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11-17 19:32:3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11월 19일 세 번째 목요일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1월의 세 번째 목요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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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MC:

11월 19일은 양력으로 한해의 323번째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하기까지 인제 42일 남았습니다.

1984년의 이날 중국의 첫 남극고찰대가 출발했습니다.

1986년의 이날, 중국 야생 동북범이 겨우 30마리 미만인걸로 통계되었습니다.

11월 19일은 모나코의 국경일입니다.

모나코는 유럽에 위치한 공국인데,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작은 나라입니다. 국경선의 길이가 총 4.4km로 면적은 매우 작지만 국경일과 국기, 모네가스크(Monegasque)라고 하는 모나코어 방언을 가진 독립국입니다.

11월 19일 이날은 또 세계 화장실의 날입니다.

2001년, 31개 나라와 지역 5백여명 대표가 싱가폴에서 제1차 화장실 정상회의를 가졌습니다. 화장실 문제는 이때부터 세계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핀란드, 영국, 미국, 인도, 일본, 한국, 호주, 말레이시아 등 나라의 대표가 제1차 화장실 정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는 해마다 11월 19일을 세계 화장실의 날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뒤미처 제67차 유엔 총회는 2013년 7월 24일 결의를 통과하고 해마다 11월 19일을 '세계 화장실의 날"로 결정했으며 이로써 안전한 식용수와 기본적인 위생시설 건설을 추진하고 사람마다 청결과 위생 환경을 향유할 것을 창도했습니다.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이주민이 정착했던 길림성 연변 안도의 석문지역 지명 이야기입니다.

 

                     석문을 여는 마법의 주문

 

  분명히 문짝이나 문설주가 없었지만 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름하여 석문(石門)이었다. 현성에서 동쪽으로 시내를 막 벗어나는 곳이다. 진짜 산등성이가 높고 긴 담처럼 길을 가로 막는다.

  산비탈의 길가에는 ‘석문산石門山’이라고 쓴 석물이 장승처럼 서있었다.

  “옛날 돌산을 깎아 길을 냈다고 해서 석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석문 태생이라고 하는 박춘권 씨가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양친도 석문 태생이고 조부 역시 석문 태생이라고 한다. 조손 3대가 석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석문은 석문산을 경계로 현성 아래쪽에 있는 석문진(石門鎮, 한국의 읍)을 이르는 말이다.

  워낙 산의 이름은 석문이 있다고 하는 석문산이 아니었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예전에는 토문령(土門嶺)이라고 불렸으며 석물을 세웠던 자리는 속칭 ‘토문자(土門子)’라고 불렸다고 한다.

  박춘권 씨가 어릴 때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는 이와 조금 달랐다.

  “원래는 ‘도문령(圖們嶺)’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여기를 지나면 곧 도문(圖們)에 이르게 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도문은 두만강 기슭의 국경도시로 토문과 같은 발음이다. 토문령은 도문의 명성에 짓눌려 그예 도문령으로 와전되고 있는 것이다.

  막상 토문령을 석문산이라고 개명하게 된 이유는 도문이라는 이 유사한 지명 때문이 아니었다. 똑 같은 이름이 쌍둥이처럼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장춘에서 연변으로 나오는 길목에 동명의 산이 하나 있었다. 만족 말로 ‘낙타봉’이라는 의미인데 산의 모양이 흡사 낙타 등의 두 혹을 방불케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개명을 한 후 산은 석문촌이라는 동명의 마을이름을 만들기에 이른다. 석문촌은 훗날 석문진의 소재지로 된 차조구(茶條溝)에 있었다. 그런데 석문촌의 원명은 바로 석문의 본명인 ‘토문자’였다고 전한다. 산기슭의 마을은 마치 그림자처럼 산의 이름을 졸졸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1934년, 돈화-도문 철도가 통차하면서 이곳에 기차역을 세우고 ‘차조구역’이라고 명명했다. 이때부터 마을은 기차역 이름을 따서 차조구로 불렸던 것이다.

  “차조(茶條)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박춘권 씨는 잠깐 머리를 갸우뚱했다.

  하긴 ‘차조’는 평소에 전혀 듣지 못하던 낱말이다. 사전에는 숫잔대(일명 산경채)를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있다. 일설에 차조구는 풀이 아니라 골짜기가 많다는 의미의 다조구라고 한다. 많을 ‘다(多)’가 어찌어찌하여 차 ‘다(茶)’로 잘못 기록되었다는 것.

  아무튼 현지의 나이가 지숙한 사람들은 차조구를 그냥 석문(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옛날의 기억은 그렇게 쉽사리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박춘권 씨는 차조구 서쪽의 북산촌(北山村)에서 살았다고 한다. 마을이 생겼던 지난 세기 30년대는 부르하통하 북쪽의 산기슭에 위치한다고 해서 북산근툰(北山根屯)이라고 불렸으며 또 북산상툰北山上屯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본래는 조선족이라곤 단 한 명이 살던 중국인 동네였는데 부근 동네를 통합하면서 북산 산기슭에 띠처럼 길게 뻗은 큰 마을로 덩치를 불렸다.

