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银玉
2020-11-13 21:42:35 출처:cri
편집:朴银玉

[청취자의 벗] 2020년 11월12일 방송듣기

[청취자의 벗]

2020년 11월 12일 두 번째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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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시곡 1'02" 혼합)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1월 두 번째 목요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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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연해주의 이주민이 정착했던 길림성 연변 안도의 시골마을 이야기입니다.

 

            두루미가 춤추던 버드나무의 마을

 

  안도 현성을 벗어난 차는 산기슭을 따라 한참이나 달렸다. 골짜기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강기슭의 마을이름을 따서 남류하(南柳河)라고 불린다고 한다. 남류촌은 부르하통강 남안에 위치하고 버드나무가 무성하다고 지은 이름이다.

  정말이지 간민(墾民)들이 이 마을을 형성하던 지난 세기 30년대나 있었을 법한 이야기였다. 버드나무는 강기슭에 듬성듬성 서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골짜기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비칠거리고 있었다.

  북쪽의 첫 동네인 신남류촌(新南柳村)에서 차를 멈췄다. 신남류촌은 1948년 남류촌의 일부 농부들의 경작지가 가까운 데로 이사하여 정착하면서 생긴 지명이다. 웬 일인지 연거푸 두세 집이 모두 비어 있었다.

  “이게 사람이 사는 마을이 맞긴 하나?”

  부득불 두 번 째 마을인 중흥툰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중흥툰은 신남류촌과 무학촌의 가운데 위치하며 또 마을의 흥성을 바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현지인들은 아예 ‘중간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해괴한 일은 ‘중간마을’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첫 집은 나뭇가지를 달아서 만든 사립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두 번째 집은 금방 찌그러질 듯한 폐가였다. 세 번 째 집에 들려서야 비로소 웬 아낙네가 문을 열었다. “중간마을”이 순 조선족마을이라고 하더니 웬걸, 알짜배기 중국인이었다. 아낙네는 촌장을 찾는다고 하자 이사를 온 외지인이라서 잘 모른다고 했다.

  아무래도 또 헛물을 켤 것 같았다. 차를 타고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마침 이웃집 마당에서 잔일을 하는 중년 사내가 눈에 띄었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그러나 울바자 위로 날아오는 대답은 일행에게 단통 찬물을 끼얹고 있었다.

  “잘못 오셨나 본데요. 촌장은 진(鎭, 한국의 읍)에 올라가서 살고 있습니다.”

  들어보니 촌장은 볼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차로 내려온다고 한다. 촌장도 인제 진장(鎭長) 어른이라도 된 듯한 행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궁벽한 시골이라고 뭐나 허술하게 볼 게 아니었다.

  누가 마을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중년 사내는 대뜸 위쪽의 벽돌집에 사는 노인이라고 알려준다.

  “성씨가 선우(鮮于)인데요, 우리 마을에서 연세가 제일 많습니다.”

  손기척을 여러 번 해서야 문이 빠끔히 열렸다. 할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바느질감을 손에 든 할머니가 이쪽으로 머리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늙은 양주는 낯선 불청객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할아버지는 당금 축객 명령을 내릴 듯 문설주를 짚고 엉거주춤 서있었다.

  시골에서 이다지 인심이 각박해졌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마음이 슬퍼졌다.

  할아버지는 일행이 찾아온 경유를 듣다 말고 손을 홰홰 내저었다. “이보게, 취재를 왔다는 게 맞긴 한가? 기자증명서를 보여줄 수 없겠나?”

  뒷이야기이지만, 독거노인들을 노리고 이런저런 장사꾼들이 자주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웃집의 누군가는 아들, 며느리가 베개머리에 챙겨준 지전을 그 무슨 ‘만병통치’의 약을 사느라고 한방에 날려버렸다고 한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울화병’을 사서 지금도 고생한다는 것.

