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12-11 20:48:50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12월 10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2월의 두 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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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월

MC:

금주 월요일인 12월 7일은 양력 한해 가운데서 341번째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인제 24일 남았습니다.

1941년 12월 7일은 일본이 진주항을 기습한 날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 일본은 태평양에 있는 미국의 주요한 해군기지인 진주만을 대량의 해군과 공군으로 돌연 습격했습니다. 이번 습격으로 하여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태평양함대 주력이 거의 전몰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역사상 ‘진주만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튿날 미국은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며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2월 7일 이날은 또 국제 민항의 날이기도 합니다.

1944년 12월 7일, 52개 나라가 미국 시카고에서 일명 시카고 공약이라고 부르는 국제민용항공공약을 체결했습니다. 시카고공약의 규정에 따라 1947년 4월 4일 국제민항기구가 정식으로 창립되었습니다. 1992년 9월에 소집된 국제민항기구 제29차 대회는 시카고공약 체결 50주년이 되는 1994년부터 해마다 12월 7일을 ‘국제민항의 날’로 정했습니다.

금주 목요일인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입니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는 ‘세계인권선언’을 통과,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은 유엔에 200여종의 언어문자로 번역되었습니다. 선언은 “모든 사람은 자유로우며 존엄과 권리에서 평등한 지위를 갖는다”고 선포했습니다.

금주 금요일은 12월 11일은 국제 산악의 날입니다. 이 명절은 산악 생태계통의 보호의식을 촉진하고 산 지역 사람들의 생존필요를 보다 더 이해하는 것을 촉진하는데 취지를 두고 있습니다.

(고정 간주 6")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이주민이 정착했던 길림성 연변 왕청 지역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마적이 있었던 바위벼랑의 골짜기

  한때 항일무장의 세력이 골짜기에 은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들을 ‘후즈胡子’라고 불렀다. ‘후즈’는 북방 사람들이 마적을 이르던 말이다. 일설에 이 ‘후즈’가 다시 ‘노새騾子’라는 말로 폄하되면서 ‘라자구羅子溝’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후즈’가 있던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라자구에서 나서 자란 전일범 씨는 얼토당토 않은 설이라고 말한다. 남쪽의 태평구太平溝에 바위벼랑이 많으며 그게 라자구라는 이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곳의 바위 하나가 연통을 빼닮았다고 해서 구새바위라고 불렀지요.”

  바위벼랑은 만족 말로 ‘라자砬子’라고 한다. 바위벼랑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라자구砬子溝’가 나중에 비슷한 음의 ‘라자구羅子溝’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현지의 지명지地名志에도 그렇게 명명백백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태평구는 시초에 바위보다 벚나무가 많다고 해서 화수동樺樹洞이라고 불리던 마을이다.  인근의 송림산松林山은 또 한국 불교계의 전설로 불리는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 8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송림산에는 늙음을 맞은 그를 위해 현지 조선인들이 세운 작은 절 화엄사華嚴寺가 있었다.

  어쨌거나 바위는 서낭바위가 아니었고 벚나무나 소나무는 당수나무가 아니었다. 1936년 사람들은 태평한 나날을 보내기를 지명에 기탁, 마을이름을 ‘태평구’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그 무렵 ‘후즈’가 골짜기에 소나무처럼 많았고 일본군이 사흘이 멀다하게 토벌을 하면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라자구의 이름을 두고 항간에 ‘후즈’ 설이 나올 법 한다.

  이 ‘후즈’는 썩 훗날에도 그들의 종적을 드러낸다. 지난 세기 50년대 태평구에 야유회를 갔던 구정부區政府의 직원들이 산중턱의 동굴에서 ‘후즈’의 시신을 발견했던 것. 마침 구정부에서 회계로 근무하던 전일범 씨의 부친도 이 발견 현장에 있었다.

  “군복 외투를 입은 사람이 돌상에 엎드린 채 숨져있더래요.”

  그때 외투는 벌써 색이 하얗게 바랬고 마른 낙엽처럼 손이 스쳐도 부서질 듯 했다. 시신의 옆에는 또 말안장이 놓여 있었다.

  미구에 말안장은 발견 경위를 적은 문서와 함께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 시기 라자구는 김일성을 위시한 조선인부대가 활동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말안장은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진짜 김일성부대는 라자구에서 여간 ‘소란’을 피운 게 아니었다. 언제인가 시가지 복판까지 쳐들어왔다. 그게 1934년 6월에 있은 일이라고 현지의 석물에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부대는 교전에서 괴뢰 만주국 군대와 경찰에게 막중한 손실을 입혔다고 한다.

