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1-21 16:55:32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월 21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월의 세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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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MC:

‘청취자의 벗’ 방송 시간인 금주 목요일 1월 21일은 양력 한해 가운데 스물 한 번 째 날입니다. 2021년 새해가 시작된 지 꼭 세주일 째 됩니다.

금주의 의미 있는 날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60년 1월 21일 인류는 사상 처음으로 동물을 우주에 올려보냈습니다.

전날인 1월 20일은 대한으로 음력으로 한해 24절기에서 제일 마지막 절기입니다. 해마다 양력 1월 20일 전후에 태양은 황경 300도에 이르는데, 이때를 대한이라고 합니다.

이때 한파가 남쪽으로 빈번하게 밀려옵니다. 중국 일부 지역에서 해마다 제일 추운 시기이기도 합니다. 바람이 크고 온도가 낮으며 땅위에 적설이 녹지 않습니다. 이 시기는 또 철도와 체신, 석유, 해상 운수 등 부문에서 강온과 큰 눈 같은 재해성 날시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는데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1월 20일, 금세기의 이날에는 희한하게도 제왕 제도가 부활하기도 했습니다. 1934년 1월 20일 괴뢰 만주국이 제왕제도를 실행했는데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가 또 황제로 되었습니다.

금주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1월 17일은 또 유명한 명절이기도 합니다. 이날은 음력 섣달 초 여드레인데요, 중국에서 남팔절(腊八节)이라고 하는데요, 여덟 가지 곡물을 넣은 팔보죽(八寶粥)을 먹는 날입니다.

납팔절은 불교의 성대한 명절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섣달 초여드레 날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했다고 전합니다. 옛 인도 사람들은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에 겪은 고행을 잊지 않고 또 그가 섣달 초여드레 날에 성불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섣달 초여드레 이날이면 여러 가지 곡물을 섞은 죽을 먹는 것으로 이를 기념했다고 합니다.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 동남쪽의 마을 이화촌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평산 씨가 찾아왔던 배꽃동네

기실 이화동理化洞은 어느 도인의 수련 장소처럼 만물이치의 변화와 그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니다. 배꽃동네라는 의미인 이화동梨花洞의 전음轉音이다. 이화동은 연길뿐만 아니라 용정과 화룡에도 있으며 또 같은 발음의 이화동里化洞으로도 쓰인다.

예전에 이화동에는 정말로 이름처럼 배나무가 많았다고 마을 토박이인 신창용(1935년 출생) 옹이 말한다.

“해방(8.15 광복) 전에는 산비탈에 제일 흔한 게 배나무였지요.”

그런데 이런 배나무는 마을 시초의 이름과는 아무런 연줄도 없었다. 마을에 생긴 첫 이름은 이화동이 아니라 신 씨네 큰 샘물이라는 의미의 신대천申大泉이기 때문이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는 1890년에 벌써 마을이 있었다. 그때부터인지는 딱히 몰라도 예전에 골 어구부터 차례로 문 씨, 전 씨, 고 씨 등 성씨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정작 골 막바지에 맨 처음으로 이삿짐을 내려놓은 건 신창용 옹의 증조부를 위시한 신 씨 가족이었던 걸로 전한다. 이민 1세인 그들은 이름에 모두 돌림자를 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신창용 옹은 언제인가 부친의 고향인 함경도 나진으로 갔을 때 신 씨 족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족보에 따르면 신창용 옹은 평산平山 신 씨의 35대손이었다.

평산 신 씨는 전체 신 씨의 70%이상을 차지하는 대본이다. 조선시대 여류예술가 신사임당申師任堂 등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들도 평산 신씨의 후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평산 신 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 ?~927년)이다. 평산 신 씨가 생기게 된 데는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태조 왕건王建이 평주(平州, 平山)로 사냥을 나가 삼탄三灘을 지날 때 마침 고공을 나는 세 마리의 기러기를 보고 수행하는 제장諸將에게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히겠는가?’라고 물었다. 신숭겸은 자기가 맞히겠다고 아뢰었다. 왕건이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자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하고 물었다. 이에 왕건이 웃으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자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날개를 명중시켜 떨어뜨렸다. 왕건이 이에 탄복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삼게 하였다.”

