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2-08 13:40:37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2월 4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2월의 첫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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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월

입춘이 방금 지났습니다.

양력으로 2월 3일 22시 57분이 입춘 절기의 시간입니다.

봄은 24절기의 첫 머리인데요, 봄은 만물의 시작을 대표하지요.

역경에 이르기를, 극에 이르면 변한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

겨울을 견뎌내며 생명의 불씨를 품고 있던 씨앗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추위가 가듯 코로나가 물러가고 꽃이 피듯 평안한 일상이 다시 깃들길 바랍니다.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의 마을 지명 이야기입니다.

고종의 어의가 잠적했던 ‘너페’

20세기 초, 한국 서울 궁전에 있던 어의가 두만강 북쪽의 시골마을에 잠적했다. 조선 왕실의 비사처럼 일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었다.

박광훈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63년~1907년 재위)의 어의였다고 한다. 그가 언제부터 태의원을 떠났는지는 현재로선 소상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연변 지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오랫동안 의병들과 함께 있었다고 박씨 가문에 전하고 있다.

외손녀인 김숙자 노인 역시 어릴 때 그렇게 들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말씀하시던데요, 외할아버지는 강원도 임계라는 곳에서 의병들을 위해 상처를 치료하고 병을 보셨다고 합니다.”

구한 말의 의병은 1905년 매국조약인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일어났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많은 군인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쟁의 양상을 띠어가게 되었다. 일제가 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1910년 이후 의병들은 지하활동을 하거나 대륙 동북 지역과 연해주 일대로 이동했으며 독립군이나 광복군으로 연결되어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간의 박광훈의 행적을 조각조각 맞춰보면 그는 1907년 경 왕궁에서 나왔던 것 같다. 이 무렵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침략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던 것이다. 왕의 폐위와 더불어 일부 어의가 자진 혹은 피치 못할 사유로 부득불 궁실을 떠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박광훈은 의병활동이 지하에 숨어든 후에도 계속 반도에 남아있었다. 어쩌면 국권회복에 계속 실올 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서울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왕의 소식이 날아왔지만 천만 뜻밖에도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부고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서울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다. 이를 놓고 뇌일혈이나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한약이나 식혜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박광훈은 시종 왕이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훗날 그는 자식들에게 왕궁의 비사를 일부 털어놓았는데, 와중에는 고종이 내시에게 남겼다는 유언 한마디가 들어있었다.

“짐은 이렇게 죽더라도 백성은 다치지 말게 하라.”

이에 따르면 고종은 자기가 독약을 먹고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이 유언이 구경 누구의 입을 통해 궁실에서 흘러나왔는지는 풀지 못할 미제謎題이다. 그렇다고 박광훈이 함부로 만들어낸 허구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어쨌거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가 독살 당했다는 독살설이 항간에 유포되면서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항거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킨 조선 민족해방운동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일어난 이 비폭력운동은 총검을 앞세운 일제의 군정체제에 의해 결국 무참하게 실패한다.

박광훈은 급기야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듯 고향을 멀리 떠난다. 나중에 그들 가족이 행장을 풀어놓은 곳은 두만강 기슭의 산간마을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중학교를 다니던 김숙자가 어머니를 따라 오지의 이 외갓집을 찾아온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정경이 그의 눈앞에 실물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때 여느 시골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물레방아가 아직도 마을 귀퉁이에서 철썩철썩 하고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물레방아처럼 마을의 이름도 그 무슨 고물딱지를 방불케 했다. 난생 처음 듣는 이상한 지명이었던 것이다.

“다들 그곳을 ‘너페’라고 부르던데요…”

그러나 “너페”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넓은 평지라는 의미의 ‘넓평’이 와전되어 생긴 이름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앞뒤로 산에 꽉 막힌 이 고장에 ‘넓평’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장 사치였다.

아무튼 너페는 나중에 용화향勇化鄕의 소재지 고령촌高嶺村, 아니 고령촌 1,2대(隊, 촌민소조)라는 다른 이름으로 세간에 등장한다.

