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5-20 17:28:09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5월 20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5월의 세 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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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월

금주의 월요일인 5월 17일은 양력 한해의 137일째 되는 날로 올 한해가 끝날 때까지 228일 남았습니다.

이날 17일은 세계 텔레콤과 정보사회의 날입니다.

 

1969년 5월 17일, 국제텔레콤연맹 제24차 행정이사회가 정식으로 결의를 채택하고 국제텔레콤연맹의 설립의 날인 5월 17일을 ‘세계 텔레콤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각 회원국에 1969년부터 해마다 5월 17일에 모두 기념행사를 열 것을 요구했습니다. 2006년 11월, 국제텔레콤연맹은 세계텔레콤의 날과 세계 정보사회의 날을 세계 텔레콤과 정보사회의 날로 합병했습니다.

2021년의 세계 텔레콤의 날 대회 주제는 ‘도전으로 충만된 시대에 디지털화의 전변을 빨리자“입니다.

텔레콤은 전보, 전화, 팩스, 무선전 설비, 온라인 등 수단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방식을 말합니다. 1844년 전보는 정식으로 공중 통신에 사용되었습니다.

 

5월 17일은 또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입니다.

이 날은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정신병 명부에서 삭제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성 경향과 성별 인정으로 하여 동성애를 두려워하고 육체와 정신적으로 폭력과 공정하지 못한 대우가 산생되지 않도록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동성애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은 다른 사람들에게 동성애 사람들도 건강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이로써 더는 동성애 사람들을 혐오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해마다 5월 17일은 세계 고혈압의 날입니다. 이 날은 세계 고혈압연맹에서 2006년에 연구하고 결정했습니다.

 

1792년의 5월 17일, 세계적으로 제일 큰 증권시장인 뉴욕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미국 맨하탄 월가에 위치한 뉴욕증권거래소는 유럽의 런던증권거래소와 아시아의 도쿄증권거래소와 함께 세계 증시의 중심으로 되었습니다.

 

5월 18일은 국제 박람관의 날입니다.

국제 박람관의 날은 국제박람관협회가 발기, 창립했습니다. 1977년, 국제박람관협회는 세계 박물관사업의 건강한 발전을 추진하고 박물관사업에 대한 전 사회의 요해를 늘며 참여와 주목을 받기 위해 전 세계에 1977년 5월 18일을 첫 국제 박람관의 날로 정한다고 선포했으며 해마다 국제박물관의 날 활동 주제를 결정했습니다.

 

5월 18일은 이슬람세계의 예루살렘의 날입니다.

예루살렘의 날은 유태 역서 5727년 즉 양력 196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수복한 날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1979년 6월, 이슬람공화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예루살렘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1982년, 5월 10일, 이 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예루살렘 시티를 구원할데 대한 결의를 통과했습니다. 1984년, 이 위원회는 특별회의를 열고 5월 18일을 예루살렘의 날로 결정했습니다.

이슬람국가는 해마다 이날 여러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 군사 진압에 항의하며 민중들에게 팔레스티나 인민을 적극 성원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5월 20일과 21일은 첫 ‘온라인 발렌타인데이’로 정보시대의 사랑의 명절입니다. 이 명절은 중국의 한 유명 가수의 노래 ‘디지털 사랑’에 나오는 ‘520’을 중국말로 ‘아이 러브 유’로 비유하고 또 한 음악인의 온라인 노래에서 ’아이 러브 유‘와 온라인 연인의 ’긴밀한 연계‘에 기원을 뒀습니다. 훗날 ’521‘도 차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의미로 되었습니다. 이 명절은 또 ’결혼의 길스런 날‘, ’프러포즈를 하는 날‘, ’애교를 부리는 날‘로 불립니다.

21세기 초기, 온라인 세계에서 조용히 흥기되었고 억만으로 헤아리는 누리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온라인 명절입니다. 이날 연인들은 서로 훙뽀우 즉 럭키 머니를 보내고 선물을 하는 등 붐을 일으킵니다. 사람마다 즐기는 명절로 되는 등 새 민속으로 되고 있습니다.

 

5월 21일은 소만입니다. 소만은 24절기에서 여덟 번째 절기로 여름철의 두 번째 절기입니다. 해마다 5월 20일부터 22일 사이 태양은 횡경 60도에 이르는데, 이때가 소만입니다.

소만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 뜻을 가집니다. 하나는 농사 절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소만은 사월 가운데서 밀의 기운이 소만으로 이르렀지만 아직 미숙합니다. 다른 하나는 강수와 연관이 있습니다. 옛 말에 소만, 대만에 강물이 찬다고 했습니다. 소만 후 날씨는 따뜻하던 데로부터 차츰 더워지며 강수도 차츰 늘어납니다. 소만은 무더운 여름의 등장을 상징합니다. 여름철 곡물의 밀 등속은 알알이 탱탱해지지만 아직 성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만이라고 부릅니다.

북방 지역으로 놓고 볼 때 소만은 24절기에서 일조 시간이 제일 긴 때입니다. 소만 후 중국 대부분 지방은 평균 기온이 섭씨 22도를 넘습니다. 이때 치습에 주의를 돌리고 물을 많이 마시며 과일을 많이 식용해야 합니다.

