족의식 고양을 통한 민족인재 양성에 취지를 두었기 때문이다.

지명지의 기록처럼 학교 이름이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마을은 확실히 명동학교 초대 교장이 이 고장으로 이주하면서 주변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1899년 함경도 회령 출신의 선비 김약연 등 네 가족 도합 22가구 141명이 두만강을 건너고 오랑캐령을 넘어 장재촌長財村에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 두만강 기슭의 자동子洞에 이주했던 다른 한 가족이 합류하였다. 그들은 함께 땅을 사들이고 투자한 몫대로 나눠 황무지를 농토로 만들고 가옥과 서당을 세웠다. 이때 김약연 등은 그들의 이 공동체를 ‘밝은 민족의 새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명동明東’이라고 작명했다는 얘기가 있다. 공동체가 학교 먼저 마을의 이름의 시초로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정착한 무렵인 1901년부터 규암재(圭巖齋) 등 사숙(私塾)을 열고 교육을 시작, 1908년 또 이런 사숙을 통합하여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한다. 서숙은 이듬해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김약연이 교장이 되었다. 명동학교는 전성기에 학생이 무려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민족교육의 산실, 반일운동의 책원지이었던 명동학교는 훗날 윤동주가 저항시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으로 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1927년 봄의 학교일지에는 청소당번 문익환, 떠드는 학생 송몽규, 지각생 윤동주 등등 내용이 적혀있다. 그때의 학교 일상이 사진처럼 생동하게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일지에 등장하는 문익환은 훗날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 시민운동가, 시인으로 성장한다. 그의 생가는 바로 윤동주 생가의 길 건너 동쪽에 위치, 몇 해 전 현지의 유지인사에 의해 원상 복구되었다. 문익환이 나중에 시인이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 일지에 나오는 송몽규 역시 소학교 때 “동아일보”신춘문예현상응모작에 입선되는 등 작가의 기질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들의 학급은 문학소년반이 아닐지 하고 의심할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사는 한 둘이 아니었다.

이 무렵 명동학교 중학부는 다른 학교와 통합되었고 소학부가 계속 그 자리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훗날 윤동주는 도껴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형무소에 수감되며 1945년 옥사한다. 1948년 윤동주의 유고 31편을 묶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시”가 한국에서 출판되며 그 후 유고를 보완하여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은 동명의 책자가 간행된다. 1968년 연희전문학교 시절 그가 기숙했던 숙소 앞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정작 고향 명동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몰랐고 그의 생애를 몰랐으며 그의 시는 더구나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한국과 중국 대륙은 푸른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어지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예전에 명동에서 서쪽의 장재(長財)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바로 윤동주의 생가 뒤쪽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생가 동쪽 귀퉁이의 우물가에는 뽕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이 뽕나무 밑에서 날마다 퇴교 후이면 종종 달리기가 있었다.

달리기의 종점은 언제나 장재마을의 북쪽 고갯마루였다.

장재는 ‘부유함을 갈망한다’는 뜻이라고 지명지가 기록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장재가 함경도 방언이며 땅에 기둥을 박고 판자를 가로 대어 만든 울타리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또 마을 북쪽의 ‘고개가 길다’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손영숙 노인은 그제 날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옛 우물가에서 한동안 그린 듯 서있었다.

 “누군가 ‘요이 땅’하고 출발을 알리면 모두 주먹을 부르쥐고 뛰었지요.”

‘요이’는 일본말로 ‘준비하라'는 뜻이며 ‘땅’은 신호총의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손영숙 노인이 입학했던 1944년 1월은 아직 일본이 패망하기 전이었다. 그때 명동학교는 전 과목을 일본어로 강의했으며 교내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다. 누군가 얼결에 조선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패쪽을 받고 변소청소를 했다. 정말이지 명동학교를 창립했던 김약연이 알면 대노하여 무덤을 열고 뛰쳐나올 일이었다.