고령촌은 진짜 이름처럼 산이 높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또 나무가 크고 풀이 우거졌다. 그때 어린 김숙자는 아낙네들을 따라 부근의 산에 버섯 따러 갔는데, 앞쪽의 고작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사람마저 수풀에 가려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란다.

“정말 무서웠지요, 그런데 누구도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겁니다.”

알고 보니 산에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뭐 짐승이 사람의 이름을 알아듣기라도 할까… 참으로 마을이름처럼 별난 풍속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너페’도 이처럼 심마니들의 은어隱語로 곰을 이르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심심산골의 이 고장에 ‘곰’의 이름자가 달려있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다. 지난 세기 5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고장에는 호랑이 따위의 큰짐승이 자주 출몰했기 때문이다. 큰짐승들은 울바자를 타고 넘듯 제멋대로 두만강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박광훈 가족이 두만강을 건넌 후 산속에 있던 독립군이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너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박광훈은 동네에서 홀로 떨어져 산기슭에 거처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근의 산비탈에 땅굴을 파고 어구를 나무 등속으로 은폐했다. 독립군의 부상자가 오면 땅굴에 남몰래 숨겨놓고 치료를 했다고 한다. 땅굴은 말 그대로 산속 밀영의‘야전병원’이었다.

그러고 보면 박광훈은 간도로 이주할 때 옛날의 의병이었던 독립군과 모종의 연락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반도에 또 난리가 터졌던 1951년 너페에서 세상을 떴다. 어린 김숙자가 너페에 갔을 때 박광훈은 벌써 전설 속의 인물로 되고 있었다.

‘상투사건’은 그 중의 하나였다.

8.15 광복 후 박광훈은 의사증명서를 받으려고 화룡 시내로 갔다고 한다. 이때 박광훈은 옛날처럼 여전히 머리에 상투를 얹고 있었다.

“아니, 아직까지 상투를 틀고 있다니요?” 관원은 대뜸 얼굴을 찌푸리더란다. 해방된 새 사회에 대한 무언의 불복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상투를 그냥 매려면 증명서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박광훈은 끝내 상투를 남겼고 또 의사증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고명한 의술 앞에서 뭐라고 트집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인가는 수백리 밖의 타향에서 웬 농부가 앉은뱅이의 딸을 소 수레에 싣고 찾아왔다. 딸은 그때까지 열아홉 살의 나이를 먹도록 제 발로 땅을 밟고 걷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인제 걷게 해주면 내 양딸로 되겠느냐?”

박광훈은 다리와 허리에 침을 놓으며 우스개를 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가 땅에 떨어져 먼지가 묻기도 전에 처녀가 자리에서 저절로 일어섰다고 한다.

훗날 처녀는 우연히 박광훈의 외손녀 남편을 만나자 기어이 집에 초대하고 제잡담 닭의 목을 비틀더란다. 그 시절 닭을 잡아 식탁에 올리는 것은 잔치 때나 있을 법한 융숭한 대접이었다.

초야에 이름 없는 쑥대처럼 묻혀 살아도 의사의 천직은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광훈은 언제나 몸에 붓과 벼루를 소지하고 다니다가 환자를 만나면 돈을 받지 않고 선선히 처방을 뗐다고 한다.

그토록 꾸밈없이 소탈한 사람이었지만 좀처럼 내놓지 않는 ‘보배상자’가 있었다.

나중에 박 씨 가문의 외독자인 외삼촌이 이 상자를 대물림으로 물려받았다. 외삼촌 역시 언제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꼭 갖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이 상자를 ‘보배’처럼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궁전의 패물과 옛 의서, 사진 등속을 넣은 것 같습니다.” 기실 외손녀인 김숙자 노인도 이 ‘보배상자’를 눈요기조차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상자의 물건은 박씨 가문의 둘도 없는 ‘보배’로 전해지고 있었다.

네,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의 한 마을 지명 이야기이었습니다.

산속의 짐승을 그대로 부르지 않고 따로 이름을 지어 불렀던 산간지대의 남다른 이야기이었습니다.

