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21-06-01 11:13:44 출처:cri
편집:李仙玉

[오피니언] 승리의 시바이포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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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시바이포의 조각)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을 창건하고 새 나라를 세우기까지 중국공산당은 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완강한 정신으로 그런 고난을 딛고 오늘날 세계적인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런 정신 중 하나가 바로 승리의 시바이포(西栢坡) 정신이다.

시바이포는 후퉈하(滹沱河) 강기슭, 타이항산(太行山) 자락에 위치한, 산 좋고 물 맑으며 유구한 문화, 순박한 민풍을 보유한 시골 마을이었다. 바로 이런 작은 마을이 근대의 중국이 어두운 밤에서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중국공산당이 전국적인 승리를 거두는 족적을 기록했다. 새 중국 역사의 여정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전국적인 집권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1947년 5월 3일, 중국공산당 중앙공작위원회가 시바이포에 주둔하고 산하의 기관 각 부서도 시바이포 인근의 10여개 마을들에 분산되어 자리를 잡으면서 아름다운 시바이포 마을은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정치군사지휘센터의 하나가 되었다. 1948년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런비스(任弼時)가 중국공산당 중앙과 해방군 본부를 이끌고 이 곳에 주둔하면서 시바이포는 해방전쟁시기 중국혁명의 지휘중심지로 부상해 중국공산당 중앙의 “마지막 농촌지휘부”가 되었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제7기 제2차 전회 후 마오쩌둥은 중공중앙과 해방군 본부를 이끌고 시바이포를 떠나 베이징에 입성해 새 중국을 창건했다. 시바이포에서의 이 1년여 동안 중국공산당은 3대 전역의 승리를 거두었고 <중국토지법대강>을 반포했으며 제7기 제2차 전회를 개최했다. 중국공산당은 이 곳에서 구 사회를 부수고 새 세상을 세우며 전국적인 집권을 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중국사회의 여정이 이로부터 농촌에서 도시로, 혁명에서 건설로의 위대한 전환을 마치고 “새 중국이 이 곳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위대한 역사는 위대한 정신을 형성하고 위대한 정신은 위대한 역사를 추진한다. ‘두 가지 반드시’를 지키며 끊임없이 “과거시험을 보는” 정신은 시바이포 정신의 핵심이다. ‘두 가지 반드시’는 “반드시 겸허하고 신중하며 자만하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은 기풍을 계속 유지하며, 반드시 간고분투의 기풍을 계속 유지해야 함”을 말한다. 마오쩌둥은 승리로 인해 자만하고 진보하지 않으며, 향락을 누리고 더는 간고분투하려 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 상황에서 ‘두 가지 반드시’를 지켜야 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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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시바이포)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본색을 구현한 ‘두 가지 반드시’는 그 어떤 시기든지 중국공산당인들이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준칙이다. 새 나라를 세우고, 잘 살고, 강해진 오늘날에도 중국이 직면한 도전과 문제는 여전히 복잡하며 ‘두 가지 반드시’는 오늘날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어떤 눈부신 성과를 거두어도 중국공산당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위기의식을 가지며 겸허하고 신중하며 간고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용감하게 투쟁하고, 용감하게 승리를 향하’는 철저한 혁명정신은 시바이포 정신의 실질이다. 1947년 3월 13일 국민당이 옌안(延安)을 무력으로 침공하면서 공산당과 국민당간 관계가 완전히 파열되었고 전쟁 수단으로 중국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선택이 되었다. 그 때 국민당은 병력이 430만명에 무기장비가 훌륭했고, 공산당의 병력은 127만명, 장비는 아주 낙후했다. 실력의 이런 현격한 차이에서도 1947년 10월 10일 공산당은 ‘전 중국을 해방한다’는 총체적 전략적 방침을 제정했다. 해방전쟁 초반에는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했다면 중공중앙이 시바이포에 입주했을 당시는 해방전쟁이 가장 눈부신 성과를 따낸 때여서 국민당의 ‘평화회담’ 조건을 받아 들이냐 마느냐 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10개월 동안 중공중앙은 이 시바이포에서 24개 전역을 지휘하고 248만명이 넘는 적군을 섬멸했으며 이런 승리를 바탕으로 1949년 4월 23일 장강을 건너 국민당의 통치중심지인 난징(南京)을 점령했다. ‘용감하게 투쟁하고, 용감하게 승리를 향하’는 철저한 혁명정신은 전쟁정세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 위에 세워졌고 민심이 향하는 자신감 속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국민에 의지하고 단합통일의 민주주의 정신은 시바이포 정신의 중요한 내용이다. 중국공산당 중앙공작위원회는 시바이포에 입주하자 <토지법대강>을 반포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했으며 그로 인해 억압받던 백성들이 진정으로 생존의 근본인 자신의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 수 천 년의 봉건토지제도가 개변되어 농민들이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고 토지구도의 변화에 따라 농민들의 정치적 위상이 향상되었으며 농민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공산당을 지지하고 공산당의 혁명을 지지했다. 화이하이(淮海) 전역만 봐도 공산당의 10만 군부대 뒤에는 리어카를 끌고 탄약과 식량을 수송하거나 부상자를 구조하는 4,50만명의 백성이 따랐다. 해방전쟁의 승리는 인민의 승리인 것이다.

1949년 3월 23일 중국공산당 중앙이 시바이포를 떠날 때 마오쩌둥은 “우리는 시험 보러 서울로 올라간다”고 말했으며 “(서울에 입성했다 실패한) 이자성(李自成)이 되지 말고 시험을 잘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도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시험을 보고 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중국몽을 이루는 ‘시험’과정에 ‘두 가지 반드시’는 중국공산당인들의 사상적 계율과 각성제이고 ‘용감하게 투쟁하고, 용감하게 승리로 향하’는 ‘두 가지 용감한’ 정신은 중국공산당인들이 고난을 극복하는 무기와 추진제이며, 국민은 중국공산당인들의 강대한 버팀목이다. 

시바이포 정신은 오늘날도 빛을 뿌린다.

출처: 조선어부 논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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