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11-09 14:28:38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11월 5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1월의 첫 번째 목요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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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월

MC:

11월 5일 이날은 양력 한해에서 309번째 되는 날입니다. 인제 올해 한해가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56일 남았습니다.

11월 5일 이날은 ‘세계 쓰나미의 날’입니다. 유엔 총회는 2015년 전부의 표결로 결의를 채택하고 일본이 제안을 수용했으며 이날을 ‘세계 쓰나미의 날’로 결정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후 일본 정부는 11월 5일을 ‘쓰나미 재해 방지의 날’로 정하고 또 유엔에 결의안을 회부했으며 이날을 ‘세계 쓰나미의 날’로 정할 것을 바랐습니다. 쓰나미의 습격을 받았던 동남아 그리고 남미 등 지역 140여개 나라가 이 결의안의 공동 제안자로 되었습니다.

11월 4일은 러시아 인민단결의 날입니다. 이날은 러시아 국가 휴식일입니다. 2005년 11월 4일 러시아는 처음으로 이 명절을 쇠었습니다.

11월 6일은 ‘전쟁과 무장충돌 환경훼손 방지’의 날입니다.

유엔 총회는 2001년 결의를 채택하고 해마다 11월 6일을 ‘전쟁과 무장충돌 환경훼손 방지’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총회는, 무장충돌에서 받은 환경 파괴는 충돌 후에도 장기적으로 생태계통과 자연자원에 위해를 주며 늘 국가 계선 밖에도 영향을 주고 그 위해와 영향은 후대에게도 연장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총회는 우리의 공동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1월 6일 이날은 또 중국의 유명한 삼협공정이 강의 물 흐름을 막은 기념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조선반도 남부의 이주민이 정착했던 길림성 연변 안도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남도 사람들의 외로운 섬

  촌장은 일 보러 나가고 아내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의 오랜 토박이를 찾는다고 했더니 마침 이웃에 살고 있는 그의 삼촌이 마을 초창기의 이민이라고 알려준다. 뒤미처 취재를 할 수 있을 런지 하면서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저기, 우리 삼촌은 귀를 잡숴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노인은 귀가 약간 멀었다고 한다. 나이가 여든 둘이라고 하니 그럴 법한 일이였다.

  정작 놀라운 건 노인의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는 70년 전에 있었던 정경을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여덟 살 나던 해였어요. 기차에 앉아 밤낮으로 닷새를 달렸어요.”

  1938년 6월 19일 경상남도 합천군, 밀양군의 사람들은 대구에서 열차에 앉아 24일 명월구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무려 100가구에 달하는 집단 이민이었다. 정작 어린 이춘수 옹이 아는 사람이라곤 아빠와 엄마, 누나 그리고 동생 넷뿐이었다. 그들은 여행기간 이웃한 좌석의 사람들과 한두 마디 말을 건네면서 대강 풋면목을 익혔다고 한다.

  두만강 북쪽의 간도는 그들에게 희망의 땅으로 되고 있었다. 만척주식회사의 요원은 개척민을 모집할 때 간도에서 감자가 목침만큼 크게 자라고 조 이삭이 개꼬리만큼 크게 드리운다고 사람들을 유혹했던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후 사람들은 강기슭을 따라 약 20리 타박타박 걸어서 북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이 강은 아무런 이름도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후 비로소 장흥하(長興河)라는 이름을 달았던 것이다. 장흥(長興) 경내를 지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장흥은 오랫동안 흥성하라는 의미이니, 상서로운 그 이미지를 강에 함께 나눠 담으려 했던 것이다.

  그럴지라도 초창기의 이민들에게는 눈물의 강이었다. 그때 이름을 달았더라면 가슴에 맺힌 한이 흐르고 흘러 둑을 넘었을지 모른다. 만척주식회사에서 미리 약속했던 소는 두 가구당 한 마리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더구나 논에서 잔뼈를 굳혔던 사람들이였지만 벼농사를 버리고 엉뚱하게 밭농사를 짓게 되었다. 마을은 강을 끼고 있었지만 농사를 지을만한 곳은 전부 산비탈이었던 것이다. 낫으로 싸리나무를 베어내고 괭이로 밭을 일궜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였다.

  아직 어린 이춘수 옹은 그보다 더 큰 고달픔이 있었다. “끼마다 좁쌀 밥이 싫다고 떼를 썼어요. 모래알이 입안에서 뒹구는 것 같았어요.”

