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10-02 16:47:1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10월1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 첫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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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갑:

10월 1일은 음력으로 팔월 보름날로 추석입니다.

중국에서 추석 중추절이라고 불리는데, 천상 숭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상고시대의 제월 즉 달에서 제를 지내는데서 변혁, 발전되었다고 합니다. 일명 제월절, 월광찬, 월석, 중추절, 배월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중추절은 상고시대에 시작되어 한나라 때 보급되었으며 당나라 때 고정되었고 송나라 후부터 성행했다고 합니다.

2006년 5월, 중국 국무원은 추석을 제1진 국가급 무형문화재 명단에 등재했습니다. 2008년부터 추석은 국가의 법정 명절로 되었습니다.

중추절에 중국은 달구경을 하고 용춤을 추며 꽃등 놀이를 하는 민속놀이가 있습니다. 이날 중국인들은 달 모양의 둥근 떡 월병을 먹습니다.

추석은 또한 조선반도의 대표적인 명절입니다. 다른 말로는 ‘한가위’, ‘중추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추석은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추석 무렵이 되면 온갖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고 집집마다 먹을거리가 풍부해집니다. 그래서 추석에는 조상들께 가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따위의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냅니다.

추석의 민속놀이도 있습니다. 옛날 여자들은 강수술래를 즐겼고 남자들은 가마싸움, 소먹이놀이와 같은 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구리불상이 있었다는 동불촌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패랭이를 쓰고 있었나

  동불사(銅佛寺)는 구리불상을 모신 사찰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광서(光緖, 1875~1908) 초년 이 고장에는 벌써 마을이 형성되었지만 훗날 사찰이 생기면서 사찰 이름이 곧바로 마을 이름으로 고착되었던 것이다.

  “옛날 누군가 구리불상을 강물에서 건졌다고 합니다.” 김재욱 씨는 마을의 노인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단 한마디로 일축하였다.

  구리불상의 전설은 동불사 부근에서 살았던 그가 어릴 때부터 귀에 못 박히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지명지(地名志) 등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광서 13년(1887), 촌민 강(姜) 씨네 다섯째가 부르하통하에서 그물을 놓다가 한자 남짓한 크기의 구리불상을 건졌다고 한다. 마침 변경순찰을 나왔던 길림(吉林)장군 장순(長順)이 이 불상을 길림의 자택으로 옮겨갔다. 얼마 후 불상은 장순의 꿈에 나타나 본 고장으로 보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장순은 불심(佛心)을 어길 수 없어 사람을 파견하여 불상을 본적에 호송하였다. 그는 또 은자 8백 냥을 내어 사찰을 짓는 경비로 삼았다.

  광서 18년(1892년), 부르하통하의 강기슭에는 마침내 사찰이 하나 나타났다. 이때 사찰은 본채와 뜰채 그리고 또 좌우 양쪽에 한 채씩 곁들이는 등 부지가 3백여 평에 달했다고 한다. 건물은 전부 푸른 기와와 벽돌이었고 산문 밖에는 돌비석이 두 개 서있었다. 장순은 이 사찰의 이름을 ‘동불사’라고 지었다. 사찰 덕분인지 이때부터 강이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신도들이 원근에서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한때 강바닥의 진흙탕에 묻히는 수모를 당해야 했던 악연 때문인지 모른다. 구리불상은 수십 년 후 또 기막힌 업보를 받게 된다. 사찰은 종적 없이 훼손되며 그때부터 구리불상은 다시 어디론가 감쪽같이 잠적한 것이다. 이 황당한 일을 두고 세간의 일부에서는 일제 강점시기에 생긴 일이라고 하며, 또 일부에서는 해방(1945.8.15.) 후인 1950년대에 있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등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동불사는 더는 어느 한 마을이 아닌 향(鄕)의 명칭으로 덩치를 불리고 있다. 향 소재지가 있는 부락은 그 이름을 따서 동불촌(銅佛村)이라고 불린다.

  이름 그대로 구리불상은 이곳 마을의 둘도 없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 구리불상이 아직 동불사의 어딘가에 남아있다고 한다. 향 정부에서 근무했던 김재욱 씨는 몇 해 전 사찰을 복원하려고 동분서주하던 서(徐) 씨 성의 사람을 만나 이 비사(秘事)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보관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사찰이 서면 구리불상이 다시 나올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구리불상은 전설이 아니라 눈과 코, 입, 귀 등 이목구비가 갖춰진 실존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마을에는 웬 도사의 이름이 구리불상 못지않게 쟁쟁하게 남아있었다. 도사는 중국 토종 종교인 도교의 종교가를 이르는 말이다. 이 도사는 종일 패랭이를 쓰고 있었던지 ‘패랭이 도사’라고 불렸다고 한다. 패랭이는 대오리로 얽어 만든 갓을 말한다.