927년, 신숭겸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왕건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왕건은 신숭겸에게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왕건은 그로부터 약 15년 더 건재하면서 그를 보좌한 장군이 많았기 때문에 신숭겸의 후대들을 잘 챙긴 것 같지는 않다.

평산 신 씨의 일파가 구경 어느 세대부터 몰락하여 나진이라는 이런 벽지에 정착했는지 알지 못한다. 나진은 신창용 옹의 증조부가 여섯 남매를 데리고 중국으로 이주할 시점인 1912년에는 아직 지도에 나오지 않던 한촌閑村이었다. 1930년대 일본의 만주진출이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큰 항구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신 씨 일가족이 나중에 발길을 멈춘 곳은 연길 북쪽의 횡도자橫道子였다. 횡도자는 일찍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형성된 마을인데 구수하九水河가 가로 흘러 지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구수하는 조양하朝陽河의 별명으로 아홉 갈래의 물이 모여서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횡도자는 강을 끼고 있는 기름진 평야에 위치, 그렇다고 마음을 안착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도회지와 너무 멀어서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 신창용 옹의 부친은 열 살 나이를 넘고 있었다. 정말이지 “옛날에는 논 팔고 소 팔아 자식 공부시켰다.”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상기되는 대목이었다.

나중에 신 씨 가족이 선택한 곳은 연길 시내 동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이화동 골짜기였다. 그들이 초가를 지었던 자리는 풍수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옛 집터에는 지금 마을에서 유일한 산장山莊이 들어서 있다.

그때 그들이 살던 집에서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서쪽 산비탈에는 큰 샘이 있었다.

“넉가래 같은 돌에 덮여 있었는데요. 쪼갠 나무를 땅에 펴서 물이 흘러내리는 도랑을 만들었습니다.”

신창용 옹은 이 샘물을 먹고 자랐다. 동네 사람들도 이 샘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샘은 훗날 펌프로 물을 잣아 올리면서 차츰 소외되었고 이어 수도를 놓으면서 매몰되었다. 그러나 물맛이 좋다는 소문은 몇 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했다. 지금 동네에는 샘터가 새로 생겨났고 요금을 받고 있지만 물 긷는 사람들이 여전히 줄을 서고 있다.

아무튼 신 씨의 집 부근에 있는 옛 샘물에서 마을의 최초의 지명인 신대천申大泉이라는 이름이 생긴 듯하다.

샘물은 그렇게 인기를 받았지만 배나무는 그냥 소박을 맞고 있었다. 배가 야생이어서 애기주먹처럼 작은 데다 또 떫은 감처럼 텁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대천이 1921년 배꽃동네라는 의미의 이화동으로 개명될 때 배꽃을 따버린 이화理化로 된 것 같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다고 배꽃은 마을이름마다 다 떨어진 게 아니었다. 이화동의 동쪽에는 배나무의 이름을 그대로 옮긴 이수동梨樹洞이 있다. 광서 26년(1900) 생긴 이 마을은 동네어구에 오랜 배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화동의 지명에 잠깐 얼굴을 보였던 ‘도인’도 마찬가지였다. 기실 오래전부터 이수동 부근의 지명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마을은 광서 26년(1900) 형성, 원래 남쪽 골짜기라는 의미의 남골南溝이라고 불렸는데 그 후 양기동養氣洞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양기養氣는 도가道家에서 몸과 마음을 닦는 일을 말한다.

와중에 신창용 옹의 여동생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곳이 하나 있었다. 이화동의 바로 동쪽에 잇닿아 있었던 달리골(‘달래’의 함경도 방언)이었다. 여느 곳처럼 달래를 혹간 한두 개씩 캔 게 아니라 밭갈이를 할 때면 타작마당에 널린 콩알 줍듯 했다고 한다.