 

[고정음악]

 

그럼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재미있는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부근의 지명 이야기입니다.

 

하늘 아래의 그림마을 천도상

 

또 하나의 진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다.

태를 묻은 고향이었지만 하늘 아래의 그림 같은 마을은 아니었다. 뼈 빠지게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증조부는 고심하던 끝에 아들형제 넷을 데리고 도망하듯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때부터 함경북도 명천군 하곡면 수렴동은 이 씨 가족의 추억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미구에 이 씨 일가족이 이삿짐을 내려놓은 곳은 용정 동쪽의 성암城岩이었다. 광서(光緖, 1875~1908) 중반에 형성된 이 마을은 순수한 조선인동네였다. 성암은 남쪽 산정에 돌로 쌓은 옛 성곽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이복록 옹은 1936년에 출생한 이민 3세로 시골 성암이 아닌 용정 시가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2년경 비로소 옛 고향집이 있던 성암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결혼한 후 집안 친지들에게 인사차로 들렸던 것이다. 집안의 좌장 격인 셋째 조부가 그때까지 줄곧 성암에서 붙박여 살고 있었다.

용정에서 개산툰으로 통하는 기차는 팔도하자八道河子 역에서 잠깐 멈춰서고 있었다. 팔도하자는 1932년 철도를 부설하면서 생긴 마을로, 부근을 흘러 지나는 강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팔도하八道河는 여덟 갈래의 작은 강이 한데 모여 이뤄졌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성암 마을은 팔도하자에서 내린 후 서남쪽으로 한 시간 가량 더 걸어가야 했다.

그때 이복록 옹이 군복을 입었던 탓인지 부근의 군사갱도가 화젯거리로 밥상에 올랐다. 이 갱도는 지난 세기 40년대 일본군의 군수품 창고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 이 갱도에 들어가서 탄자 등 물품을 꺼낸 마을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창고를 수비하던 소련군이 난사한 총에 맞아 부상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토록 난데없는 ‘복’이 문득 떨어지기도 했지만 성암은 필경 앞뒤가 꽉 막힌 두메산골이었다. 밭농사를 해서는 도무지 살림이 펴일 것 같지 않았다. 증조부는 이사한 얼마 후 ‘쑤아’에 떠났다가 웬 일인지 무소식이 되었다. ‘쑤아’는 ‘소비에트 러시아(1917~1922)’를 이르던 중국말 ‘蘇俄’의 음역으로 그 시절 구소련의 연해주 지역을 이르던 말이다.

집안에는 대뜸 대들보가 뽑힌 것 같았다. 이때 밭농사에서 조부의 남다른 안목이 빛을 발했다. 그가 콩을 심으면 콩 값이 뛰어 오르고 팥을 심으면 팥 값이 뛰어오르는 식이었다.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던 마을사람들은 나중에 그를 찾아 내년에는 뭘 심는가 하고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한다.

수중에 얼마간의 돈을 쥐게 되자 조부는 금방 용정 시가지로 자리를 뜬다.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를 시키려면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조부가 집을 샀던 곳은 시가지 동남쪽의 둔덕이었다. 그곳은 ‘영국더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실은 캐나다의 조차지租借地이었다. 선교사들은 영국인이 아닌 캐나다인이었지만 똑 같이 코가 컸고 머리가 노란데다 영국 말을 하다 보니 영국인으로 오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더기’에는 캐나다 장로회가 설립한 ‘명신여자중학교’와 ‘은진중학교’가 있었다. 이 두 학교는 당시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한편 장로회는 ‘제창병원’을 세워서 의료봉사를 했다.

조부가 산 집은 추녀가 건뜻 들린 팔간 기와집이었다. 오매불망 그리던 궁궐에 짝지지 않았다. 인제 살림은 막 바자굽에 자라는 백일홍처럼 활짝 피어날 것 같았다. 그야말로 하늘 아래 그림 같은 마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인들은 반도에서 두만강 건너의 연변 땅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1909년 일본인들은 용정에 ‘간도일본총사령관’을 설치하며 또 동만東滿 지역의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부를 증설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조선 국내의 시위운동에 호응하여 연변과 연해주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연변에서는 3월 13일 용정에서 있은 독립선언식이 최초였다.

이때 용정에서 지방 군경들의 탄압으로 사상자가 적지 않게 속출하였다. 대성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이복록 옹의 부친은 시위에 참가한 탓으로 경찰서에 붙잡혀갔다고 한다. 이어 경찰에게 당한 구타의 후유증은 일생동안 부친을 동반하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의 ‘후유증’이 생길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부친은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한동안 집에서 몸조리를 했다. 그때 조부는 휴양을 하라면서 특별히 함경도 경성군 주을朱乙온천에 가는 여행단에 넣어주었다. 이 여행단에는 용정에서 사진관을 꾸리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훗날 그 사람은 어찌어찌하여 ‘일본간첩’으로 몰렸다. 예전의 그의 온천여행 사진에는 부친의 모습이 들어있었으며 이 때문에 부친도 ‘일본간첩’이라는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각설하고, 이복록 옹이 학교를 다닐 무렵 그가 살던 집은 더는 원래의 기와집이 아니었다. 1943년 경, 조부는 지인의 보증을 섰다가 부채를 한 아름이나 걷어안게 되었다. 그래서 시가지 근처에 있던 ‘노른자위’의 땅을 팔았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기와집을 팔고 ‘영국더기’의 아래에 초가를 사서 들고 있었다.

