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2-25 17:48:40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2월 25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2월의 네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

1. 1월

2월 26일은 음력으로 2021년의 원소절 즉 대보름날입니다.

그러니 금주 목요일 2월 25일은 바로 대보름날 전날이 되겠습니다.

원소절 즉 대보름날은 달이 가장 둥근 시각이라고 하는데요, 그러나 올해 달이 가장 둥근 날은 대보름날 하루 후인 2월 27일의 16시 17분이라고 합니다.

2월 26일은 한해에 한번씩 있게 되는 정월 대보름날이다. 온 집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왠쇼를 먹고 둥근 달을 보며 채색등을 감상한다.

중국과학원 자금산천문대의 소개에 따르면 올해 ‘정월 대보름날의 달보다 16일의 달이 더 둥글다. 달이 가장 둥근 시각은 2월 27일 16시 17분이다. 비록 ‘15일의 달보다 16일의 달이 더 둥글다'고 하지만 대보름날에 달을 보려는 대중들의 기분에는 영향이 없다. 26일 저녁의 둥들고 포만한 달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시킬 것이다

천문일력에 따르면 지난 2017년, 2018년과 2019년 련속 3년간 정월 대보름날의 달은 ‘15일의 달이 15일에 둥글었으며 ’2020년과 2021년의 달은 ‘15일보다 16일의 달이 더 둥글게’나타난다.

왜서 둥근달이 나타나는 날자가 고정되지 않을까. 달이 지구를 에돌아 운행하는 궤도는 타원형으로서 가까와졌다 멀어졌다 한다. 가장 가까운 거리가 36만킬로미터 되며 가장 먼 거리가 40여만킬로미터 된다. 달이 회전하는 ‘발걸음'이 빠를 때도 있고 늦을 때도 있기에 매달 ‘볼 수 있는’시간도 차이가 난다.

달이 가장 둥근 시각의‘망(望)'은 일반적으로 음력의 매달 14, 15, 16일 혹은 17일이다. 이때 지구는 알맞게 태양과 달 사이에 있게 되는데 지구에서 볼 때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마침 달이동방에서 솟아오르는 데 태양 빛을 받은 달은 이 시각에 가장 둥글게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 15, 16일 이 두 가지 상황이 가장 많다.

16일의 가장 둥근 시각은 2월 27일 16시 17분이다. 그러나 26일 저녁의 달은 여전히 둥글고 포만하므로 명절의 분위기를 더 할 수 있다.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의 옥천동 등 동네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옥천동에 흐르던 샘물의 이야기

골짜기의 그윽한 곳에는 옥 같이 맑은 샘물이 흘렀다. 샘물에는 작은 새우가 서식하고 있었다. 샘물을 떠서 밥을 지을 때면 이따금 빨갛게 익은 새우가 밥에 묻혀서 고운 꽃무늬를 돋쳤다.

“다들 샘물에 홀딱 반했다고 합니다. 고향의 이름이 바로 옥천동玉泉洞이었거든요.”

20세기 초, 조부는 아들 넷을 데리고 이 골짜기에 첫 괭이를 박았다. 산비탈의 콩과 옥수수는 벌판의 무연하던 논의 옛 기억을 더구나 애잔하게 불렀다.

한국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동이라는 이 지명은 그렇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역의 심심산골에 “이사”를 했다.

훗날 김해금 노인은 조부의 족적을 따라 옥천동으로 찾아간다. 그들이 탑승한 차는 나중에 옥천동 부근의 산길에서 끝내 멈춰서고 말았다. 비가 내린 흙길이 하도 질척질척해서 차가 좀처럼 움직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때만은 옥천동이 하늘 아래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두메산골의 마을이 아닐지 했다.

옥천동은 복동진福洞鎭의 북쪽 지대에 위치한다. 복동은 광서(光緖, 1875~1908) 말년 간민墾民들이 이 고장에 석탄이 나고 또 금이 난다고 해서 복덩이가 있는 복지福地인 줄 알고 지은 마을이름이다.

진짜 복지였다. 탄광이 서면서 다른 곳보다 먼저 도로가 부설되었고 또 철길이 놓였다. 이에 따라 탄광은 덩치를 크게 불렸으며 뒤미처 이런저런 명목으로 사람들이 대거 이주했다.

