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1-16 16:43:07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월 14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월의 두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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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MC:

‘청취자의 벗’ 방송 시간인 금주 목요일 1월 14일은 양력 한해 가운데 열네번 째 날입니다. 2021년 새해가 시작된 지 꼭 두주일 째 됩니다.

1월 14일은 율리우스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율리우스력은 기원전 46년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만들어진 역법(曆法)인 구 태양력을 말합니다. 그는 이집트로 원정한 후 이집트력을 참고로 하여, 그때까지의 모든 역법을 종합하여 1년을 365.25일로 통일하였습니다. 이 경우 1년을 365일로 하면 4년마다 1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4년마다 1년을 366일로 하는 윤년을 두었는데, 이것을 율리우스력이라 한다. 제정된 이후 그레고리력이 나오기까지 약 1,600년 동안 계속해서 사용되었던 역법입니다. 현재 사용되는태양력 중 7, 8월이 각각 31일이고, 2월이 28일인 것은 시저와 옥타비아누스의 생일이 7, 8월에 기념일로 추가된 데 있습니다.

1월 14일은 또 서방에서 아주 재미있는 하루인데요, 서방에서는 '다이어리 데이'라고 합니다. '다이어리 데이'는 1월 14일을 이르는 말인데요, 연인끼리 서로 일기장을 선물하는 날입니다.

해마다 1월 14일 이날에 연인들은 지난 한해의 사랑 이야기를 기록한 일기장을 서로 선물하고 이로써 두 사람이 손잡고 함께 아름다운 회억을 남깁니다. 기실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더 서로를 깊이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날이면 연인 없는 독신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앞으로의 계획을 일기장에 쓰고 사랑의 씨앗을 뿌린다고 합니다.

또 2000년의 이날인 1월 14일 인류는 처음으로 원숭이의 복제에 성공했다고 하는데요, 태국에서는 또 이날을 국가산림보호의 날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고정 간주 6")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 동쪽의 마을 소영촌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마을 주인은 표범과 거북이 그리고 군인이었다

“청나라 때 작은 영(營, 대대)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던데요.” 촌장 박광원 씨는 이렇게 소영촌小營村의 지명유래를 해석했다.

소영촌은 연길 동쪽의 큰 촌락으로 일찍 광서光緖 6년(1880) 전후에 개간되었던 오랜 마을이다.

영營은 병영, 숙영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소영촌의 지명유래를 박광원 씨의 해석에 따를 수 있을 법 한다. 아닐세라, 연변의 문사文史 자료에 의하면 청나라 포병부대가 한때 이 고장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포병부대의 본영本營은 지금의 연길 시내 안쪽에 위치하였으며 또 시내 북쪽의 북산과 동쪽의 소영 일대에 각기 작은 대대를 주둔하고 있었다. 작은 대대라는 의미의 지명 소영小營은 그렇게 생긴 것이라고 한다.

뒷이야기이지만, 이 포병부대는 경자년庚子年(1900),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어 진격하자 포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부랴부랴 줄행랑을 놓았다고 한다.

일본학자 모리다 도시오守田利遠의 지리학 저서 “만주지지滿洲地志”가 기록한 지명연원은 이 시기를 약 20년 정도 앞지르고 있다. 마을이 설 무렵인 1881년 이 고장에 민간무장 단련회(團練會, 민간의 자위단체)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민간무장이 바로 소영이라는 지명과 직결된다는 것.

이때 자위단원들은 소영마을의 제일 서쪽에 솥을 걸고 소금을 만들어서 팔았으며 그 돈으로 병기를 구매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이곳에 생긴 마을은 ‘소금 솥’이라는 의미인 염과성鹽鍋城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설에 염과성은 원체 만주족 말이며 ‘표범’이라는 뜻이라고 전한다. 염과성은 훗날 양구성楊口城으로 변했다가 1982년 원명을 회복했다.