아이들은 고개까지 헐떡거리면서 뛰어갔다. 고개가 정말 양의 밸처럼 길고 길었다. 거기서부터 또 7,8리 길을 더 가야 했다. 손영숙 노인이 살던 산수동은 명동까지 10리 길, 고개를 두 개나 넘었다. 아침이면 해 뜨기 전에 동네를 나섰고 저녁이면 어둑어둑해서야 집 마당에 들어섰다. 그때는 늑대가 무시로 출몰했으며 그래서 저마다 손에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다녔다. 발에 걸친 짚신은 험한 산길 때문에 며칠도 되지 않아 구멍이 펑하니 뚫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짬만 있으면 마루턱에 앉아 짚신을 삼았다고 한다.

어린 손영숙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에는 포대기를 머리에 쓰고 고개를 넘었다. 산수동에는 그와 같은 통학생이 다섯 명이었으며 이웃한 선박골에는 더구나 많았다고 한다. 선박골은 선바위골의 준말로서 입구의 큰 바위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명동 주변의 3백여 명 학생들이 모두 그들처럼 통학을 했다. 그런데 여느 농가처럼 무심히 지났던 우물가의 그 옛 가옥이 훗날 용정의 손꼽히는 관광명소로 태어날 줄 누군들 알았으랴!

“나무에서 뽕을 따먹다가 집에서 인기척이 나면 내 꼴 봐라 하고 도망했지요.”손영숙 노인은 우물가에 떨어뜨렸던 옛 기억을 뽕처럼 하나하나 줍는다. 그러나 우물가에 서있던 뽕나무는 더는 그루터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명동마을의 송길련 전 촌장은 그들보다 윤동주의 생가와 인연이 훨씬 깊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이 가옥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가 정말로 이 가옥의 주인으로 되었더라면 나중에 자의든 타의든 집을 내놓아야 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선견지명의 운이 있었다고 자축할 일은 아니었다. 철거의 운명은 그림자처럼 그를 졸졸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의 집은 옛 명동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훗날 학교건물의 원상 복원을 위해 부득불 철거해야 했던 것이다.

송길련의 부친은 지난 세기 50년대 초 아랫마을에서 명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들 가족은 일찍 고조부 때 조선 함경북도 명천을 떠나 이 고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 무렵 아랫마을은 마을 누군가의 이름을 따서 중영(中英村)이라고 불렀는데 훗날 인명을 버리고 명동 남쪽 마을이라는 의미의 명남촌(明南村)이라고 개명했다.

명천에서 명남으로, 다시 명남에서 명동으로 이어진 ‘이민’은 결국 송길련의 세대에 와서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송길련은 명동 마을 안에서 ‘이민’을 했으며 그 때문에 명동학교는 2009년 제자리에 순조롭게 복원될 수 있었다.

옥에 티라고 할까, 손영숙 노인은 학교건물은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하지만 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양쪽의 입구에서 신을 벗어놓고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설이 아니잖습니까.”

옛날보다 달라진 건 학교뿐만 아니었다. 그때 북쪽에서 병사처럼 이 고장을 수비하고 섰던 선바위는 세 개였으며 그래서 또 ‘삼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중간의 바위는 언제인가 훼손되어있었다.

손영숙 노인이 명동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 무렵 선바위의 꼭대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는 언제인가 웬 처녀가 목을 매어 죽은 후 귀신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소나무가 있던 자리가 도대체 어느 바위이냐 하는 걸 두고 손영숙 노인과 동행한 그의 급우는 약간 실랑이를 벌였다. 불과 60년 전의 일인데도 그처럼 기억 속에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선박골의 이방동에 살고 있었다는 정삼품의 벼슬아치는 현지에서 더구나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었다. 선박골의 위쪽에 있던 물박(‘물방아’의 준말)골과 그 근처의 강기슭에 있던 재박(‘조각’의 방언)골은 아예 까맣게 잊히고 있는 지명이었다.

  “운동하면 명동이 일등

  노래하면서 뛰어라 뛰어라

  네 마음대로 넓은 들에서

  …”

뭔가의 애수에 잠겨 명동을 떠나기 아쉬워하던 손영숙 노인, 그가 학교 마당에서 흥얼거리던 노래는 명동학교의 옛 교가였다. 그러나 썰렁한 운동장에는 더는 뛰노는 어린이들이 없었고 이름 모를 잡초만 겨끔내기로 자라고 있었다.*

: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

[퀴즈 한마당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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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9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의 지명 ‘조양천’가 냇물 천(川)자 들어있는데요,

여기서 ‘조양천’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지명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조양천’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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