자식공부 때문에 벌을 떠났던 신 씨 가족의 교육열은 신창용 옹의 세대에 와서도 무서운 집착으로 이어졌다. 신창용 옹은 마을에서 고중까지 다녔던 단 2명 중의 한 사람이다. 훗날에는 연길의 학교에 전학했지만 시초에는 고개를 넘어 용정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산 넘어 왕복 50리 길은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산 길목에는 늘 범과 늑대 따위의 야수가 어슬렁거렸다. 그는 이른 새벽이면 양동이를 두드리면서 고개를 넘었고 저녁이면 숲에 숨겨두었던 양동이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해가 지면 모친이 양동이를 두드리면서 산꼭대기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고중을 졸업한 후 신창용 옹은 연길 시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말을 빈다면 공부를 한 덕분으로 산비탈에 제멋대로 자라는 배나무처럼 시골에 묻혀 살지 않게 된 것이다.

그 무렵 이화동에는 동네가 여럿으로 크게 불어났다. 위치에 따라 골 어구부터 하촌, 중촌, 동촌, 서촌이라고 했다. 신 씨가 살고 있던 동네는 동촌이었는데 훗날에는 또 이화촌 2대로 불렸다.

동네마다 이름이 지어지듯 신 씨 가족에도 언제인가 새 이름이 생겼다.

“이웃 사람들은 우리를 구수하 기슭에서 왔다고 ‘구수하 집’이라고 불렀지요.”

그러고 보면 신 씨의 옛 고향인 함경도 나진의 이름은 잊히고 중국 첫 정착지의 이름만 남은 셈이다.

장옥자(1936년 출생) 노인의 가족도 그들과 비슷한 경우이다. 실은 증조부 때 연해주에서 왔지만 간도의 첫 정착지였던 해란강 기슭 화전자樺甸子의 이름을 따서 ‘화전자 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증조부가 조선에서 언제 그리고 왜서 연해주로 갔는지는 영구한 미제謎題로 남을지 모른다. 단 하나, 그들이 중국에 이주한 시기만은 손금처럼 분명하다. 장옥자 노인의 조모 벌인 장금선(1904년 출생, 이미 작고) 노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여섯 살 때 즉 1910년 경 아버지를 따라 화전자에 왔기 때문이다. 장금선 노인의 어린 기억에는 그때 흙길에서 덜컹거리던 마차가 마치 쇠못처럼 박혀있었다.

이 ‘화전자 집’이 있던 곳은 워낙 동골東溝로 불렸다. 동골 역시 서쪽에 이웃한 이수동이나 양기동, 달리동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그러다가 1927년 서생을 모셔다가 정의를 동경한다는 의미의 모의동慕義洞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원체 중국인이 많은 마을이지만 골 동洞자로 미뤄 중국인 아닌 조선족이 지명을 만든 걸로 보인다. 그때 모의동에는 조선족으로 장 씨 가족만 살고 있은 게 아니다. 동네에는 김일권이라고 부르는 지주가 있었는데 훗날 그가 사망하자 자식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이사를 갔다고 한다.

모의동에는 장옥자 노인이 살던 초가가 약 10년 전까지 거의 원상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고향집이 있는 언덕 아래에는 또 그들이 길어 먹던 옛 용두레 우물이 있었다.

얼마 전 장옥자 노인은 자식과 함께 고향집을 다시 찾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로 되었던데요. 옛날 초가의 모습을 겨우겨우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지에서 그가 바로 용두레를 잣던 ‘화전자집’의 마지막 여주인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장 씨 가족은 벌써 이곳을 떠난 지 오랬기 때문이었다. 이화동의 신 씨 가족도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인제 옛 마을의 풍경과 이야기는 철이 지난 배꽃처럼 그들의 기억에만 간신히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 동남쪽의 마을 이화촌의 지명 이야기었습니다

이화촌은 봄이면 배나무꽃이 만발해서 배나무꽃 동네로 불렸다고 합니다. 배꽃 향기가 풍기던 그때 그날의 동네를 다시 머리에 떠올리게 됩니다..