그곳은 해방 후 천도상天圖廂이라고 불렸다. 천도天圖는 천체의 그림을 이르는 말이며 상廂은 성문밖에 이어져 있는 거리를 말한다. 미상불 천도상은 하늘의 그림 같은 마을을 동경하여 지은 지명이 아닐지 한다. 광서 초년에 형성된 이 마을은 나중에 ‘안거낙업安居樂業’을 갈망하는 의미의 안민가安民街로 불린다. 동남부의 길승가도吉勝街道가 이 무렵 길승상吉勝廂으로 불린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이다. 서부의 용문가도龍門街道는 지형과 위치에 따라 용문상龍門廂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 씨 가족이 두만강을 건너면서 그토록 동경했던 하늘 아래 그림 같은 마을은 더는 실상이 아닌 환영幻影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보증사건으로 졸지에 궁지에 몰리게 된 조부는 집에 있던 땡전을 죄다 털어서 시골의 싸구려 밭을 몇 마지기 산다.

“다시 땅을 가꾸더라도 손자들을 공부시키겠다고 그런 거지요.” 이복록 옹은 기억에 남은 조부의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단다.

밭이 있는 고장은 일명 ‘노루바위’라고 했는데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노루바위’는 동명촌東明村의 바로 뒤쪽에 있었다. 동명촌은 1909년 형성된 마을로 ‘동명학교’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1946년 경 어린 이복록 옹은 모친을 따라 ‘노루바위’로 다녀왔다고 한다. 동성용東盛涌까지 기차를 타고 갔고 거기서 내린 후 흙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동성용은 상호商號 이름을 그대로 붙여서 지은 이름이다. 나중에 동성용이 전국에 소문을 놓게 된 것은 이 상호 때문이 아니다. 연변의 첫 호조조互助組가 여기에서 탄생되었고 중국 첫 농민대학인 ‘새벽농민대학’이 설립되었다.

동성용은 또 요․금遼․金 시기의 천년의 유적으로 유명하였다. 남쪽의 용성촌勇成村에는 고대 봉화대가 있었다. 용성촌은 옛날 이 봉화대를 수비하던 장병들이 용감하게 싸워 과업을 완성했다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동성용이 이복록 옹의 어린 기억에 남긴 건 종일 힘들게 걷던 추억뿐이었다. 작은 내를 건너고 또 산언덕을 따라 20리 길을 걸었다고 한다.

“노루바위의 동쪽 고개가 바로 팔도하자의 지경이었지요.”

고개를 넘으면 용암촌龍岩村 6대(隊, 촌민소조)의‘광주바위’였다. ‘광주바위’는 ‘광주리 바위’의 준말로 마을 뒷산의 바위가 광주리 같게 생겼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아무튼 조부는 두 번째 고향인 팔도하자로 뒷걸음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빈 털털이로 고생하던 이주초기의 경상이 다시 ‘노루바위’에 그림자처럼 비끼는 듯 했다. 그러나 이복록 옹은 그게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토지개혁을 하던 1947년 일가족은 하마터면 칼도마에 오를 뻔 한다. 일찌감치‘영국더기’의 기와집을 포기한 게 천만 다행이었다. 조부는 ‘노루바위’의 땅뙈기 때문에 약간 잡음을 빚었지만 종당에는 중농 신분으로 낙착되었다. 가진 거라곤 두 주먹밖에 없었던 부친은 도시빈민으로 계급을 인정받았다.

이복록 옹은 나중에 북경복귀의 기회를 포기하고 고향 연변에서 대학 교직敎職을 선택한다.

이 씨 가족은 말 그대로 새로운 고장을 찾을 때마다 그곳에 씨앗처럼 뭔가의 이야기를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줄줄이 엮어진 가족사는 결코 한두 마디의 지명 이야기처럼 쉽고 간단하지 않았다. 하늘 아래의 그림 같은 마을이었지만 정녕 그림 같은 생활은 아니었던 것이다.*

 

네, 이씨 가족의 가족사처럼 다사다난한 용정의 지명 이야기었습니다.

하늘같은 새 생활을 바라 두만강을 건넜지만 마을에는 항상 그림 같은 생활이 함께 한 건 아니었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에 ‘함박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요, ‘함박동’이라는 마을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함박동’은 무슨 의미일까요.

 

중국 길림성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는 “조선민족은 모양이 크고 물건이 많이 담기는 큰 나무소래를 함지, 함지박이라 부르며 물함박, 쌀함박이라는 물건들도 생겨나고 크게 곱게 피는 꽃을 함박꽃이라고도 이름도 지었습니다고 하면서 (방송을 듣고) 함박동의 지명 유래를 알게 되었다고 퀴즈의 정답을 보내왔습니다.”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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