와중에 염과성 역시 중국말 그대로 ‘소금 솥’이라고 하는 해석이 어울린다는 지적이 있다. 솥에 소금을 끓여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만주족 말로 ‘표범’을 이 염과성과는 전혀 다른 발음의 ‘yarha’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민국(1912~1949) 시기 염과성에는 더는 만주족이 아닌 한족(중국인)이 살고 있었다. 이때 염과성은 마을 첫 정착자의 성씨를 따서 ‘정개네 골(鄭家溝, 정씨네 골)’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 무렵 째지게 가난했던 한 조선인이 정 씨네 집안에 세 딸을 죄다 줘버려서 한동안 말 도마에 오른 적 있다. 아무튼 정 씨의 마누라는 며느리 덕분에 제법 조선말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염과성 아니 정개네골은 소영촌에서 유일한 한족동네였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그냥 10대(隊, 촌민소조), 혹은 채소대菜蔬隊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 향 직속마을로 되면서 부양富陽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지금은 광명촌光明村으로 불린다.

밝을 광명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염과성 남쪽의 부르하통하 강기슭에는 밝은 햇빛이 한데 모인 마을이라는 의미의 회양동會陽洞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마을은 훗날 다른 곳으로 철거되면서 그 이름조차 지명지地名志에 남기지 않고 있다.

기실 소영촌도 항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있다. 원래의 이름은 소영자小營子라고 했다. 영자營子는 몽골말로 부락, 마을이라는 뜻이니 소영자는 작은 부락이나 마을이라는 뜻이 되겠다. 실제로 이 고장에 마을이 앉을 때는 지금처럼 산기슭에 한일자로 쭉 이어진 큰 부락이 아니라 군데군데 있은 작은 동네였다고 한다.

현지인들에게 앞마을 혹은 5,6대로 불리는 영남촌營南村은 1982년 새롭게 지어진 이름으로 소영촌 남쪽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1920년 전후에 형성되었는데 그때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서북쪽의 버드나무 숲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버드나무 숲은 연길 시가지가 근교로 덩치를 불리면서 오래전에 벌써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옛날에는 마을이름을 ‘조콜지팡’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영남촌 태생인 김창석 씨가 소꿉 시절 노인들에게 들었다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조콜지팡은 조곤趙坤의 지방地方이라는 의미이다. 그때 이곳은 조 씨 성의 사람의 땅이었는지는 몰라도 세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해서 ‘3호동三戶洞’이라고 불렸던 것만은 확실하다. 촌장 박광원 씨는 조부가 함경도 명천군에서 이 고장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을 때가 바로 이 3호동이 생긴 직후라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까지 마을에서 논을 부치고 있는 촌민은 김창석 하나뿐이라고 한다. 벼농사로 동네방네 소문났던 이 마을에는 어찌어찌하여 농사꾼이라곤 그가 홀로 남은 셈이다.

영남촌은 소영촌의 큰 부락과 떨어져 부르하통하의 기슭에 따로 동네를 이루고 있다. 옛날 부르하통하에는 둑이 없었으며 장마철이면 강물이 마치 고삐를 풀어 던진 성난 말처럼 제멋대로 벌을 휩쓸었다.

“산기슭의 땅을 파면 강바닥처럼 모래흙이 나오지요.” 예전에 심경深耕을 할 때 소영 벌의 속살을 보았다는 전영욱 씨의 말이다.

심경深耕은 1959년 중국에서 극단적인 좌파노선을 집행할 때 논을 1~2 미터 깊이로 갈아엎던 농사법이다. 그렇게 하면 정보당 5만 킬로그램의 소출을 낼 수 있다는 허황한 설에 근거한 것이다.

옛날 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산기슭의 벌에는 물웅덩이와 늪, 습지가 이르는 곳마다 널려 있었다고 한다. 부르하통하가 굽이를 도는 소영의 동쪽 벌은 더구나 심했다. 이런 물웅덩이와 늪, 습지에는 물고기와 거북이가 특별히 많았다. 이 고장의 원주민은 군인들이 아니라 물을 즐긴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921년 경, 동쪽 산기슭에 형성된 동네를 거북이와 강의 동네라는 의미의 ‘구하동龜河洞’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훗날 발음이 비슷한 단어로 바뀌면서 아홉 번 변한다는 의미의 ‘구화동九化洞’이라고 불리다가 지난 세기 80년대 다시 본명을 찾았다. 지금은 현지인들에게 아랫동네 혹은 1,2대 마을로 불리니 그 이름이 아홉 번은 몰라도 족히 서너 번은 변한 것 같다.