  고향에서는 늘 하얀 쌀밥을 먹었던 것이다. 잡곡밥이라고 해봤자 보리와 입쌀을 섞은 것이었다. 그런데 만척주식회사의 배급은 주식으로 좁쌀과 감자, 부식으로 미역과 무 오가리 뿐이었다. 그마저 나중에 농사를 지어 다 갚아야 할 빚이었다.

  “지금이야 입쌀보다 더 비싸졌지만… 정말 철딱서니 없이 흥타령을 한 거지요.”

  그때 이민들이 자리 잡은 곳은 도안(島安)이라는 마을이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일찍 1881년경부터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 고장에서 제일 먼저 개발된 지역의 하나였다. 마을은 장흥하 두 지류 사이의 언덕에 위치, 흡사 작은 섬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평안한 삶을 기원해서 섬 도(島)와 편안할 안(安)을 합쳐 도안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었다. 도안은 새 이민이 정착하면서 단번에 큰 마을로 덩치를 불렸다

  이러니저러니 경상도 이민들은 예전에 학수고대했던 꿈을 이루기는커녕 쌀밥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이 무렵 만주국 정부의 한 조선인 요원이 고찰차로 마을을 다녀갔다. 그는 이민들의 생활고를 보고 무언가 가슴에 켕겼던지 얼마 후 인편에 북과 장고를 보내 왔다. 이민들의 설음 많은 타향살이는 드디어 농악에 실려 만주의 허허벌판에 울려 퍼졌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인간 인생 춘몽이라오.

   타향살이 눈물 나오…”

  도안촌의 농악은 만주국 ‘건국’ 10주년 때 초청을 받아 신경(新京)의 무대에 올라선다. 이때 단연 콩쿠르 1등상을 수상하여 자그마한 시골마을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렸다. 신경은 지금의 길림성 소재지인 장춘(長春)의 다른 지명이다.

  “망향가”의 애절한 곡은 더구나 경상도 사람들의 향수를 부르고 있었다.

  1949년 3월 15일, 노인들로 이뤄진 좌상회의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이춘수 옹은 이들 모임이 지금 말하는 독보조와 유사하다고 해명했다. 이때 경상도 이민 60가구의 전부가 산골을 떠나 벌 지대로 내려왔다고 한다. 노인 권위를 앞세운 경상도 주민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옛날의 마을 자리는 지금 도안촌의 옥수수 밭으로 되었어요.”

  사람들은 아래쪽의 펑퍼짐한 강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를 베어 기둥으로 받치고 억새풀을 베어 이영으로 삼았다. 이윽고 수십 가구의 인가가 장흥하 기슭에 나타났다. 도안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만든 마을이라고 해서 그냥 도안툰(島安屯)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풀을 베고 흙을 깔아 오매에도 그리던 논을 한 뙈기 두 뙈기 만들었다.

  그 무렵 이춘수 옹은 어느덧 19세의 열혈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서쪽의 마을인 주가툰(周家屯)의 처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주가툰은 오봉촌(五峰村) 서북쪽의 논자리에 있었던 마을로 주 씨 성의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오봉촌은 오봉산 기슭에 위치한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오봉산은 도안툰 사람들에게 그저 앞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거기에 도라지 밭이 있었어요. 새파란 꽃들이 무더기로 피었지요.”이춘수 옹이 이렇게 말했다.

  누구라도 오봉산에 올라가면 아침나절에 금방 도라지 한 포대를 캤다고 한다. 기실 오봉산에 소문을 놓은 건 천 년 전의 옛 산성이었다. 아직도 토성, 성문 등 흔적이 남아있지만 이춘수 옹의 기억에는 도라지처럼 그렇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오봉산 주위에 옛 산성뿐만 아니라 고분, 봉화대, 사찰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지만, 옛 선인들은 더는 만나볼 수 없다.

  불과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마을도 이런 유적처럼 어느덧 옛말로 남고 있었다. 오봉촌은 예전에 조선족이 열에 일여덟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나저나 도안툰은 여전히 순 일색의 조선족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름은 오래전부터 달리 바뀌고 있었다. 지난 세기 70년대 주택을 재건, 전부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새마을이라는 의미의 신툰(新屯)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새 주택은 땅콩집의 형태로 한 지붕에 두 가구 들어있었다. 집들은 겉모양만 아니라 실내구조도 똑 같았다. 각자 독립된 공간을 소유, 가구마다 대문과 앞마당, 텃밭이 있으며 울타리로 분리되고 있었다. 하나로 뭉친 집단의 결집력과 아름다움, 낭만이 묻어나고 있었다.