  박춘권 씨의 양친은 여전히 북산촌에 남아있었다. 북산촌 7대(隊, 촌민소조)라고 했다.

  “옛날에는 신안동(新安洞)이라고 했지요. 아직도 그렇게 부르는 노인들이 있어요.”

  신안동은 1935년 세워진 조선족 마을이다. 새로 안착하고 또 앞으로 흥성하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박춘권 씨의 모친이 바로 신안동 초창기의 이주민이었다.

  외조모는 12세에 나던 해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강추위가 맵짜게 몰아치는 한겨울이었다. 그때 이사 행렬은 눈길에서 여드레 팔십 리 길을 걸었다고 한다. 식솔이 많고 이삿짐이 올망졸망한데다가 무릎을 치는 눈 때문에 소발구가 게걸음을 했던 것이다.

  “에잇, 아무 거라도 버리고 가야지.” 소발구를 끌던 큰아버지가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소발구에 다가오더니 옹송그리고 있던 외조모를 독수리처럼 콱 잡아챘다.

  “가시나(계집아이의 방언)를 데려다가 엇따(어디에) 쓰겠어.”

  급기야 외조모는 돌덩이처럼 허공을 날아 눈구덩이에 떨어졌다. 원체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라서 너무 놀랍고 무서워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외조모는 원체 담약한 성미였던 것이다. 뒤미처 사촌언니가 울며불며 달려와서 그를 껴안고 소발구에 다시 올랐다. 큰아버지는 화가 조금 누그러들었는지 그때까지 겁이 나서 벌벌 떠는 외조모를 거들떠보지도 않더란다.

  외가는 두만강 기슭의 화룡에 정착을 했다가 훗날 석문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외조모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이 이야기는 설화처럼 후대에 전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박춘권 씨는 물론 그의 부친의 기억에도 이민 과정은 거의 공백으로 비어 있었다. 그들의 선조가 이민했던 시기가 너무 오랜 탓인지 몰랐다. 단지 함경북도 명천군 상운북면 중향동이라는 옛 고향 이름만 댕그라니 남아있었다.

  “밀양 박씨인데요, 박혁거세가 시조라고 합니다.”

  박춘권 씨가 말하는 그의 가계의 뿌리였다. 기실 밀양 박씨의 시조는 신라 때의 언침(彦忱)이다. 언침은 박혁거세의 29대손인 경명왕의 제1왕자로 밀성대군으로 봉해졌다. 후손들이 이를 연유로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밀양 박씨의 가계는 박춘권 씨의 세대에 이르러 웬 눈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 박춘권 씨가 나서 자란 신안동도 단체기억에서 이름 모를 미궁으로 소실되고 있었다. 예전에 조선인들은 신안동이라는 이름이 아닌 신안 부락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신안촌 부근의 마을들은 더구나 안개 속에 잠긴 듯하다. 신안동 바로 아래쪽의 투구촌(斗溝村)은 이름만 들어서는 자칫 투구 노름을 하는 투구(斗狗)마을로 착각하기 쉽다. 박춘권 씨는 어릴 때 이 마을을 투구 부락이라고 불렀다고 회억했다.

  “동네 어구에 백양나무 고목이 있어서 노인들의 모임장소가 되었지요.”

  그러나 투구는 물론 투계 따위의 노름은 없었고 또 그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한다. 마을은 1959년 첫 골짜기라는 의미의 두구촌(頭溝村)으로 개명했다. 왜서 ‘개싸움’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달았는지는 끝내 하나의 물음으로 남았다.

  부근의 란니촌(爛泥村)은 이름 그대로 미스터리의 진흙탕이었다. 일설에 일본군의 토벌로 난리가 일어났던 마을인데, 중국말로 음역되면서 란니(爛泥)라고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명지는 옛날 골짜기의 땅이 몹시 질어서 지은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훗날 땅이 푸른색을 띄고 있다고 해서 난초 난(蘭)을 넣어 란니촌(蘭泥村)이라고 개명했다는 것.

  이러니저러니 마을마다 인적이 몹시 드물었다. 박춘권 씨는 대부분 이른바 ‘바보 집’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바보 집’은 늙은 양주만 외롭게 살고 있는 집을 이르는 낱말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은 외지로 돈벌이를 나갔고 또 돈을 조금 벌었다고 하면 도회지에 자리를 뜨고 있단다.

  공직자인 박춘권 씨는 직업관계로 석문진의 사정에 아주 밝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석문진 호적에 등록된 인구는 1만 여명이지만 실제 현지에서 살고 있는 인구는 3,500명 정도라고 한다.