  “이틀 건너 마을을 찾아온다네. 성가시게스리(성가시게 말이네).” 선우 옹은 다소 겸연쩍어하면서 이렇게 해석했다.

  그는 이름이 희열로 항렬에서 넷째라고 했다. 평안북도에서 살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형을 번갈아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선우는 한국 성씨이다. 옛날 기자(箕子)의 맏아들 송(松)이 조선 2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아우 중(仲)을 우(于) 땅에 분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했으므로 그 자손들이 조선의 선(鮮)자와 우산국의 우(于)자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로 성씨를 삼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옛 고향이 선우 옹에게 전승된 기억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곽지(‘괭이’의 함경도 방언)’로 땅을 일궜다고 하네.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고향을 떠났다고 들었네.”

  선우 옹은 거의 말마디마다 함경도 방언을 넣고 있었다. 그는 이민 2세로 1932년 부르하통하 남안의 대성툰(大聖屯)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대성툰은 조선인마을로 천주교 교회당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선우 옹은 어린 시절을 대성툰 바로 위쪽의 경성툰(鏡城屯)에서 보냈다고 한다. 경성툰은 함경북도 경성군의 이민들이 살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함경도 고유의 방언은 그때부터 벌써 선우 옹의 피 속에 남류하의 물처럼 소리 없이 잔잔하게 흘러들었던 것이다.

  8.15 광복이 나기 전 선우 씨 가족은 다시 남쪽의 중흥툰(中興屯)으로 이사했다. 이 무렵 대성툰은 성스러울 성(聖)자를 버리고 성 성(城)으로 바꿨다고 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같은 이름자이지만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의미이다.

  그런데 진짜 하늘과 땅이 맞붙었는가. 두만강 저쪽에 멀리 떨어진 줄로 알고 있던 옛 고향 평안북도가 불현듯 선우 옹 가족의 지척에 다가왔다. 중흥툰과 이웃한 무학촌은 ‘평안북도 마을’이었던 것. 1910년경 평안북도 농부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다고 한다. 선우 성씨의 집성촌은 바로 평안북도의 태천군과 창성군, 평안남도 대동군에 집중되어 있다.

  실제 선우 옹의 선친도 평안북도의 집성촌에 본적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평안북도 용천군 학소리에 우리 선우 씨가 살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고 하네. 이름이 선우촌이라고 들었네.”

  뒷이야기이지만, 학소리(鶴巢里)는 용천군이 아니라 염주군에 있는 동리였다. 선우 옹의 기억에서 어느 고리인가 잘못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상 그렇게 헷갈릴 정도로 두루미 학(鶴)은 평안북도의 지명에 적지 않게 나타난다. 쌍학(雙鶴), 학흥(鶴興), 학산(鶴山), 학암(鶴巖), 학봉(鶴峰), 학당(鶴塘) 등등. 평안북도의 산과 바위, 물에 모두 두루미가 노닐고 있었다. 솔직히 평안북도는 두루미와 그 무슨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듯하다.

  평안북도의 두루미가 이 고장까지 날아온 것 같았다. 무학촌(舞鶴村)은 바로 두루미가 춤을 춘다는 의미이다.

  언제인가 선우 옹은 일부러 동구 밖의 언덕에 올라 무학촌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마을이 마치 춤추는 두루미의 목덜미를 타고 앉은 것 같았네.”

  그의 말에 따르면 지형적으로 두루미가 춤추는 듯한 형국이 마을 이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학촌은 산기슭의 낮은 둔덕을 가로타고 앉아있다. 멀리 서남쪽으로 기복을 이룬 산발들은 마을 쪽으로 목을 길게 내밀고 날개를 젓는 두루미의 천연 조각상을 방불케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무학촌이라는 마을이름이 이 때문에 생겨난 것 같기도 한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 예전에 간민들은 이곳에 왔을 때 늘 두루미가 춤추는 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무학동’이라고 마을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무학촌의 전신인 무학동은 워낙 서쪽의 골짜기에 있었다.