  이처럼 항일무장부대가 활약하고 있을 때 전일범 씨의 가족은 이곳에 정착한지 어느덧 한 세대를 넘고 있었다. 전일범 씨의 조부는 20세기 초 함경북도 온성에서 이 고장으로 천입했다고 한다. 온성에 있던 전씨 성의 7~8 가구가 그들과 함께 이삿짐을 묶었다.

  전씨가 두만강 기슭에 갑자기 군체群體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별스런 일은 아니다. 온성의 풍리동과 향당동, 용남동 등에 이들 황간 전씨黃澗全氏의 집성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간 전 씨의 시조는 전익全翼으로 도시조 전섭全聶의 26대 손이다. 전섭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 백제 건국 10대공신이다. 전익은 고려시대 형부전서로 있으면서 1231년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황간군黃澗君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분관되어 황간을 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황간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장의 지명이다. 황간 전 씨가 언제 그리고 왜서 한반도의 최북단으로 이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지난세기 중반 ‘문화대혁명’ 때 전 씨 가족은 그 무슨 화가 미칠까 우려되어 족보를 소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 가문에 외롭게 남은 건 구전하는 ‘전설’뿐이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우리 가문의 5대조 할아버지가 된다고 합니다.”

  전봉준은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가계에 따르면 그는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삼제공파三帝公派 40대손이다. 그가 어떻게 황간 전 씨와 맥이 닿는지는 정말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양반가의 핏줄은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조부는 논에 나갈 때도 두루마기를 입고 개화장을 짚었다고 한다.

  여담이라고 할까, 조부는 일찍 아홉 살 때 장가를 들었다고 한다. 그때 조모는 열세 살이었다. 신랑이랍시고 꼭뒤에 상투를 얹은 애송이의 모습은 조모의 기억에 하나의 바위벼랑을 깎아 세우고 있었다.

  “조부님은 말을 타고 왔는데 젖 냄새를 채 가시지 못해서 머리가 노랗더라고 해요.”

  전 씨 가족이 정착할 때 라자구는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라고 불리고 있었다. 수분하綏芬河의 상류에 있고 또 무연한 풀발이 펼쳐졌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수분綏芬은 만족 말로 ‘송곳’이라는 의미인데, 골짜기에 흐르면서 낙차가 심하고 여울이 많은 수분하의 모양새를 형용한 것이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마을 북쪽에서 수분하에 흘러드는 강은 ‘암퇘지의 강’이라는 의미의 로모저하老母猪河라고 불린다. 강기슭의 수림에 멧돼지가 떼를 지어 출몰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수림의 이 멧돼지를 쫓아서 왔는지는 몰라도 라자구에 맨 먼저 나타난 사람은 사냥꾼이었다고 지명지地名志가 밝힌다.

  청나라 광서光緖 8년(1882), 중국인 왕 씨네 아홉째王老九 등 셋이 수렵을 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개를 넘자 갑자기 병풍을 거둔 듯 눈앞에 큰 벌이 펼쳐지고 있었다. 푸른 강이 물보라를 튕겼고 키를 넘는 쑥밭에는 싱긋한 땅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아예 화승총을 내려놓고 화전을 일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김씨 성의 조선인이 이곳에 찾아왔다.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입소문이 전해지면서 중국인과 조선인 간민墾民들이 연속부절이 찾아들었다.

  “해방(8.15 광복)이 날 때 반수가 조선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집안의 연장자에게 전일범 씨가 한두 마디씩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태평촌은 물론 라자구 서쪽의 요자구腰子溝와 삼도하三道河子에는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었다. 요자구腰子溝는 마을이 우묵한 곳에 있고 또 라자구 중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며 삼도하三道河子는 강 세 갈래가 부근을 흐르고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이 두 마을을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따로 ‘남도치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방 전 일본군이 늘 ‘후즈’를 토벌하면서 조선인 마을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와중에 일본군의 등쌀을 못 이겨 타향으로 이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해방을 맞은 후 다들 한시름을 덜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실한 ‘후즈’가 나타났다. 마희산馬希山 무리가 라자구에 기어들었던 것이다. 마희산은 동만東滿에서 악명이 높은 토비 괴수이다.

  이런저런 풍파 때문에 조선인들은 앞을 다투어 라자구에서 자리를 떴다. 그래도 전일범 씨가 학교를 다니던 지난 세기 60년대 중반까지 열에 두셋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식청년으로 하향했던 라자구 제2대대(第二大隊, 촌)도 마찬가지였다. 대대에는 7개의 소대(小隊, 촌민소조)가 있었는데 7소대는 순 조선족 동네였다고 한다.