이런 지명이나 이름은 아직도 민간에 다다소소 남아있으며 일부는 방언사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청취자 내신 코너]

오늘의 방송은 2월의 첫 '청취자의 벗'인데요, 한국의 김연준 청취자가 신축년 설에 즈음하여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럼 편지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포근한 가운데 봄비처럼 약하게 비가 내리는 2월의 첫날입니다. 

오늘 한국의 코로나19 환자는 해외유입 20명을 포함해 305명의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한때 천명을 육박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1일 300~400명대를 오르내리며 안정적인 추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설을 앞두고 있고 2월에 시작하는 코로나 예방접종을 위해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현행 거리두기 단계를 유지하고 5인 이상 집합금지를 설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과 습근평 주석간 전화통화를 가졌습니다.

양국 정상은 2022년 한중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양국은 인적, 경제를 포함한 교류협력을 활성화하기로 했으며 2021~2022년을 한중문화교류의 해로 선포하고 풍성한 성과를 거두기를 기원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관심이 많은 습근평 주석의 방한과 고위급 교류협력을 위해 긴밀하게 소통하고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한중 양국이 코로나 상황을 극복하고 계획한 한중문화교류의 해를 성공시켜 내년에는 한중수교 3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길 바랍니다.

이번 주 입춘이 지나면 신축년 설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코로나로 온가족이 모이기 힘들겠지만 떡국을 먹으며 축복을 기원하는 마음 따뜻한 명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코로나로 부터 자유로워 지는 신축년 새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네, 다가오는 신축년 설에 김연준 청취자님을 비롯해서 여러 청취자 모두 마음 따뜻한 명절을 보내길 기원합니다.

지난 한달의 방송 소감을 길림성 장춘시의 김수금 청취자께서 편지로 보내왔습니다.

김수금 청취자의 방송 소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쏜 살 같이 빠르게 흐르는 세월, 2021년의 1월 한달도 벌써 지나갑니다

2020년은 다사다난의 한해, 범상하지 않은 한해...  코로나 19 감염병의 만연으로 세계를 뒤흔든 한해였습니다.

귀 방송국 임직원들은 공중 전파로 중국의 이모저모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특히는 코로나19의 싸움에서 중국이 쌓은 경험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은 내용이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지식성이 높아 지식의 전수자로 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중국민족", "라디오가 좋아요", "역사인물"", "지명이야기", "중국은 지금", "중국 명소", "지구촌 여행", "고사성어" 등등 프로그램의 이름만 들어도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이 많은 프로그램에는  정치, 경제, 문화 측면의 지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풍부한 역사지식과 생활 상식 등 내용을 들으면서 우리는 긍정적 에너지를 받은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가운데서 청취자들과 호흡을 함게 하는 "청취자의 벗"은 우리들이 즐겨 듣는 방송입니다. 

오늘은 요즘 방송된 '역사인물'을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역사인물의 이야기, 역사는 오늘날 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명깊에 방송을 청취하고 중국 역사 속의 여성들이 공훈을 말하고 싶습니다.

2020년 12월 18일에 방송된 삼국시기의 역사인물 채문희, 그는 글을 잘 쓰고 음악재능에 돌출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역사에 빛날 저명한 시인이요, 음악가였으며 거문고 연주가였습니다. 

2021년 1월 5일 방송된 춘추시기의 인물 서시는 용모가 아름다워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는 오나라 왕에게 미인계로 바쳐진 후 월나라가 오나라를 전승하는데 기여했습니다.

2021년 1월 12일 방송된 역사인물 왕소군은 평민의 딸로 미인이었습니다. 그는 흉노에게 화친의 대상으로 시집을 간 후 한나라와 흉노의 평화에 기여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당나라의 문성공주는 화친 대상으로 되어 토번 숭짠감보에게 시집을 갔으며 문화전파에 기여했습니다.