  선인(先人)들도 두루미가 춤추는 이 고장에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천 년 전, 그들이 살고있던 옛 성곽은 바로 두루미의 날개 아래에 있다. 이름하여 성문산(城門山), 말 그대로 ‘성문’의 뒤에는 옛날 옛적으로 떠나는 통로가 있었다.

  선우 옹은 천 년 전의 이 산성의 유무마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후문이지만 산성에 다녀온 촌민은 몇몇 되지 않았다. 훗날 만났던 무학촌의 조원호 씨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산성을 두고 하는 그의 말이 과연 ‘걸작’이었다. 산성은 옛날 마적들이 공산당 유격대를 막느라고 쌓은 거라는 것. 조원호 씨는 뭔가 크게 헷갈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지난 세기 30년대 마을에 토성이 옛 산성처럼 나타났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 한다. 괴뢰 만주국이 항일무장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해 집단부락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사를 왔을 때도 토성이 남아 있었네. 토성 밖에는 또 ‘장재’가 있었지.”

  장재는 판자를 가로 대어 만든 울타리의 함경도 방언이다. 윗마을인 남류촌에 토성이 있었고 아랫마을인 무학촌에 토성이 있었다고 한다. 중간마을인 중흥툰에는 웬 영문인지 토성이 없었다고 한다.

  선우 옹은 중흥툰은 바로 8.15 광복이 되기 직전에 생긴 마을이기 때문에 미처 토성을 쌓을 겨를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지명지의 기록에 따르면 중흥툰은 1935년에 형성된 마을이다. 일부 사람의 기억만으로는 마을의 전부를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어쨌거나 예전에는 세 마을 모두 순 조선족마을이었다는 게 확실하다. 전성기에는 인가가 무려 100가구에 치닫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마다 열댓 가구 정도밖에 남지 않고 있었다.

  선우 옹은 단 한마디로 줄여서 마을의 현 주소를 말했다. “말이 사람 사는 마을이지 빈 집이 더 많다네.”

  솔직히 선우 옹의 집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아들 부부는 한국에 돈 벌러 가고 손녀는 외지의 한국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썰렁한 집에는 그들 양주가 고독하게 지킴이로 남아있는 것이다.*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두루미는 바야흐로 둥지에서 날아가고 종전에 골짜기에 푸르렀던 버드나무의 숲도 더는 없었습니다.

(노래 한곡)

(코너 고정 간주)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한국 김연준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들어 보겠습니다.

 

“단풍이 최절정에 달하면서 전국 단풍명소에는 주말에 가족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가을 정취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만 입동이 지나고 기온이 떨어져 오늘 날씨는 많이 쌀쌀해 졌습니다.

한국의 코로나19 상황은 안정적인 상태로 관리가 되고 있으며 금일 신규 발생자는 국내발생 99명, 해외유입 27명으로 126명의 환자가 밸생했습니다.

1일 100명 내외의 환자가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제가 살고 있는 천안에도 환자가 발생해 약간 걱정하고 있습니다.

상해 국제수입박람회 개최를 축하합니다.

세계 각국이 코로나19로 인해 국제적 행사를 축소나 취소하는 가운데 중국은 방역에 성공한 자신감을 이번 상해국제수입박람회를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습근평 주석은 개막식 화상연설을 통해 중국은 개방, 협력, 단결, 상생의 신념을 견지하고 전면적으로 개방을 확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가 규모가 확대된 상해 국제수입박람회가 성공적인 박람회로 마무리 되고 한국의 참여 기업들도 좋은 성과를 얻기 바랍니다.

CRI 홈페이지 팝콘스튜디오에 실린 영상에서 송휘 아나운서께서 소개한 "스마타이 장성에 오르다"와 "가을여행 단풍지 담자사" 편을 잘 시청했습니다.

스마타이 장성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이징 근교의 유명 장성코스와는 다른 색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어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자사는 고목의 부부 은행나무 단풍이 유명한 곳이군요.

