赵玉丹
2020-10-09 11:54:17 출처:cri
편집:赵玉丹

[청취자의 벗]10월 8일 방송듣기

[청취자의 ]

2020년 10월 8일 둘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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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시곡 1'02" 혼합)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 두 번 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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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

10월 8일, 이날은 양력 한해에서 281일째 되는 날입니다. 인제 올해 한해가 84일 남았습니다.

 

1948년의 이날, ‘국제가’의 작곡가 피에르 드 제테 (Pierre De Geyter)가 출생했습니다.

‘국제가’는 지난 2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공산당 선언에 버금가는 중요한 상징 중 하나입니다.

 

234년의 이날 삼국시대 촉한의 뛰어난 군사가, 정치가인 제갈량이 출생했습니다.

제갈량은 유비(劉備)를 도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曹操)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점령하였습니다. 221년 한나라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이 되었습니다.

 

10월 8일 이날은 또 중국 전국 고혈압의 날입니다.

1998년, 고혈압의 위험에 대한 사회 각 계층의 인식을 높이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고혈압을 예방, 방지하고자 중국 보건부는 매년 10월 8일을 전국 고혈압의 날로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0월 8일 이날은 중국 항공우주의 날이기도 합니다.

1956년 10월 8일, 중국국방부 제5연구원이 설립되었습니다. 항공우주를 보다 잘 이해하게 하고 중국 항공우주사업의 보다 좋고 빠른 발전을 떠밀기 위해 중국 항공우주과학기술그룹회사는 2007년부터 해마다 10월 8일을 ‘항공우주의 날’로 설립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고정 간주)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용과 범이 서로 싸웠다는 와룡촌의 이야기입니다.

 

용이 살던 마을 와룡동

 

골짜기의 어구에 있는 이 마을은 옛날 상발원(祥發源)이라고 불렸다. 광서(光緖, 1875~1908) 연간 한(韓) 씨 성의 사람이 마을에서 술을 빚었는데 그 술의 상호가 바로 “상발원”이었다고 한다. 이 술의 상호를 패쪽처럼 걸어놓은 마을은 자의든 타의든“주막”으로 등장하게 된 셈이다.

이 주막의 이름은 나중에 민흥촌(民興村)으로 바뀌었다. 민흥촌은 1958년 대약진(大躍進) 운동 때 지은 이름으로 인민이 흥성, 번영한다는 뜻이다.

정작 술의 향긋한 기억은 흙길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먼지에 묻히고 있었다. 그런데 흐릿한 그 기억마저 미처 퍼즐을 맞출 사이가 없었다. 누군가의 외침이 바람을 타고 또 잔등에 따끈하게 맞혀왔기 때문이다.

“차가 갑니다. 길을 좀 비켜주세요~”

뒤미처 자전거 한 대가 휭 하니 곁을 지나 골짜기로 달려간다. 안장 앞뒤에 달아놓은 플라스틱 통들이 우둥탕 맞부딪치면서 어지러운 장단 소리를 길가에 떨어뜨렸다.

저만치 걸어가던 길손이 푸념 삼아 던지는 소리는 먼지처럼 자전거를 쫓아갔다. “참 급한 사람이구먼. 그 사이에 샘물이 다 마를까?”

알고 보니 골짜기의 막바지에 샘물이 있단다. 물맛이 좋다고 소문나서 물 긷는 사람들이 늘 줄을 서고 있었다. 예전에 그 샘물로 빚었던 술은 맛이 정말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덩달아 골짜기로 향한 일행의 걸음이 바빠졌다.

5리 정도 걷자 밭머리의 쑥대 사이에 석물 하나가 언뜻 나타났다. '와룡촌'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지금은 민흥 3대(隊)와 4대, 예전에는 와룡동(臥龍洞)이라고 불렸던 옛 동네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와룡동은 동네 서쪽에 웅크리고 있는 산이 마치 커다란 용 한마리가 뒤틀고 누워있는 듯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석물 뒤쪽의 농가에 가서 기척을 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혼자서 점심밥을 짓고 있었다. 잡동사니가 널린 구들에는 아들의 전화번호를 적은 하얀 종이장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자식들은 모두 시내로 진출했고 그가 홀로 고향집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연변 시골의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속도였다.

“소를 살찌우려면 산에 보내고 사람이 출세하려면 시내에 가야 하지요.” 김동욱 옹은 일행의 안쓰러운 눈길을 읽었는지 이렇게 변명조로 말꼭지를 뗐다.

실제 그의 부친이 도문 서쪽의 위자구(葦子溝) 일대에서 연길 서쪽 근교의 와룡동으로 이사를 올 때에도 이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위자구는 광서 초년에 형성, 사면이 산에 둘려있다고 해서 보루와 같다는 의미의 위자구로 작명되었다. 훗날 갈대 위(葦)자가 에울 위(圍)자로 쓰이면서 위자구(葦子溝)로 되었던 것이다.