  석문진에는 워낙 16개 촌이 있었는데 2004년 9개 촌으로 합병되었다. 그마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정말 한심하죠. 어떤 동네는 겨우 스무 명 정도가 남아있습니다.”

  인구의 급감은 학교에서 금방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지난 세기 70년대 전성기를 이룰 때 중학교만 해도 학생이 천명에 박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 합쳐 고작 70명에 불과했단다. 마침내 중학교는 물론 소학교도 폐교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는다. 그게 3년 전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안도에서 유일한 조선족 향(진)이라는 석문진은 인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멀리 석문진의 동쪽을 병풍처럼 가로 막은 산이 이때 따라 바위처럼 가슴을 지지 누른다. 일명 오호산(五虎山)이었다.

  오호산은 동림령(同林嶺)의 산봉우리로 다섯 봉우리가 호랑이를 방불케 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동림령은 만족 말로 ‘종다리’라는 의미인데 안도와 용정의 계선이다. 어찌 보면 사나운 호랑이가 귀여운 종다리를 깔아뭉개고 있는 이상한 모양새이다. 사실 오호산의 원명은 다섯 봉우리라는 의미의 오봉산이었다고 한다.

  오호산 서쪽기슭의 마을도 원명은 오호촌(五戶村)이었다. 청나라 말 다섯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순 조선족 마을로 한때는 수십 가구의 인가를 자랑했다. 다섯 호랑이가 웅거한다는 의미의 오호촌(五虎村)은 항간에서 제멋대로 산의 이름을 따서 잘못 부르는 이름이었다. “바람 가는데 구름 간다.”는 속어는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렷다.

  미상불 석문은 토문이라는 원명을 지울 때부터 그 뭔가를 암시하고 있은 듯하다. 석문의 뒤에는 정체미상의 마을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인제 석문은 이름은 물론 얼굴마저 바뀔지 모른다. 혹여나 웬 마법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아라비아 설화에 나오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의 주문이 문득 떠올랐다.

  “열려라 참깨야.

  그러나 그건 ‘석문의 세계’를 여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었다.*

  네,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을 연상케 하는 옛 지명 토문자의 이야기였습니다. 돌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해서 석문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옛날에는 산의 이름을 따서 토문자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1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연변 도문의 백룡촌은 옛날에 다른 지명이 있었는데요, 이 지명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백룡촌의 다른 지명은 무엇일까요.

 

  연변의 박철원 청취자님은 방송기사에 밝힌 정답을 보내오셨는데요. 또 현지에서 백년부락을 꾸려가는 김경남 씨의 소개를 곁들여 방송기사가 밝히지 못한 백룡촌의 다른 지명도 보내오셨습니다.

  그럼 박철원 청취자님의 편지 사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도문 백룡촌은 지금 백년가옥을 중심으로 민속전람관이 세워져 “백년부락”이라고 불리며 연변의 관광명소로 해내외 유람객들이 많이 찾아들고 있습니다.

일찍 ‘(정답, 약함)’이라고도 불렸고 또 나루터, 나루마을이라고도 불렸다고 백년부락을 꾸려가는 김경남씨가 소개하였습니다.

지금 백년가옥 맞은 켠에 있는 물도랑이 바로 원래의 두만강 줄기였는데 지금은 물길이 변하여 썩 동쪽으로 옮겨졌고 원래 물줄기에 나루터가 있어 조선의 이민들과 장사꾼들이 나들던 곳이어서 부락의 시초에는 나루터라고 오랫동안 불렸다고 합니다.

 

                                         연변애청자 박철원

                                            2020.11.11“

 

네, 연변의 박철원 청취자님은 도합 26명이 함께 정답을 보내주셨다고 편지에 밝혔습니다.

 

퀴즈 답안을 함께 보내는 이들로는 김봉숙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김화순 김옥자 김란희 박순자 리영자 이선자 리선자 류금희 박계옥 박인순 김순옥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박범두 황순금 등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구원모 청취자님이 퀴즈 답안을 보내오셨는데요, 먼저 답안 내용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퀴즈의 물음은, ‘중국 연변 도문의 백룡촌은 옛날에 다른

지명이 있었는데요, 이 지명은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인데요,

(제가 드릴) 정답은 이러합니다. 호랑이는 포뢰는 아니더라도 용의 일종인 백룡을 무서워했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는데요, 마침 이 백룡은 바로 두만강 대안의 함지산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래서 마을 이름을 백룡촌으로 개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구원모”

 

구원모 청취자님의 답은, 백룡촌이라는 이 지명의 유래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퀴즈로 내어 드렸던 백룡촌 옛 이름의 답안은 아닙니다.

 

 네, 여러 청취자님들이 계속 우리 방송의 퀴즈에 참여하시기를 바라구요,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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