  그때 현성은 두 개 대대大隊로 나누고 있었다. 서쪽의 제1대대는 예전의 수분촌綏芬村이었고 동쪽의 제2대대는 예전에 고성촌古城村으로 불리던 마을이었다. 수분촌은 라자구의 현성 소재지이고 또 라자구의 원명이 수분대전자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고성촌은 마을 부근에 요․금遼․金 시기의 옛 성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사냥꾼들이 이 고장에 발을 들여놓기 수백 년 전에 벌써 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마을마다 대대大隊라는 이름처럼 그 무슨 군부대 소속이라도 되 듯 늘 전쟁준비를 한다고 법석을 놓았다.

  “1969년이라고 기억되는데요, 한 겨울에 추워 벌벌 떨면서 갱도를 팠지요.”

  7소대에 배당한 곳은 옛 토성 아래였다. 그런데 봄이 되어 땅이 녹으면서 소가 갱도에 벌렁 빠졌다. 나중에 토성은 갱도 구간이 몽땅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옛 성의 수난은 이로써 끝나지 않았다. 훗날 부근의 벽돌공장은 토성의 흙을 파서 벽돌을 구웠고 촌민들은 토성의 흙을 파서 벽을 발랐다. 수레로 흙을 실어다가 가축의 똥에 버무려 비료를 만들기도 했다.

  토성은 톱질을 한 듯 들쭉날쭉하게 변했다. 남쪽 성벽은 아예 통째로 종적을 감췄다.

  전일범 씨는 우리 일행이 현지를 답사하면서 촬영한 사진을 보고 혀를 찼다. “아직도 이만큼이나 잔존한다는 게 정말 기적이지요.”

  그는 1973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라자구를 떠났고 나중에 북경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훗날 그의 가족들도 하나 둘 도회지로 자리를 떴다. 라자구에서 더는 전 씨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니, 다른 성씨조차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다. 벌써 열에 하나도 채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때부터 쌓아 올렸던 ‘옛 성’은 동서남북 어디라 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노래 한곡)

(코너 고정 간주)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38년 6월,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과 밀양군 사람들이 중국 안도현 명월구에 도착한 후 '어느 마을'에 정착했다고 하는데요, 이 마을의 이름이 무엇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1938년 6월,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과 밀양군 사람들이 중국 안도현 명월구에 도착한 후 정착한 마을의 이름은 무엇일일까요.

한국의 구원모 청취자가 퀴즈 답안을 보내왔습니다.

아래에 답안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때 이민들이 자리 잡은 곳은 “0000”이라고 하는 마을이었습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일찍 1881년경부터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이 고장에서 제일 먼저 개발된 지역의 하나였습니다. 장흥하 두 지류 사이의 언덕에 위치, 흡사 작은 섬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평안한 삶을 기원해서 “0000”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새 이민이 적착하면서 단번에 큰 마을로 덩치를 불렸습니다.”

구원모 청취자가 보내온 퀴즈 답안은 정답이었는데요, 아직은 이달의 퀴즈가 진행 중이라서 정답 내용은 읽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중국 길림성 연길의 박철원 청취자도 퀴즈 답안을 보내왔는데요, 역시 정답이었습니다. 박철원 청취자는 또 이 지명에 깃든 남다른 사연도 함께 보내왔습니다.

편지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안도 명월구에 이민을 왔던  이른바 ‘남도치’ 즉 남쪽 지방의 사람들은 장흥하 두 지류사이의 언덕에 마을을 앉히고 그 이름을 '0000'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저의 장인이 일찍 안도현 장흥학교에서 교장사업을 하였기 때문에 저도 그 지역에 대해 좀 요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연변애청자협회 안도분회가 설 때 농민 애청자들이 많은 점을 감안해 설립 의식을 장흥 수동촌에서 가졌습니다. 강 서쪽이 바로 퀴즈풀이의 그 마을에 속하는 곳입니다.”.

박철원 청취자는 또 이달의 퀴즈를 아래의 애청자들과 공유하였다고 밝히고 퀴즈 답안을 함께 보낸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보냈는데요.

퀴즈 답안을 보낸 분들은

김봉숙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김화순 김옥자 김란희 박순자 리영자 이선자 리선자  류금희 박계옥 박인순 김순옥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박범두 황순금, 박철원 등 26명입니다.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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