[청취자 내신 코너]

겨울에 들어선 후 신종 코로나 사태가 대륙과 반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요, 코로나에 걸리면 사망 위험이 높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건강관리가 더욱 중요한 시점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맞서 더구나 노인 건강을 추진하고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중국 왕청 지역의 이강춘 청취자가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지난해는 길림성 연변주로인체육협회에서 하달한 로인의 문화와 체육 ‘두가지 건설’ 작업을 마무리 짓는 관건적인 한해였다. 하지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감염병의 영향으로 하여 상반기 노인들의 문화와 체육 작업이 좀 지체되었지만 5월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해 손실을 미봉했다.

지난해 길림성 왕청현어인체육협회에서는 왕청현 당위원회, 정부의 정확한 지도와 성, 주 노인체육협회의 힘있는 지지하에 전염병 예방, 통제에 관한 요구를 엄격히 준수하면서 5월말부터 시작하여 중점을 틀어쥐고 ‘두가지 건설’ 사업에 강도를 높였다. 왕청현노인체육협회에서는 이 진들에 대해 하나하나 조사를 진행하고 해결조치들을 협의하면서 기준에 도달되도록 참답게 노력했다.

우선 왕청현의 9개 향, 진, 3개 가두 노인체육협회 회장들과 전화로 련계해 기준 도달 촌과 사회구역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지난해내로 기준에 도달해야 할 촌과 사회구역을 차질 없이 체크했다. 다음 기준 도달 임무가 비교적 과중한 배초구진, 대흥구진, 동광진(왕청현의 기준 도달 임무 60%를 차지함)의 로인체육협회 회장들을 왕청현노인체육협회로 청해 촌의 상황들을 자세히 파악하는 한편 해결 방법을 연구, 토론하고 대책들을 제정하여 단맛을 보기도 했다.

왕청현로인체육협회의 계획에 따르면 2020년까지 로인 문화체육 중등생활수준의 촌과 지역사회 기준에 도달한 각각 52개 촌, 4개 사회구역이다.

2015년부터 시작하여 왕청현노인체육협회에서는 상급에서 하달한 요구에 비추어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적지 않은 효과를 보았다.

왕청현의 149개 촌과 6개 지역사회가 ‘문화와 체육 기준에 도달했는데 기준 도달률이 74%에 달했다.

이강춘 청취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왕청현에서는 새로 32개의 인조잔디게이트볼장을 건설했고 56개의 실외 활동장소를 마련했으며 각종 건강운동 기자재 1063틀을 갖춰놓았는데 건강운동 골간인원들도 321명이나 양성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향촌 건설’과 빈곤부축 사업과 더불어 노인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활동장소와 기자재를 잘 마련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네,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의 북쪽 청차관(淸茶館)은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형성되었다고 하는데요, 산동(山東)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이 최초로 부락을 이뤘던 오랜 마을입니다. 이름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찻물을 상기하게 되는데요, 과연 지명 청차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연길 북쪽의 지명 청차관은 그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

연길시에서 살고 있는 박철원 청취자가 15일 답안을 보내오셨는데요, 편지에 자세하게 청차관 이야기를 적어주셨습니다.

"연길시 발전촌부근에 있는 청차관은몇해전에는 영화촬영지로 되여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게 되였고 지금 오지단지들이 늘어선 정원과 특색있게 꾸며진 집안장식에  토닭고움 등 음식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청자관부근에는 확실히 소문난 샘물이 있어 일찍 향 양로원도 샘물터부근에 지어졌고 물 료법으로 병치료하는 작은 병원도 세워져있습니다. 부근의 자그마한 저수지의 물이 좋아 고기맛도 특별히 좋아서 저희들은 그곳의 낚시단골도 되였습니다.

저도 원래는 청차관을 차나 마시는 집으로 여겼고 또 부근의 샛물과도 련상했는데 방송을 듣고나서 순화된 지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퀴즈에 박철원 청취자를 비롯해서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김화순 김옥자 김란희 박순자 리영자 이선자 리선자 류금희 박계옥 박인순 김순옥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박범두 황순금 청취자가 함께 답안을 보내왔습니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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