  그때 패랭이 도사가 출마했다고 하면 이 작은 시골동네는 대뜸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고 한다. 패랭이 도사가 손을 들면 기차도 마을버스처럼 동네 앞에 잠깐 멈춰 단 혼자의 그를 귀빈처럼 공손하게 탑승시켰다고 한다. 그가 속인들에게 신선 같은 존재로 비쳤던 것 같다.

  8.15 광복 전에 있었다는 패랭이 도사의 이야기는 구리불상의 전설처럼 동네에 파다하게 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패랭이 도사를 만나 보았다는 사람은 눈 씻고 찾을 수 없었다.

  여든 고개를 넘은 김해운 옹은 이전에 현지의 노인들에게 귀동냥해서 들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도사님은 그때 패랭이산에 거처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옛날의 토성이 있지요.”

  패랭이산은 동불촌에서 논 한가운데의 ‘절당 길’을 건너 바로 부르하통(布爾合通河) 동북쪽에 보이는 자그마한 산 둔덕을 이르는 말. 이 평평한 둔덕의 뒤쪽에는 봉우리 하나가 불쑥 솟아올라 있었는데 진짜 갓 모양의 패랭이를 방불케 한다. 편검산(偏臉山)이라고 하는 중국말 이름은 이 패랭이의 발음을 옮겨 적은 게 아닐지 한다.

  ‘절당’은 사찰을 이르는 현지의 사투리 말이다. ‘절당 길’은 이 길이 시작되는 마을 언저리의 사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절당 길’은 마을 뒤의 논을 가로타고 부르하통하의 둑까지 닿고 있었다. 예전에는 일명 ‘철렁 다리’라고 불리는 적교(吊橋)가 강 양안을 하나로 이어놓았다. ‘철렁 다리’는  허공에서 그네처럼 흔들거린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강북의 영승촌(永勝村) 사람들은 2,3리 밖의 서쪽에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있지만 걸음 수고를 덜어주는 이 적교를 자주 찾았다. 영승촌은 원래 북쪽의 작은 골이라는 의미의 소북구(小北溝)라고 불렸는데 1958년 영원히 승리하라는 의미의 영승촌으로 개명했다.

  패랭이산은 영승촌의 바로 동쪽에 위치, 마을과 불과 수백 미터 상거하고 있었다. 서쪽에서 강기슭을 따라 기복을 이루며 달려온 산줄기는 바로 이곳에 이르러 홀연히 끊어진다. 기이하게도 산줄기는 이 급작스런 동작 때문에 당금 옆으로 넘어질 것처럼 남쪽으로 한발이나 기울어져 있다. 패랭이산은 바로 이 산줄기의 끝머리에 홀로 위치한다.

  멀리서 보면 산은 똑 마치 모이를 쪼아대는 닭처럼 하곡지대의 벌판에 머리를 불쑥 내민 형국이다. 그렇지 않아도 패랭이산과 동쪽으로 골짜기의 패랭이천川을 이웃한 산봉우리는  흡사 닭의 볏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고 해서 닭볏산, 중국말로는 계관산(鷄冠山)이라고 불린다. 계관산 북쪽에는 아직도 이전에 일본군이 구축했던 지하갱도가 남아있다. 패랭이산은 산 자체가 부르하통하 연안의 길목에 자리한 자연적인 요새로, 고대는 물론이요 근대에도 군사요새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람을 놀래는 건 자연의 특이한 조화造化 뿐만 아니었다. 일행 중 누군가 얼결에 산기슭을 흐르는 강물처럼 길게 탄식을 뽑는다.

  “이건 정말 벌레가 잎사귀를 뜯어먹은 것 같구먼.”

  아닌 게 아니라 패랭이산은 볼썽사나운 풍속도 그 자체였다. 산은 동쪽과 남쪽, 서쪽 삼면이 심한 비탈이나 바위투성이의 절벽이었는데 채석으로 인해 뭉텅뭉텅 떨어져 있었다. 진짜 이름 그대로 패랭이라면 암만 가난한 선비의 것인들 그렇게 허름하랴 싶었다.

  마을로 통하는 달구지길이 산등성이를 타고 패랭이산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이 달구지 길을 키 높이의 고대 토성이 막아 나서고 있었다. 토성 밖에는 참호가 방어선을 하나 만들고 이 유일한 출입구를 이중으로 봉쇄하고 있었다.

  해방 전, 일본학자들은 이 성곽 유적지를 고찰하고 태평구(太平溝)산성이라고 명명한다. 태평구는 바로 산 동쪽의 태평촌太平村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태평촌은 오래 전에 벌써 근로촌(勤勞村)이라고 개명, 태평구라는 이 옛 지명을 유야무야하게 만들었다. 훗날 산성 역시 인근에 유명한 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편검산성(偏臉山城)이라고 개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 걸로 보인다.