  안도에서 이처럼 벽돌로 쌓고 기와를 얹은 집의 마을은 신툰이 맨 처음이라고 한다. 신툰의 사람들도 진짜 특이한 사람들로 뭇사람들의 시야에 떠오르고 있었다. 연변에서 남다른 사투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변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강한 함경도 억양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방언의 차이로 남도치(한국에서 이주한 사람), 북도치(북한에서 이주한 사람)으로 구분한다. 북도치에 에둘리고 있는 남도치의 마을은 외로운 섬처럼 아주 유표하다.

  약 10년 전, 이춘수 옹은 신툰의 고향방문단 7명의 일원으로 합천군 땅을 밟았다. 그러나 어린 기억에 담고 있었던 옛 고향의 모습은 더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상 이춘수 옹은 이미 명실공한 연변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강 건너 옛 고향의 흔적은 인제 신툰의 ‘경상도 마을’이라는 별명에 어슴푸레 남아있을 뿐이었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신툰은 여느 조선족마을처럼 한때 한족들이 빈집에 세를 들어 입주했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은 신툰이 민속촌이라고 하면서 기어이 타민족 입주를 불허했다. 때도 시도 없이 찾아오는 노인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한족들은 이삿짐을 쌌고 그 뒤로 누구도 마을에 머리를 기웃거리지 못하고 있단다.

  그러나 고향 지킴이의 결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은 그냥 줄을 이었다. 누군가는 돈벌이를 갔고 누군가는 큰 도시로 이사했으며 누군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 또 하나 마을에서 가뭇없이 종적을 감췄다.

  “10년전 만 해도 북소리가 떨어질(그칠) 새 없었는데요.” 이춘수 옹의 탄식조로 하는 이야기였다.

  신툰의 농악은 지난 세기 90년대 일약 상승세를 그었다. 한때는 중앙방송의 전파를 타고 중국의 전역에 알려졌다. 이춘수 옹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주년 행사 문예공연에서 쪽지게를 메고 농악가락에 맞춰 얼씨구절씨구 춤을 추었다고 한다.

  어쩌면 선인들이 오매불망 바라던 옛 꿈이 마침내 화려한 현실로 이뤄지고 있는 듯 했다.

   “…꽹과리야 북장단아

   저승에서 살아왔다

   이승 좋아 못가겠네.

   한오백년 살고지고.”

MC:

네, 신툰은 독특한 마을 풍속으로 하여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끄는 명소로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간주]

언제나 찾아도 고향의 어머니의 품 같은 시골마을입니다.

도시화의 발전에 따라 많은 시골마을이 사라지고 있는 현 주소입니다.

중국 농촌 소재의 소설도 이처럼 굴곡적인 길을 걷고 있습니다.

미디어 혁명의 산물로서 중국 농촌 소재의 인터넷 소설은 20여년의 모색과 발전을 거쳐 소재 종류나 창작수준, 전파형태가 날을 따라 완벽화되고 있습니다. 그 산업행정도 미디어전파를 따라 날을 따라 규범화 되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까지 극장에 배급되었거나 온라인에서 상영된 영화, 드라마 작품은 400여부입니다. 그러나 농촌소재의 작품은 단 5부였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농촌소재의 문학작품 수량이 적고 우수한 작품은 더구나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터넷문학의 영화, 드라마를 창작하기 힘들었습니다.

농촌소재 창작은 상업화의 관성적인 역량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소실되지는 않는다고 전문가들이 지적합니다. 이와 반대로 도시와 청춘 등 소재가 고도로 유형화, 동질화 되면서 현실소재가 사상과 이야기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농촌소재의 문학에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

 이런 배경하에서 중국 인터넷 작가들의 온라인 훈련반도 개설되어 인기를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영사막에서 다시 농촌소재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을 그날이 기대됩니다

  지명 이야기에서 말씀드린 ‘남도 사람들의 외로운 섬’처럼 농촌소재의 작품도 문학의 세계에서 독특한 ‘섬’으로 되어 이채를 뿜길 기대합니다.

[노래 한곡]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0월에는 중국 연변 용정의 지명 ‘명동마을’의 내원을 퀴즈로 내어드렸는데요, 정답은 ‘동쪽을 밝힌다’입니다. 명동학교가 마을의 시원이라고 현지의 지명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약연 초대 교장 등 이민들이 “밝은 민족의 새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명동’이라는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지난 한달 동안 많은 청취자들이 답안을 보내왔는데요, 모두 정답이었습니다.

  11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연변 도문의 백룡촌은 옛날에 다른 지명이 있었는데요, 이 지명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백룡촌의 다른 지명은 무엇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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