위자구는 지명조사를 하던 1982년경 1천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20명 정도의 만족과 회족을 제외하고 모두 조선족이었다.

이에 비하면 와룡동은 아예 순 일색의 조선족 마을이었다. 김동욱 옹이 부친을 따라 이사를 왔던 1944년은 물론 그 후의 약 40년 동안 내내 그러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부터 도시진출이 본격 시작되면서 토박이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떴고 이어 외지의 다른 민족이 들어와서 빈자리를 메웠다.

솔직히 김동욱 옹의 부친이 남부여대하고 고향 함경북도 어랑군을 떠날 때는 꼭 시내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말이 밭이지 돌무지나 다름없었다고 하지요. 돌을 번지면서 기음을 맸다고 합니다.”

그때 두만강 건너 쪽 미개척지의 간도는 희망의 땅이었다. 미구에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위자구 일대에 와서 거처를 잡았지만 가난한 살림은 종내 펴이지 않았다. 기왕에 산골에서 살 팔자라면 도회지 냄새라도 맡아야 된다면서 다시 이삿짐을 싸들고 찾은 고장이 이 와룡동이었다.

와룡동은 19세기 말 함경북도의 간민들이 들어와서 개척한 마을이다. 일찍 1907년 벌써 80세대가 사는 큰 동네로 되고 있었다. 이 무렵 기독교인 오상근, 이병휘, 남성후 등은 민족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와룡동에 창동(彰東)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 또 중학부를 부설하고 학교이름을 “사립창동중학교”로 명명하였다. 당시 학교에는 학생이 100여명 되었는데 외지의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중에는 멀리 조선과 연해주 일대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학교는 신학교육과 반일교육을 실행한 동시에 군사과목을 설치, 훗날의 반일무장투쟁을 위해 많은 군사인재를 육성했다.

그러나 김동욱 옹이 와룡동으로 이사를 왔을 때 창동학교는 옛 건물의 흔적만 가까스로 남기고 있었다. 1920년 경신년(庚申年) 일본군의 토벌 때 학교 건물이 죄다 불타버렸고 대부분의 교원들은 외지로 떠났던 것이다. 1935년 창동학교의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념하여 세운 “사은(師恩)기념비”가 옛날의 번성했던 학교의 모습을 마을 동쪽의 산비탈에 얼추 그려놓고 있었다.

창동학교는 일본이 항복한 후 다시 와룡동에 부활한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서쪽 산비탈의 옛터를 버리고 마을 북쪽의 평지에 따로 학교 건물을 세웠다. 김동욱 옹은 어릴 때 새로 지은 이 창동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학교를 내놓고 또 과외처럼 즐겨 다니던 곳이 있었다. 그와 또래들은 예배를 보는 날이면 학교 북쪽에 있는 교회당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전 씨 성의 집사가 우리 아이들을 모여 놓고 재미있는 옛말을 들려줬지요.”

교회의 전집사는 조선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일본 전함을 물리치던 이야기 등을 구수하게 풀어놓았다고 한다. 서적이 금처럼 귀하고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었던 시골에서 정말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과 같았다.

조선인 이민들의 최초의 민족계몽운동과 반일운동은 이처럼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었던 것이다.

간도에서 선교활동은 조선인 간민들의 대량이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캐나다 장로회는 북간도에 선교사와 전도자를 파송, 1906년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뒤미처 용정의 기독인이 간도의 조선인 전도를 위해 멀리 함경도 원산까지 가서 기독교 서적을 구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도가 본격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7년 남감리회는 이화춘과 이응현, 캐나다 장로회는 김문삼을 간도에 파송한다. 이화춘은 와룡동교회, 이응현은 모아산교회를 설립하며 장로회는 용정교회를 설립하였다. 모아산은 와룡동 골짜기에서 바로 정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둥그런 산이다. 1915년 경 간도에 36개 교회가 개척되며 또 교회의 주도로 많은 학교가 세워진다.

간도지역 최초의 민족운동단체인 “연변교민회(훗날 국민회로 개칭)”는 기독(基督) 인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국민회를 통한 기독인들의 반일운동은 군자금 모금, 독립군 양성 등으로 이어졌다.

바로 창동학교에 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대한청년회 본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졸업생들은 철혈광복단에 참가하여 희생적으로 싸웠다. 1920년 용정 선바위 부근에서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 “15만원탈취사건”의 골간인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반일지사들은 모두 와룡동 출신이다.

와룡동에서 교세는 연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8.15 광복 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미구에 철거의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김신숙(1938년 출생) 노인이 와룡동으로 시집을 오던 1956년에만 해도 와룡동교회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때 김신숙 노인은 바로 와룡동교회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목사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선 것은 아니었다.