여하튼 옥천동의 사람들은 “옥천동”을 복덩이가 있는 복지로 여긴 것 같지는 않다. 조부는 다른 길을 찾고자 타향으로 떠나며 그길로 소식이 두절되었다. 미구에 부친 김성산도 북쪽의 용연촌龍淵村에 땅을 사고 옥천동을 떠났다. 용연촌은 일명 용연평龍淵坪으로 불리는데 옥천동의 북쪽으로 몇 십리 떨어진 해란강 기슭에 위치한다. 용연은 마을의 남쪽에 큰 늪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어쩌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간민들에게 부자는 일종 사치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김성산이 용연에 엉덩이를 붙이기 바삐 대도회大刀會인가 뭔가 하는 조직에서 땅 많은 부자를 붙잡으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더럭 겁이 난 김성산은 다시 올망졸망한 이삿짐을 수레에 실었다.

그때가 바로 이른바 ‘집단부락’이 생기던 1937년 무렵이었다.

지난 세기 30년대부터 일본은 동북지역에서 강제적으로 집단부락을 세웠다. 산재한 민가들을 한데 집중하고 주변에 토성을 두른다. 이런 부락은 현재의 많은 마을을 형성, 대부분 각자의 마을이름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그때 김성산이 이사했던 두도구는 이름자에 골짜기라는 글자를 넣고 있었지만 동네방네에 이름 있는 작은 시가지였다. 두도구는 원래 복동하福洞河와 장인하長仁河, 해란강海蘭江의 합수목에 위치한다고 해서 삼하진三河鎭이라고 불렸다. 1910년 경, 하곡河谷 분지에서 아래로부터 위로 첫 번째 골짜기에 위치한다고 해서 첫 골짜기라는 의미의 두도구로 개명했던 것이다.

김해금 노인은 일가족이 두도구에 이사한 얼마 후인 1938년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두도구가 용정 시가지에 부럽지 않았다고 거듭 곱씹었다. 예전에 두도구에는 외국인이 지은 성당과 교회당이 있었고 또 그들이 운영하는 협화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어린 기억에 성당의 신부는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무서운 존재로 비치고 있었다.

“그분은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이 우리처럼 까만 게 아니라 보얗게 보였지요.”

김해금 노인이 말하는 신부는 독일인이었다. 독일인 신부는 일찍 1897년 연변에 이른바 “보얀 눈”을 드러냈다. 그때 신부 베루스白婁思가 원산교회元山敎會의 파견으로 훈춘琿春에 와서 설교를 했던 것이다.

이민이 늘어나고 마을이 생기면서 교세도 상승 가도를 달렸으며 조선인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때는 우리 조선인 학생들도 교회에 다녔습니다.” 전홍길(1932년 출생) 옹이 이렇게 옛 두도구 교회의 한 장면을 눈앞에 떠올렸다.

그는 두도구의 바로 서쪽 골짜기에 있는 두개동에서 나서 자란 사람이다.

두개동은 두가동杜家洞의 전음으로서 두杜 씨 성의 중국인이 세운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기실 두 씨는 골짜기 어구에 살고 있었고 골짜기의 개척민은 전홍길 옹의 증조부를 위시한 몇 가구의 조선인 이민들이었다고 한다.

전홍길 옹은 인터뷰에서 가족의 계보系譜를 소상하게 밝혔다. 이에 따르면 그는 정선 전씨旌善全氏의 52대손이라고 한다.

전 씨는 전섭全聶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정선旌善을 대종大宗으로 삼는다. 전섭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 백제 건국 10대 공신이다. 정선 전 씨의 집성촌은 강원도와 평안북도, 함경남도에 있는 걸로 알려진다.

전홍길 옹의 가족은 증조부 시절 함경북도 명천군 상운북면 상아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가문의 공동체에서 따로 떨어진 “외기러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명천군에서 살던 다른 무리의 “기러기”들이 19세기 말쯤부터 강남으로 날아가듯 떼를 지어 부산하게 본고장을 뜨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전 씨 가족도 명천을 떠나는 이 “기러기” 떼에 합류한다.

두만강을 건넌 후 전 씨 가족도 김성산의 가족과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최초에 자리를 잡았던 곳을 떠나 또 다른 고장에 정착하는 것이다. 아니, 뭔가 다른 데가 있었다. 그들의 첫 정착지인 쟈피거우夾皮溝는 두도구 서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인데, 만주족 말로 협소한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그러고 보면 전 씨 가족은 골짜기에서 살다가 또 벌이나 도회지가 아닌 다른 골짜기에 이사했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나무를 찍어 집을 짓고 풀뿌리를 뽑아 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땅을 사서 부치지 못하고 집을 사서 들지 못할 정도로 생활이 몹시 쪼들렸던 것이다.