3호동이나 구하동이 생길 무렵인 1920년에 전소全燒된 마을학교가 있었다. 개산툰의 정동학교와 달라자의 명동학교, 와룡동의 창동학교와 더불어 간도 조선인의 최초의 4대 중학교로 꼽히는 광성학교光成學校이다. 광성학교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적 있는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 등이 1912년 소영자에 설립한 항일민족교육기관이다. 그들은 또 이듬해 광성중학교를 병설했는데 이 학교는 또 소영자중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학교는 무관학교 출신의 체육교사를 받아들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였으며 3.1운동 전 간도의 독립군양성소로 발전하였다. 광성학교는 경신년庚申年 일본군의 토벌 때 한 무더기의 잿더미로 되었다.

현재로선 마을에서 이런 사실을 약간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한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촌민위원회에서 중견간부로 있는 전영욱 씨는 바로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학교가 3대와 4대 마을의 경계지역 밭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광성소학교를 다녔던 촌민 김광수(이미 작고) 옹에 의해 학교 위치가 밝혀졌던 것. 김광수 옹은 훗날의 토지개혁 시기 마을에 몇몇 안 되는 부농의 신분으로 획분 되었던 사람이다. 김광수 옹의 아들에게 학교 이야기를 들었다는 전영욱 씨는 학교 이름을 빛 광光자가 아니라 넓을 광廣자를 쓰는 광성학교廣成學校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건 백 년 전의 이 광성학교만 아니다. 그 후 마을에 설립되었던 소학교와 중학교도 10여 년 전 시내학교와 통폐합되면서 촌사村史에 겨우 몇 줄의 기록으로 남았을 뿐이다.

청나라의 봉금정책 이전에 있었던 마을 역사는 더구나 공백으로 남고 있었다. 사실 소영촌에 인가가 들어선 것은 백 년 전이 아니라 3천년의 오랜 세월을 거슬러 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일찍 연길 지역에는 예맥濊貊 계통의 옥저沃沮인들이 주요한 거주자로 있었다. 옥저인들은 소영촌 북산의 석관 고분성을 포함하여 적지 않은 유적들을 연길시 주변에 남겼다. 일명 동산이라고 하는 소영촌 동쪽의 성자산城子山 옛성은 고구려 산성이었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 연변지역은 발해국의 활무대였다. 연길시 지역에서 발견된 발해시기의 유적지만 해도 10여 곳 된다. 이중에는 소영촌의 유적지도 들어있다. 이 발해 유적지는 소영촌 1대의 서북쪽 산비탈에 있다.

천년 촌락들의 이름은 아직도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훗날 이 고장에 나타난 백년 촌락도 언제인가는 미스터리로 남을지 모른다. 1년이 십년 아니 100년 맞잡이로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영촌은 농경지를 잃고 어느덧 콘크리트의 수림에 깊숙이 잠기고 있었다.

“거짓말 같지요? 어떤 농가에는 사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안됩니다.” 박광원 씨는 체념한 듯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소개했다.

1982년 지명조사를 할 때 소영촌의 인구는 1,115명이었는데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고작 1,200명에 꼬리가 달린 정도라고 한다. 대부분이 도시나 한국으로 자리를 떴던 것이다. 공동화한 그 빈자리를 외래인구가 속속들이 채우고 있었다. 지금 소영촌에는 외지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어나 1천 가구를 넘으며 촌 호적 인구의 두 배나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소영촌의 주인은 더는 원래의 그들이 아니었다.*

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 동쪽의 마을 소영촌의 지명 이야기었습니다.

마을의 주인은 사람만 아니라 표범이나 거북이가 있었다고 하는 전설 같은 지명 이야기이었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네,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의 북쪽 청차관(淸茶館)은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형성되었다고 하는데요, 산동(山東)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이 최초로 부락을 이뤘던 오랜 마을입니다. 이름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찻물을 상기하게 되는데요, 과연 지명 청차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연길 북쪽의 지명 청차관은 그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

한국 대구에 살고 있는 구원모 청취자가 지난주 이메일로 답안을 보내왔습니다. 구원모 청취자님은 이번에도 방송에 내보낸 12월의 기사를 읽고 답안을 찾았는데요, 정답이었습니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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