프로그램 "역사인물"에서 방송된 이런 인물들은 이전에도 잘 고 있었지만, 이번에 또 과목을 복습하듯 했고 흥미롭게 들으면서 기억이 새로워졌습니다. 중국 말에  "여인은 반쪽 하늘이다"고 하는데요,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오늘날 중국사회에서 여성들의 공적 특히 우리의 뛰어난 조선족 여성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민해방군 로켓부대 연구소의 총공정사인 이현옥 장군은 조선족인데, 중국공정원 원사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현재 중국에는 과학원과 공정원의 조선족 원사가 강경산, 김녕일, 김홍광, 리현옥 등 도합 4명이라고 합니다. 정말 우리의 영광입니다. 이밖에도 중국 대륙을 놀랜 '속산 천재'가 있는데, 이름이 오미령으로 조선족이라고 합니다. 오미령은 '속산 10단'의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습니다.  얼마전에는 또 청화대학의 졸업생인 조선족 황혜령이 '최강의 대뇌'로 세상에 이름으로 떨쳤습니다.

역사인물의 발자취를 따라 저는 우리 조선족 유명한 여성들을 다시 머리에 떠올려 보았습니다.

배움이 있는 삶은 다채롭고 충실합니다.

올해 방송을 더 열심히 청취하면서 방송에서 지식을 더 전수 받고 배움으로 지식을 더 쌓아 가고자 합니다."

네, 우리 방송의 내용이 자료가 되어 배움의 일부가 된다면 정말로 더 좋은 바램이 없겠습니다.

김수금 청취자를 비롯해서 여러 청취자에게 도움이 되고 즐거움이 되길 바랍니다.

네, 역사의 기록으로 되어 독자에게 도움이 디고 즐거움이 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책, 책입니다.

여러 독자들에게 배움과 도움의 향연을 베풀고자 대졸생들이 길림성 연길시에 책방을 꾸렸다고 합니다.

박철원 청취자가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연길대교 남쪽에 도서사 《연합도서사(布啡联合书社)》가 열렸다.

이 독서사는 취향이 맞는 3명 대졸생이 장서 2만부로 기획하여 꾸린 독서문화공간이며 책과 예술품들이모여있는 곳이라는 내용의 련합서사이다.

그들은 낡은 집 낡은 색상을 바탕으로, 낡은 책으로 새것을 창도하여 참신한 음악과 도시예술화 문화상품 기획, 미의 전파로 사람들에게 정신식량을 보충하여주려는 취지로 아늑한 도서열람장을 꾸려 책의 향연을 공유하면서 재활용을 실천하고 전통문화를 교류하며 사회문화공익활동을 조직한다.

문화자원의 발굴과 발전을 위해 그림, 서예, 사진, 련환화등을 포함한 잠자고 있는 력사의 보물---고금중외의 <책>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문화의 빛을 내게 한다.

지금 개인들의 책 기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늑한 환경을 찾아 커피와 차의 향을 누리고 흘러간 세월의 책속에서 필수의 자료를 찾는 책의 향연을 향수하고 있다."

네, 다가오는 음력설이 여러 독자가 책의 향연을 공유하면서 문화와 역사를 답습하는 기회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먼저 지난 1월의 퀴즈 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의 북쪽 청차관(淸茶館)은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형성되었다고 하는데요, 산동(山東)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이 최초로 부락을 이뤘던 오랜 마을입니다. 이름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맑은 찻물을 상기하게 되는데요, 과연 지명 청차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청차관을 한자 그대로 찻집으로 알고 있거나 부근의 샛물과도 연상하는데요, 실은 티티새라는 의미의 만족말 청자아라카스하에서 순화된 지명입니다. 지난 프로그램 '청취자의 벗'에 방송된 연변 지명 이야기에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청취자 분들이 '청쥐자의 벗'을 관심, 청취하시고 정답을 보내오셨습니다. 여러 분들이 '퀴즈 한 마당'에 열심히 동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이 서북쪽에 석인구라는 마을이 있는데요, 석인구는 한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면 돌사람의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석인구는 과연 어떻게 생긴 이름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연길 서북쪽의 지명 석인구는 어떻게 생긴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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