“그때 교회는 이름뿐이었지요. 벌써 예배를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수십 평 크기의 교회건물은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어있었다. 김신숙 노인의 시집은 마침 길 건너 바로 서쪽에 있는 이 널찍한 교회당을 예식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 특이한 인연이 이어졌는지 김신숙 노인은 지금 독실한 교인으로 있었다. 그는 지병 때문에 운신이 불편했지만 교회당 옛터를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고 하면서 기어이 안내를 나섰다.

우리 일행이 발길을 멈춘 곳은 와룡동의 제일 북쪽이었다. 거기에는 고층건물의 휴양소가 땅을 박차고 일어서고 있었다. 이 휴양소 앞마당의 동쪽 귀퉁이가 바로 교회당 옛터였다. 옛터에는 시공현장의 철근과 나무 조각 따위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와룡동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와룡동교회는 그렇게 제멋대로 자란 쑥대처럼 허무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민흥촌의 직속마을이었던 과수마을도 어느덧 집단기억에서 소실되고 있었다. 과수마을은 일명 5대 마을로 서쪽의 고개 너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예전에 동쪽의 와룡동과 짝을 맞춰 와호동(臥虎洞)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이쯤하면 누군가는 대뜸 와룡동과 와호동을 두고 좌청룡이요 우백호이요 하면서 풍수설을 들먹거리겠지만 실제로 이 옛 지명은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기세를 은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와룡동 마을에 영웅호걸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의 샘물은 와룡동의 동쪽 골짜기에서 예나 제나 변함없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샘물을 마시던 용은 단지 지명에 화석으로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정 간주]

 

네, 산 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는 와룡동과 와호동,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모양새를 머리에 떠올리게 하는 지명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노래 한곡)

[청취자의 편지 사연]

 

: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한국 김연준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한가위 연휴는 코로나로 인해 고향과 친지 방문을 자제하고 성묘도 사전에 다녀와 조용히 보내다 보니 전국적으로 교통 이동량도 감소해 평온한 추석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코로나 환자는 1일 100명 미만을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유지되면 조만간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청한 '그리운 금강산'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곡은 남북에서 모두 사랑받는 특별한 가곡입니다.

 

예년 같으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열렸을 텐데 현실이 그렇지 못해 아쉽습니다만 청와대는 남북정상이 친서를 주고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75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세계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엔정신이 가정 절실하게 요구되는 곳이 한반도"라며 "종전선언"을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영구적으로 종식되도록 유엔과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 달라고 요청하고 "종전선언이야 말로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종전선언과 한반도 비핵화가 달성된다면 한반도 평화와 민족번영이 이뤄질 것입니다.

 

해외에 계신 청취자께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한국 김연준 올림"

 

네, 코로나 사태기간 한국 전국적으로 고향과 친지 방문을 자제하고 평온한 추석으로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계속 잘 관리되어 지속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랍니다.

 

길림성 왕청의 이강춘 청취자는 연길 조양천국제공항 왕청도시공항터미널이 정식으로 운행되었다고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9월 30일 오전, 연길조양천국제공항 왕청도시공항터미널 직행뻐스가 연길조양천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는 연길조양천국제공항 왕청도시공항터미널이 정식으로 운행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연길조양천국제공항 왕청도시공항터미널은 연길공항이 훈춘, 돈화, 룡정, 화룡도시공항터미널 건설 이후 설치한 다섯번째 타지역 도시공항터미널로 안전운행을 보장하고 방역 표준을 강화화는 전제하에 광범한 여객들에게 편리한 출행방식을 제공해 “국경절+추석” 명절기간의 출행수요를 만족시킬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강춘 청취자는 또 길림성 동부의 왕청 가야하국가습지공원 부근의 한 못에서 추석에 즈음하여 국가 2급보호동물인 원앙새가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모습이 최초로 포착됐다고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왕청가야하국가습지공원은 2015년에 국가급 습지공원으로 비준되였는데 계획 총면적은 1161정보에 달합니다. 습지공원을 가로지르는 가아햐유역은 물자원이 매우 풍부해 지역내에 대면적의 초본습지, 덤불습지, 삼림습지가 형성되어 있습다. 특이한 지역지형과 다양하고도 복잡한 식생류형으로 다양한 생태환경이 조성되면서 야생동물에게 적절한 번식, 서식환경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현지 답사 등 해당 자료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척추동물 206종, 량서류 10종, 파충류 11종, 조류 132종, 포유류 동물이 32종 분포되어 있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래 한곡]

[퀴즈 한마당 코너]

 

: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립니다.

 

10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 용정의 명동마을은 학교로 유명세를 탔던 마을인데요, 이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명동마을’은‘ 무슨 뜻으로 지어진 이름일까요.

 

10월 3일자로 한국 대구의 구원모 청취자가 정답을 이메일로 보내왔습니다.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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