한국에는 사찰에 목어가 있는데 그곳은 석어가 있는 것이 차이가 있고 영상 마지막에 송휘 아나운서가 은행나무 잎을 하늘에 날리는 장면은 로맨틱한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음에는 사랑하는 연인과 방문해 함께 날리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말에 저는 통일부에서 실시하는 판문점 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해 임진각과 판문점 등을 둘러 보고 돌아 왔습니다.

임진각은 이산가족이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망향단이 위치한 곳으로 한탄강 넘어 북쪽 고향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주변에 공원과 캠핑장이 조성되고 한탄강을 가로 지르는 곤돌라(삭도)가 설치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판문점은 정전협정이 조인된 곳으로 최근 남북정상 회담이 열린 곳으로 군정위 회의실, 남북정상이 함께 걸었던 도보다리, 평화와 번영을 심은 남북정상의 공동기념식수 현장들을 돌아보았습니다.

DMZ를 통과하면서 자유롭게 날며 먹이활동을 하는 두루미를 보면서 남북도 하루속히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해 보았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 연준”

네, 김연준 청취자님이 편지에 쓰고 노래로 신청한 ‘한탄강’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었다고 하는데요, 지질학적이나 지형학적으로 명소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하지요.

‘한탄강;을 자유롭게 관광하듯 남북이 모두 너남 없이 두루미처럼 3.8선을 넘나들 수 있길 기원하겠습니다.

김연준 청취자님은 노래 ‘한탄강’을 신청하셨는데요, 음악자료를 찾을 수 없어 박진석이 부른 노래 ‘눈물의 한탄강’을 대신 보내드리겠습니다.

[노래 한탄강]

이번에는 ‘한 의용군 전사의 60년 전의 회억’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용군 전사 강근자가 구술하고 이성복 청취자가 대필했습니다.

도합 3천여자의 글 내용을 줄여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제가 60년전 보고 듣고 겪은 그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46년 3월, 저는 조선의용군 교도대에 입대했습니다. 1946년 9월, 우리는 용정 영국더기로 이동하였고 그해 10월 개학했습니다. 조선의용군 교도대는 훗날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가 바로 우리 조선의용군 교대의 개칭입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1947년 5월 5월 제1기 졸업식을 시작으로 4기까지 약 4800명의 고급군사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 총 후근부 부장이었던 고 조남기 상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이었던 조룡호 등도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저는 1947년 5월에 군정대학을 졸업한 후 길림군구 사령부 무전훈련반을 거쳐 전선부대 제10중대 사령부에 배치되었습니다. 천진, 북경이 해방된 후 1949년 7월 두만강을 건너 조선인민군 제5사단 군사 재판소에 편입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난 후 3.8선을 넘어 동해안을 따라 남진길에 올랐습니다. 우리 부대는 9월 23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00일이 걸려서야 자강도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숙영지에 도착한 후 하는 수 없이 산중에 남겨놓고 떠난 부상병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도 마음이 미여지는 것 같습니다.

매년 추석날 둥근달을 쳐다볼 때마다 저는 눈시울이 젖어납니다. “아직도 심산 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열사들을...” 이 노래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전쟁이란 이렇게 참혹한 겁니다.

우리 연변에는 520개나 되는 열사비가 있습니다. 연변 열사능원에는 1만 6300명의 열사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선열들이 흘린 피와 생명의 가치는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라가 부강하고 가정마다 부유할 때 우리는 오늘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강근자님이 구술, 이성복님이 대필한 이야기 내용을 간추려 말씀드렸습니다.

3천여자에 달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방송국 사이트에 옛 의용군 전사 강근자의 사진과 함께 게재했습니다.

[노래 한곡]

[퀴즈 한마당 코너]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연변 도문의 백룡촌은 옛날에 다른 지명이 있었는데요, 이 지명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백룡촌의 다른 지명은 무엇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갑),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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