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2-17 11:24:0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2월 18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2월의 세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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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월

2월 18일은 양력 한해의 49번째가 되는 날이다. 이날은 올 한해가 끝날 때까지 316일 남아있다.

2월 18일은 또 24절기의 두 번째 절기인 우수 날이다. 우수는 곡우, 소만, 소설, 대설 등 절기와 마찬가지로 강수 현상을 반영하는 절기이다. 우수 절기는 강우의 시작을 표시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봄비는 기름과 같다”고 했다. 적당한 강수는 농작물의 생장에 아주 중요하다. 우수 절기에 들어설 때 중국 북방에는 아직 찬 기운이 채 가셔지지 않는다. 일부 지방에서는 아직도 눈이 내리며 봄 분위기를 느끼기 힘들다. 그러나 남방의 대부분 지역에는 벌써 봄기운이 완연하다.

우수 절기는 일반적으로 양력 2월 18일부터 20일 사이에 시작되며 3월 4일 혹은 5일에 끝난다. 우수 절기에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옹근 한 해 동안 한파가 제일 많이 출현하는 시기이다. 문득 춥거나 문득 더우며 추운가 하면 또 덥다.

우수 절기에 이르면 태양이 직사하는 곳은 남반구에서 차츰 적도로 가까워진다. 이때의 북반구 일조 시간과 강도가 모두 늘어나며 기온의 반등도 빠르다. 해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활약하기 시작하며 차음 북쪽으로 올라와 찬 공기와 만난다. 이에 따라 강우를 형상한다. 그러나 이때의 강우량은 많이는 작은 비거나 보슬비에 그친다.

2월 18일은 절기를 제외하고 기억될 날이기도 한다.

1885년의 이날 마크 트웨인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출간했다.

마크 트웨인은 《톰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 소설가이다. 그는 사회 풍자가로서 남북 전쟁 후에 사회 상황을 풍자한《도금시대》와 에드워드 6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왕자와 거지》등을 썼다. 

1917년의 2월 18일 이날 진독수가 ‘문화혁명’을 창도했다.

진독수는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이자 초기 지도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대소, 노신, 호적, 채원배 등 사람들과 함께 ‘반전통, 반공교(孔教), 반문언(文言)’의 사상문화 혁신, 문학혁명운동을 발기했다.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중국과 조선 국경의 마을 숭선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전설의 동네에 있었던 거인의 발자국

정말이지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다는 옛말을 듣는 것 같았다. 그는 마당의 빗자루에서 뽑아낸 대나무 가지에 낚싯줄을 감았다고 한다. 허줄한 그 낚싯대를 두만강에 드리웠는데 다섯 근이나 되는 이면수臨淵水魚를 낚았다는 것.

그게 염광호 씨가 열두 살 나던 해의 일이라고 하니 20세기 중반인 1966년경이었다.

“강에 얼음구멍을 파면 건져 올린 물고기가 금방 마대麻袋에 넘어났지요.”

동네 서쪽에서 두만강에 흘러드는 올기강은 더구나 물고기 때문에 소문을 놓았다. 통발자리가 좋다하면 아예 누렁소와 맞바꿈을 했다고 한다. 어슬녘에 놓은 통발은 해가 뜨는 아침이면 물고기가 넘쳐나 쳇바퀴처럼 둘둘 굴려서 강기슭까지 끌어냈다.

올기강은 원래 소토문강小圖們江이라고 불렸다. 강희康熙 51년(1712), 정계定界를 할 때 아지거토문阿集格圖們이라고 기록했는데 아지거阿集格는 만족 말로 작다는 의미이다. 1907년 무렵부터 오구강烏鳩江, 올구강兀口江으로 불렸다. 올기강은 이 이름의 와전이라는 해석이 자못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40년 3월, 항일무장부대가 올기강 기슭에서 마에다前田 경찰토벌대를 매복,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매복전은 동북 항일무장투쟁이 저조기에 처한 때 거둔 승리로 이 시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전투로 평가된다.

항간에서는 그때부터 올기강을 홍기하紅旗河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기실 홍기하라는 이름은 벌써 1885년과 1887년 국경확정勘界 기록에 나타나는 지명이다. 홍기하는 또 홍계하紅溪河라고 불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홍기하는 정말 항일부대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는 것 같다.

실제 전장 부근의 석인촌石人村에서 나서 자란 염광호 씨는 노인들에게 항일부대의 전투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석인촌은 북산에 사람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항일무장부대의 이야기는 석인촌 뿐만 아니라 올기강 양안에 전설처럼 파다히 전하고 있었다. 석인촌을 지나 상류 쪽의 일명 “연애바위”라고 하는 지명도 그렇게 생겨났다. 진짜 바위기슭에는 열 명 정도 자리를 펴고 누울만한 동굴이 하나 있었다. 항일군의 “야전병원” 혹은 “복장공장”이었다고 전하는 이 동굴은 훗날 도로를 닦으면서 자취를 감춘다.

항일무장부대는 이에 앞서 1920년대 벌써 이곳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그들은 많은 혁명적인 시가詩歌를 민간에 남겼다. 그리하여 항일무장부대의 세력권에 있었던 한 마을은 시가로 넘친다는 의미의 “시만촌詩滿村”이라고 이름을 짓기에 이른다.

염광호 씨는 여덟 살 때 가족과 함께 남쪽의 숭선향崇善鄕으로 이주했다.