그럴지라도 전 씨 가족 역시 다른 간민들처럼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는 들풀마냥 억센 생명력을 자랑했다. 뒷이야기이지만, 전홍길 옹의 증조부가 북간도 땅을 밟을 때 일가족은 증조부 그리고 조부의 형제 식솔 등으로 일여덟 정도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3대가 지난 후 전 씨 가족은 무려 120명으로 헤아리는 큰 가문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와중에 대학교 문을 나선 사람만 16명이 된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 씨 가문에 문과와 무과 급제자가 200명을 넘었다더니 그 실력을 이역 땅에서도 뽐내고 있는 듯 했다.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전 씨 가족의 욕구는 골짜기에 살더라도 결코 남에게 한발자국도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에 전홍길 옹이 다니던 학교는 민성학교였다. 그때 두도구에는 일본인이 꾸리던 이 학교를 제외하고 또 독일인이 꾸리는 해성학교가 있었다. 예배를 보는 학생들은 민성학교가 아닌 해성학교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훗날 교세가 약해지면서 성당과 교회당은 모두 문을 닫았다. 훗날 감리교 교회당에 울리던 찬송가는 두도 영화관의 음악으로 변했고, 천주교 성당의 종소리는 광흥중학교(훗날 두도2중으로 개명)에서 상과나 방과를 알리는 종소리로 바뀌어졌다.

인제 두개동도 현지 토박이들만 알고 있는 특이한 지명으로 되고 있다. 정말이지 그 무슨 인디언이 숨어서 살았던 정글의 옛 부락이 아니었던가 싶다..*

 

네,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의 옥천동 등 동네의 지명 이야기었습니다.

아름다운 지명 그리고 성씨로 지은 이런 지명의 이야기에는 이주민들이 애환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청취자 내신]

이 시간에는 먼저 한국 서울 박균욱 청취자의 편지 사연입니다. 박균욱 청취자는 10여년 전에 저희 방송국 직원과 인연을 맺었는데요, 그간 전화통화를 가진 적도 있습니다.

네, 편지 사연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서울 남산 해방촌에 살고있는 박균욱입니다.

“일전에 제가(박은옥선생님에게) 한 번 전화 드린적이 있지요, 제가 박선생님을 비롯한 조선어방송 성원들과 함께 우리가 39살 정도 때 만난적이 있지요 우리 나이는 1963년생 동갑이니까요.

이렇게 늦게나마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파와 단파로 귀 방송을 수신하고 있으며, 귀 방송을 들은지도 어언 42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귀 방송을 통해서 방송 내용중 특히 여러 소수민족의 정보를 듣게 되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중파로 상태가 좋은 날에는 1206khz 연길 조선어 방송도 듣습니다.

최근에 어떤 나라는 중국의 인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만 중국의 인권을 비판하는 나라는 자신의 국민들을 악질 강도들로부터 보호하는데 더 힘써야 할 것 입니다.

빨리 이 코로나19 위기가 극복되어 중국 땅을 유람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자주 소식 올릴 것을 약속드리며, 성원 여러분들 안녕히 계십시오."

 

예, 우리 방송과 인연이 계속되기를 바라구요. 이번 코로나19 사태 기간 항상 건강하여 좋은 바램이 성사되길 바랍니다.

일본 효고시의 히시 흐기오(杉尾 整) 청취자의 수신보고서를 받았습니다.

히토시 스기오 청취자는 수신보고서에 일본에서 귀국 조선말 프로를 수신했는데, 아주 잘  들을  수 있었다고 글을 적어 보내왔습니다. 또 중파 방송에 혼신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잘 수신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저희 방송을 관심, 청취해 주시고 수신보고서를 세세히 적어보낸 히토시 스기오 청취자에게 이 기회를 빌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방송의 열성 청취자인 구원모 청취자가 한국 대구에서 중국국제방송 한국어 사이트 페이지에 일부 기능을 추가하여 이용자들이 더욱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해 달라는 제안을 보내왔습니다. 이 제안을 상부에 전해드리고 요구 사항대로 이용자들이 편리하도록 개선하기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네,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의 서북쪽에 석인구라는 마을이 있는데요, 석인구는 한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면 돌사람의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석인구는 과연 어떻게 생긴 이름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연길 서북쪽의 지명 석인구는 어떻게 생긴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공유하기:
기타 플랫폼
CMG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