  그렇든 말든 패랭이 산에 도사가 살았다는 건 누군가 제멋대로 지어낸 허망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영승촌에 살았던 장영자 노인의 회억은 패랭이 도사의 이야기에 더구나 그 어떤 연상의 끈을 달고 놓지 않고 있었다.

  “옛날 중국 사람들이 늘 패랭이산에 가서 향불을 피웠지요…”

  그러나 산에는 돌투성이의 비탈과 밭만 있을 뿐이며 무덤이라곤 하나도 없다. 사찰이나 성황당 같은 게 있었다는 문헌기록은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다. 패랭이 산은 전혀 향을 피울 곳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구리불상과는 달리 패랭이 도사가 왜서 항간에 꼬리와 대가리가 없는 이야기의 한 토막만 남겼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아무튼 동불사에는 패랭이 도사처럼 구리불상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옛날 동불촌 북쪽 ‘덕대 마을’의 논에서 황금빛의 금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불상을 위해 사찰을 지었고 ‘덕대 마을’도 이에 따라 금불사(金佛寺)라고 개명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후 사찰은 훼손되었고 금불도 어디론가 자리를 떴다고 한다.

  부처나 도사만 아니라 예수도 깜짝 등장한다. 금불사 동쪽의 영풍동(永豊洞)은 예전에 촌민들이 천주교를 신봉한다고 해서 영원히 믿는다는 의미의 영신동(永信洞)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2년 풍작을 거둔다는 의미의 영풍동으로 개명했던 것이다.

  강물은 예나 제나 동으로 흐르지만 강기슭에 있었던 구리불상이나 패랭이 도사 그리고 금빛의 금불상과 천국의 예수님은 언제인가부터 사진 없는 아리송한 기억만 남겨놓고 있었다. 어쨌거나 패랭이산 기슭의 주인은 풍진(風塵) 세상에 몇 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명히 어느 한사람만 아니었던 것이다.*

 

네, “산은 서있어도 물은 흐릅니다.” 백년 천년 세월 속에 주인이 바뀌고 지명이 바뀌고 있습니다. 흐르는 세월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길림성 장춘 전정남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퀴즈프로 담당자앞:

  박은옥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우리말 방송프로를 제작,방송하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날마다 국제방송국 조선어방송을 듣는 것은 벌써 저의 일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으로 습관화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프로 [청취자의 벗]을 즐겨듣습니다. 퀴즈풀이 문제도 예전과 달리 방송에서 언급했던 내용에서 답안을 찾아야하니 방송에 귀를 더 기울이고 있습니다.

  9월의 퀴즈도 8월과 마찬가지로 연변의 지명과 관련된 문제이지요. 8월의 퀴즈답안에서 도문의 옛 이름을 회막동이라고 대답했는데, 회막골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9월의 퀴즈문제에서 연변 조양천은 강에서 불러진 이름이 아니라 양천 허씨 가족이 맨 처음으로 그 곳에서 봇짐을 풀고 삶의 터전을 가꾸었던 곳임으로 불러진 이름입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그 옛터를 찾아볼 수 없으나 조양천진 조양1대 이름만은 옛터를 자키고 있다고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9월 26일 장춘시 쌍양구 애청자 – 전정남 올림”

 

  네, 전정남 청취자가 보내온 9월의 퀴즈 답안은 정답입니다.

  전정남 청취자는 편지에서 회막동과 회막골의 다른 점이 뭔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요. 회막동이라는 동(洞)은 골 동(동)으로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며 또 마을, 동네 그리고 동굴을 이르는 뜻으로 쓰입니다.

  옛날의 그 마을을 회막동이나 회막골로 다 통한 원인을 알 수 있겠습니다.

 

  네, 지난 주 길림성 연길의 박철원 청취자, 왕청의 리강춘 청취자가 보도원고 형식으로 “연길 뢰봉반의 이야기”, “불로송노래교실의 야외과당 이야기”, “마을의 급시우로 되고 있는 ‘연변의 좋은 사람’의 이야기” 등 동네방네의 즐거운 이야기들을 여러 편의 편지에 담아 보내왔습니다.

  늘 우리 방송을 여러 가지로 관심하고 청취해 주셔서 거듭 감사합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립니다.

  9월 이달에는 중국 연변 ‘조양천’의 지명 내원을 퀴즈로 내어드렸는데요, 정답은 ‘양천 허씨’입입니다. 조양천은 강에서 불러진 이름이 아니라 양천 허씨 가족이 맨 처음으로 그 곳에서 봇짐을 풀고 삶의 터전을 가꾸었던 곳임으로 불러진 이름입니다..

 

  10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 용정의 명동마을은 학교로 유명세를 탔던 마을인데요, 이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갑: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갑),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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