숭선은 광서(光緖, 1875~1908) 초년 두만강 저쪽의 간민墾民들이 건너와서 이룬 마을이다. 1894년 청나라는 무간국撫墾局을 설치할 때 두만강 상류의 고성리古城里 일대에 숭화사崇化社를 세웠고 노과蘆果 일대에 선화사善化社를 세웠다. 숭선은 1933년 이 숭화사와 선화사를 통합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고성리는 숭선향의 소재지로 바로 올기강이 두만강에 흘러드는 합수목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름 그대로 부근에 옛 성곽이 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노과는 고성리의 동쪽에 위치, 소택지라는 의미의 “늪골”을 중국말로 음역하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우연한 일치인가? 염광호 씨의 부친 역시 조부를 따라 타향으로 이주할 때 마침 여덟 살 의 나이였다고 한다. 이주 전 조부는 막벌이꾼으로 서울에서 물을 길어 팔고 농사를 짓기도 했다. 생활이 하도 어려워 큰 딸은 민며느리로 남의 집에 주고 아내와 함께 세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는 것.

두만강은 말이 국계의 강이지 신발만 벗어들면 언제든지 첨벙첨벙 들어설 수 있었다.

그날도 어린 염광호는 또래들과 함께 두만강에서 자맥질을 즐겼다. 그러다가 뗏목에 기어 올라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던 본새대로 뗏목을 타는 나그네들에게 “모택동어록毛澤東語錄”을 읽어줬다.

“그때 ‘모택동사상’을 선전하기 위해 마을에 고음 확성기를 마흔 개나 달고 방송했지요.”

서북쪽의 군함산軍艦山 자락에는 “위대한 수령 모주석 만세!”라는 큰 표어를 만들었다. 글자마다 빙 돌아가면서 돌을 쌓고 하얗게 회칠을 했다. 글자가 하도 커서 십리 밖에 서있는 소경도 눈을 번쩍 뜨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군함산은 모양새가 똑 마치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조선전쟁 때 미군 폭격기의 조종사가 진짜 군함인 줄 알고 폭탄을 투하했다는 것. 폭탄은 부근의 숭선 소학교에도 떨어졌다. 훗날 학교 뒤뜰에는 폭탄 불발탄을 전시했으며 어느 교실에는 또 기관총 탄환에 뚫린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미군은 고성리 맞은쪽의 삼장리와 이어진 국경 교통로를 폭격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27년 설립된 고성리통상구는 장백산기슭의 첫 통상구로 불린다. 옛날 고성리와 삼장리에는 나루터가 있었고 훗날 나무다리를 놓았다가 1994년 시멘트 다리를 부설했다. 이 다리는 중조제1교中朝第一橋라고 불린다.

1969년대, 두만강 기슭의 이 마을에서도 도처에 방공용 굴을 팠다. 그러다가 굴을 파느라고 굴이 훼손되는 일이 생겼다.

“거구의 장수가 있었다고 해서 장수동將帥洞이라고 부르는 동굴이었지요.”

고성리 서쪽의 협곡에는 높이 2~3미터, 지름 10미터 정도의 장수굴將帥洞이 있었다. 웬 거인이 동굴을 나오면서 짚은 듯한 큰 손자국이 천정에 찍혔고 큰 발자국이 땅에 남았으며 또 잠깐 앉았다가 간 듯 큰 엉덩이 자국이 동굴어구에 있었다고 한다. 고고학계에 일대 파장을 일으킬 이 유적은 방공용 동굴을 뚫으면서 파괴되었던 것이다.

염광호 씨는 이 동굴처럼 소실된 마을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매골鷹溝 같은 마을은 해방(일본 항복, 1949. 8.15)이 될 무렵에 벌써 없어졌다고 합니다.”

매골은 워낙 백여 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며 학교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 옥돌골이 옥석촌으로 불리듯 집단기억에서 사라지는 지명도 있었다. 올기강을 계선으로 서쪽의 벌은 윗천벌, 동쪽의 벌은 아래천벌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천벌은 하늘 아래의 첫 벌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지명은 중국말로 기록하면서 상천평上天坪, 하천평下天坪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염광호 씨는 현지에서 교원으로 있을 때 위탁을 받고 촌사村史를 조사한 적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7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숭선을 떠났다. 그 무렵까지 숭선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유수의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답사팀이 숭선에 갔을 때는 원주민을 눈 씻고 찾기 어려웠다. 고성리에는 원주이라곤 식당을 차린 한 가구뿐이었다. 언제인가 그 무슨 “납치사건”이라도 벌어진 듯 했다. 알고 보니 원주민들은 열이면 열 모두 고향을 떠난 “실향민”으로 되고 있었다. 솔직히 천리 밖 청도靑島에서 대학 강단에 서있는 염광호 씨를 만났다는 게 하늘이 내린 “행운”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웃음은 미처 땅바닥에 떨어지기 바쁘게 머리를 쑥 움츠렸다. 아침나절에 미리 주문을 해서 식탁에 올린 매운탕에는 이면수가 아닌 손가락 크기의 버들치가 가랑잎처럼 둥둥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면수는 없느냐 하는 누군가의 힐문에 식당주인은 대뜸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에그, 무슨 꿈같은 소리를 합니까. 이면수라는 게 언제 있은 물고기라고 그럽니까?”

두만강의 일미로 불리던 이면수는 옛말로 되고 있었다. 예전에 마을의 동굴에 있었다는 거인이 이때 따라 눈앞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네, 숭선에 있었다는 물고기 이면수 그리고 동굴에 있었다는 거인의 흔적.. 등등

두만강 상류 기슭의 마을 숭선의 지명 이야기었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네,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의 서북쪽에 석인구라는 마을이 있는데요, 석인구는 한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면 돌사람의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석인구는 과연 어떻게 생긴 이름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연길 서북쪽의 지명 석인구는 어떻게 생긴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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